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고은 시인의 추문을 취재하고도 기사화하지 못했던 사연

[취재파일] 고은 시인의 추문을 취재하고도 기사화하지 못했던 사연
2016년 10월이었습니다. ‘#문단_내_성폭력’이 SNS를 휩쓸고, 이후 ‘문단’을 넘어 여러 분야에서 비슷한 폭로가 터져 나오던 그때였습니다. 당시 문화부 기자였던 저는, 문화계의 다양한 사람들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세상에 까발려진, 고은 시인을 둘러싼 추문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문단 내 성폭력이 만연해있는지 그렇다면 얼마나 심각한지를 묻자, 여성작가 A씨는 고은 시인의 이름부터 꺼냈습니다. ‘악명 높은 인물’이라는 설명과 함께 그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일들을 이야기해줬습니다.

90년대 중반 어느 문학상 시상식이 있은 뒤 열린 회식자리에서 고은 시인이 등단을 준비하던 젊은 여성을 성추행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A씨의 목격담은 출판업계에 종사하는 또 다른 여성 B씨의 성추행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진술은 구체적이었고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다른 문인들이 함께한 ‘열린 공간’에서 성폭력이 행해졌지만, 누구 하나 그 상황을 말리거나 지적하지 않았다는 고발은 끔찍했습니다.

고은 시인이 누구입니까? 교과서에 시가 실려 있고, 노벨상 수상 가능성 때문에 해마다 문화부 기자들을 긴장시키던 그 원로시인이 이런 추문의 당사자라니, 충격적이었습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그 실체는 세상에 드러나야 마땅하고 신화는 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문단 안팎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시인을 둘러싼 유사한 추문을 확인하고, 기사화하기로 마음을 먹게 됐습니다.

A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카메라 앞에 서거나 자신의 신분을 드러낼 수 있는 인터뷰에는 응하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거듭 설득했지만, 마음을 돌리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인터뷰에 응함으로써 그가 감내해야 할 비난과 음해를 잘 알기에, 싫다는 그에게 더는 집요할 수 없었습니다.

성추행의 피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을 조심스레 접촉해 그들의 의사를 확인해봐야 했습니다. B씨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했습니다. 고은 선생이 술에 취해 때때로 부적절한 언행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굉장히 불편하거나 심한’ 추행을 당한 기억이 자신에겐 없다고 했습니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이이게 고백을 부탁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다른 여성작가 C씨가 성폭력의 피해자로 지목한 D씨의 기억도 확인해봐야 했습니다. C씨는 D씨가 고은 시인으로부터 불쾌한 일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어렵사리 연락이 닿았지만, D씨 역시 그런 기억은 없다고 했습니다. ‘열린 공간’에서 고은 시인의 부적절한 언행을 목격한 일은 있지만 자신이 피해를 당한 기억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A씨와 C씨의 기억이 부정확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B씨와 D씨가 피해사실이 있는데도 잊어버리거나 부인하는 것인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여성들에게 어쩌면 기억하고 싶지 않을 오래전 기억들을 떠올려달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문단 내 ‘오래된, 그 공공연한 비밀’에 대해 목격담을 들려준 이는 신분이 드러날 수 있는 인터뷰를 거부했고, 당사자로 지목된 다른 여성들은 끝내 아무런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 잘 알고있다“ 혹은 ”000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랬을 것이다. 충분히 있었을 법한 일이니까“라는 여러 목소리를 확인했지만, 떠도는 소문이나 평판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걸 소리 내어 얘기해 줄 진실의 목소리를 끝내 찾지 못한 채, 며칠을 매달려 취재했던 이야기는 결국 그렇게 세상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취재기록은 노트북에 폴더를 만들어 저장해뒀습니다. 언젠가는 누군가 소리 내어 이야기해 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1년이란 시간이 흘러 ‘오래된, 그 공공연한 비밀’은 마침내 글이 되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후 서지현 검사가 불을 당긴 ‘미투 운동’을 타고, '비밀'은 문단의 벽을 넘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당시 기자로서 내가 치열하고 집요하지 못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쳐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성추행 사건의 특성상 이니셜 속 여성들을 상대로 더 집요해지는 건 돌이켜봐도 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먼저 용기를 내주지 않는 한 말이죠.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은 때가 있고, ‘오래된, 그 공공연한 비밀’은 2018년 2월 세상에 드러날 운명이었나 보다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노트북 한쪽에 저장해 둔 취재기록을 오랜만에 다시 열었습니다. 수많은 이들의 말을 기록한 글들 속에 B씨의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렇게 까발리기 시작하면 굉장히, 아주 위험하다고 저는 생각이 돼요.…당시 워낙 힘든 시대였으니까 그런 억눌린 현실에 대한 분출이 성적인 것들로도 좀 왜곡해서 나오는구나, 그런 맥락도 있었다고 보았거든요.”

당시 그 말을 듣고 적잖이 놀라고 당황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최근 문단 내 몇몇의 반응을 보면 여전히 어느 술집에서 이런 얘기를 주고받는 문인들이 있지 않을까 우려스럽기도 합니다. 그들에겐 A씨의 절규를 전하고 싶습니다. “그런 짓을 하면서 겉으로 인류평화를 말하면 너무 웃기는 일 아니에요? 여성을 짓밟고서 인간을 논한다고요?”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