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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뒤로 넘어질 듯 뻣뻣했던 김여정이 남긴 숙제

손 벌리는 쪽의 당당함이 주는 불편함

고철종 기자 sbskcj@sbs.co.kr

작성 2018.02.14 09:27 수정 2018.02.14 15:15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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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뒤로 넘어질 듯 뻣뻣했던 김여정이 남긴 숙제
<논설위원 斷想>

정치 역학적으로 한반도처럼 초강대국에 그물처럼 엮인 곳이 또 있을까.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거기다 미국과 맞장 뜨는 북한까지. 경제적으론 우리는 건국 이래 최고의 지위를 누리고 있지만, 국제 정치에선 다시 열패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내 맘대로 되는 게 거의 없다. 설령 운전대를 잡아도 가고 싶은 길을 갈 수가 없다. 초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태풍을 일으키고 지진까지 발생시켜 내 마음에 드는 길을 간다는 게 불가능하다.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느끼게 되는 이런 좌절과 피해 의식은 상대의 태도에 스스로를 민감하게 만든다. 여기에 역사의 단절과 식민지 경험은 그런 느낌을 더하게 하는 요소가 된다.

때문에 중국이, 미국이, 일본이 조금만 우리를 무시하는 느낌이 들어도 우리는 분노한다. 평창올림픽 개막식에서 일본의 식민 지배를 옹호하는 발언을 한 미국 NBC 해설자에 대한 분개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것도 그런 배경이 작용해서다. 

짐작컨대 그런 측면에서 북한은 더할 것 같다. '핵 완성'으로 미국과 맞장 뜨자고 기세를 높이면서도 실제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 국방력, 행여 미국이 공격하면 파멸할 수밖에 없는 냉혹한 현실, 핵개발의 자존심으로 경제 제재를 이기자며 인민을 독려하면서도 자본의 냄새를 맡기 시작한 인민들의 배신까지 염려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무력이 약하고 체제의 견고성이 떨어지기에,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약함을 숨기기 위해 과도한 공격성이나 부자연스러운 당당함을 표출한다. 이번 북한 최고위층의 방남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동생 김여정 부부장은 당당한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지만, 그 당당함이 지나쳐 상당수의 국민들이 무례하다는 느낌까지 받을 정도였다. 또 김영남 위원장은 우리 통일부장관과의 첫 만남 자리에서 반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고령의 나이를 감안하더라도 공식석상에서는 서로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 북한의 스포츠 관계자들 역시 한국 기자들이 질문하면 대놓고 반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사진=연합뉴스특히 김여정은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 악수할 때 마치 뒤로 넘어갈 정도로 뻣뻣하게 인사를 하는 가하면, 전날 동계올림픽 개막식장에선 문대통령보다 한 계단 위에 있으면서도 억지로 허리를 세워 인사하는 모습이 너무나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그 장면을 보고 일부 언론에선 허리디스크가 있는 게 아니냐는 가시 돋친 논평까지 내놨다.

아쉬운 게 있어서 왔지만, 절대로 아쉬운 모습 보이지 않겠다는 오기다. 동시에 남한의 수뇌부에게 절대 꿇리지 않는 당당한 모습을 북한 인민에게 선전하는 측면까지 고려했을 터이다. 하지만 지나친 당당함 속에서 배어져 나오는 그들의 다급함과 콤플렉스를 숨기지는 못했다.

국가 간 고위인사의 만남은 그 만남의 장면만으로 수많은 의미부여를 낳는다. 누가 영접하는지, 며칠을 머무르는지, 악수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고개를 숙이는지, 몇 번이나 식사를 하는지가 모두 정치적 해석을 부른다.

트럼프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 때가 그랬고,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국빈방문 때도 그랬다. 특히 중국 왕이 외교부장이 문대통령의 팔을 툭 건드렸다고 해서 외교적 결례라며 불쾌해 할 정도로 민감한 우리 국민들에게, 이번 북한 고위급 인사들이 방남 때 보인 태도는 복잡한 심경을 유발하는 듯하다.
중국외교부장 왕이가 문 대통령 팔을 툭 치는 모습우리 대통령에게 결례가 되는 정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도도하고 당당한 그들의 태도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국민들이 얼마나 될까. 도와달라고 손을 내미는 상대를 고압적으로 대하는 것도 성숙하지 못한 태도이지만, 도움을 바라는 입장에서 지나치게 자존심을 내세우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하도 오랫동안 봐 왔기에 이제 적응이 될 만도 하지만, 이번에도 은근한 불쾌감이 새록새록 솟아오르는 걸 막을 수가 없다. 정치는 모든 영역을 초월하는 가장 강력한 상부구조다. 경제, 문화, 스포츠도 강력한 정치적 행보에는 묻히고 만다.

북한의 도도한 정치적 행보에, 평창올림픽이 스포츠가 아니라 국제정치의 첨예한 무대가 된 느낌이다. 올림픽에 대한 집중을 다소 희생하면서까지 만든 남북 간의 만남이라면, 그만큼 좋은 결실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앞길에는 여전히 갈지자로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