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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좌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③

[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좌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③
● 한 남자, 실크로드 12,000km를 걷다

”내겐 아직도 만남과 새로운 얼굴 그리고 새로운 삶에 대한 고집스럽고 본능적인 욕망이 남아 있다. 나는 아직도 머나먼 초원과 얼굴에 쏟아지는 비바람과 느낌이 다른 태양빛 아래 몸을 맡기는 것을 꿈꾼다.“

<나는 걷는다>라는 도보 여행기를 쓴 올리비에 베르나르의 말이다.
나는 걷는다
그에게 새로운 꿈이란 은퇴 후 예순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의 시안(長安)까지, 1만 2천km에 이르는 실크로드를 걸어서 완주하는 것이었다.

실크로드에서 대상(隊商)행렬마저 사라진 지금, 그는 아무도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그 길을 과거의 그들처럼 걸어서 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길 위에서 보낸 4년의 세월은 드디어 그에게 완주의 기쁨을 안겨준다. 그는 그 길 위에서 만난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스스로의 불굴의 의지로 그 힘겨운 여정을 이겨낸 것이다.

베르나르가 걸은 여정의 대부분은 자신이 살아온 세계와는 많이 다른 터키, 이란,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중국 등 이슬람 문화권의 나라들이었다.
올리비에 베르나르, 그에게는 실크로드를 걸어서 완주하는 꿈이 있었다.
가끔은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두려움이 된다. 그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생활환경이나 종교 같은 문화적 차이뿐만 아니라, 4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와 타클라마칸 사막 등 척박한 자연환경은 그를 지치게 했고, 실패를 맛보게도 했다.

사람이 주는 공포는 또 어떠한가. 내전 지역을 지날 때는 여러 번 총구 앞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으며, 그를 괴롭히는 사소한 좀도둑들이야 차고 넘칠 만큼이었다.

하지만 그는 짐수레 하나만을 끌고서 걷고 또 걸었다. 결국 그는 목숨을 건 노력 끝에 그가 꿈꾸던 실크로드를 횡단하는데 성공한다. 수많은 도전을 물리치고 이뤄낸 커다란 성취요, 업적이었던 것이다.

그 긴 여정을 담아낸 책이 <나는 걷는다> 세 권이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그의 책 마지막 문장이다. 그 문장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이다. 무엇이 그리도 헛되고도 헛된 것이었을까.
멀리 동북각루가 보인다.
● 동북각루에서 정조를 만나다.

나도 걷는다. 나의 길은 수원화성에 머물러 있다. 길은 동북각루로 향하고 있다.

나는 베르나르의 꿈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한편으론 이 광대한 성곽도시를 건설한 정조의 꿈을 상상해 본다. 정조가 완공된 수성화성을 바라보며 느꼈을 그 감회가 오죽하였을 것인가? 비명에 간 아비에 대한 마음의 빚을 덜어내는 계기이면서, 새로운 조선에 대한 웅대한 기대 역시 숨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의 꿈은 수원화성 너머에 있었을 것이다. 그 너머에는 조선을 건국한 창업주 이상의 꿈과 웅지를 품고, 부국강병이라는 조선의 꿈이 서려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꿈을 향한 여정의 끝이 머지않았음을 그는 모르고 있었으니, 여기에 조선의 슬픔과 좌절이 배여 있다.
동북각루 전경
저 언덕 위 성곽을 따라 오르면 동북각루가 있다. 그렇게 절벽 위 큰 바위를 바닥 삼아, 의연하면서도 고혹스런 모습으로 한 마리의 학이 날개짓이라도 하는 양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건물, 바로 보물 제1709호인 동북각루(東北角樓)다.

동북각루는 1794년(정조 18) 10월 19일 완공되었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휴식과 풍류가 깃든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성곽 바깥의 용연(龍淵)과 용머리바위, 그리고 성곽 주위의 버드나무가 어우러져 각루(角樓)로서의 군사적 기능보다는 호화로운 운치를 풍기는 정자로서의 기능이 더욱 돋보이게 된다.

그런 이유로, 동북각루는 방화수류정(訪華隨柳亭)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데,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니는 정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니는 정자의 모습. 수원시청 제공
● 정조의 꿈과 좌절

수원화성이 완공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을 찾은 정조는 축성의 노고를 치하하고, 동북각루에서 활시위를 당겼다고 한다. 활쏘기의 달인이었던 그에게 활은 자부심이었고, 왕으로서의 권위를 확립하는 의식이었다. 그랬던 그였기에 새로이 축성된 광대한 현대식 성(城) 위에서 활시위를 당김으로써 제국의 완성을 선포하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조선에 대한 자부심과 앞으로 만들어갈 조선의 역사는 그를 들뜨게 했을 것이다.
동북각루에서 바라본 수원시내 모습
지난 세월이 성리학적 유교 철학을 바탕으로 통치 사상과 이념을 정비하고, 제도를 마련하는 시간들이었다면, 앞으로 그에게 펼쳐질 시간들은 실질적인 부국강병의 시간들이 아니었을까? 어느새 즉위한 지도 20년이 흘렀지 않은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남아 있는 시간은 불과 몇 년뿐이었다. 천명(天命)이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던 것이다. 혹자는 성군(聖君)으로서 정조가 화룡점정을 찍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의 길지 않은 수명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수원화성 성곽길 52
정권 초, 정조는 자신의 즉위를 적극적으로 도운 홍국영을 절대 신임함으로써 빚어진 5년여의 국정혼란을 마무리한 이후, 탕평책과 더불어 왕권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써 문신을 육성할 목적으로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왕의 병권 강화를 위한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는 등 국정의 안정을 위한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 등 이른바 실학파로 불리는 서얼 출신의 신진 관료들을 규장각으로 모으고, 그 규장각 안에 지금으로 따지면 연구관 제도인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를 두어 정치적으로는 왕권 강화를 위한 세력 기반을 강화하고, 자신의 이념적 터전을 닦고자 하였다. 초계문신 중 대표적인 인물이 정약용이다.
규장각의 모습. 자료사진
또 한편, 탕평책의 일환으로 정약용 등 남인들을 대거 등용하였으나,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의 천주교가 몰고 온 광풍으로 천주교 신자가 많았던 남인들을 도륙 내는 엉뚱한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그는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또 정조는 금난전권(禁亂廛權, *육의전을 비롯한 한성 내의 37개 시전들이 도성 안팎 10리(약 4km) 이내에서 난전을 금지시킬 수 있는 권리)를 폐지하여 난전(亂廛)을 보호함으로써 상업의 활성화를 도모하였고, 도망간 노비를 잡아들이던 노비추쇄법(奴婢推刷法)을 금지하여 양인(良人)의 수를 늘리는 등 백성들의 삶의 향상과 더불어 세역(稅役)과 군역(軍役)이라는 국가의 근간을 개선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그에게 주어진 20여 년 동안 그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제한된 환경 아래에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고, 나름의 성과를 낸 왕임에는 틀림이 없다.
정조의 세손 시절 쓴 글씨
하지만 그에게는 문체반정이나 서체반정 같은,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터무니없는 것들에 필요 이상의 노력을 기울인 왕이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문체(文體)나 서체(書體)가 통일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지나치게 유교적이었고, 또 구닥다리였던 것이다. 당시 청나라를 위시한 세계가 나아가는 ‘다양성’이라는 발전 방향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서구 열강은 산업혁명의 시대를 맞이하여, 눈을 들어 세계로 나아가고 있을 때, 우리는 문체니 서체니 하는 지엽적인 내부 문제들에 매달려 세계사적 흐름과는 동떨어져 있었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 서체반정 후 추사의 글씨는 글씨체의 표본이 된다.
● 정조의 한계와 조선의 한계

문체반정을 통해 정조가 대표적으로 문제 삼은 책이 바로 박지원의 <열하일기>다. <열하일기>는 당시 소설식 문체와 해학적인 표현을 빌어 연암체라고 불리는 독특한 문체를 구사해 엮은 여행기로, 당시에도 화제작이었다. 하지만 성리학적 교조주의에 빠진 정조의 눈에는 말 그대로 패관문학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옛 중국의 성현들의 말씀도 많은데 하필이면 아무 쓸모도 없는 시정잡배의 글이냐고 정조는 나무랐던 것이다. 사서오경 같은 경전을 읽으라는 이야기였다. 요즘으로 치면 코란 외에 다른 것을 배척하는 일부 이슬람 과격세력과도 많이 닮아 있다.

정조는 그런 문체로 책을 쓴 이를 불러 반성문을 받기도 했으니, 박지원을 비롯한 적지 않은 관료들이 반성문을 써야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고답적인 성리학의 사상적, 문학적 한계를 벗어나 새롭게 일어나고 있던 18세기의 문예운동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우리의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간에 세계사의 조류는 바뀌고 있었고, 정조라면 그 조류에 올라탈 수 있는 그릇이고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일부 시대착오적 과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나마도 조선 건국 이래 주목할 만한 개혁적 군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영화 <역린>에서 보듯, 정조 스스로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의술이나 활쏘기 등 자기계발에는 열정적이었으나, 그가 감당하였던 아버지의 죽음이나 군주가 되기 위한 지난한 과정 같은 시대적 운명에서 그는 자유롭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정조가 겪어내야 했던 삶의 조건들은 필연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동반했고, 이는 결국 그를 사지로 내몰고 만다. 게다가 그가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해 선택한 과도한 술과 담배 역시 문제였다.
영화 <역린><button class= 이미지 확대하기
의 한 장면" data-captionyn="Y" id="i201142874"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80131/201142874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 ● 정조의 술과 담배

정조는 1752년에 나고, 1800년에 죽었다. 우리 나이로 49살의 나이에 죽은 것이다. 그런 그의 삶 속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술과 담배였다.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남령초(담배)만한 것이 없다. 이 풀이 아니면 답답한 속을 풀지 못하고 꽉 막힌 심정을 뚫어주지 못한다.(......) 담배를 백성들에게 베풀어줌으로써 그 혜택을 함께 하고자 한다.“

정조의 말이다.

이처럼 정조는 엄청난 골초였다. 왕의 담배 사랑은 10대의 아이들조차도 담뱃대를 물고 길거리를 다닐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도 채제공을 비롯한 많은 신하들이 담배의 백해무익함을 주장하고 단속의 필요성을 주청하였지만, 정조는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게다가 정조는 애주가였다.
신윤복의 '연소답청(年少踏靑)'. 당시에는 아이는 물론 여인네들에게도 담배는 흔한 기호품이었다.
그의 주량은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정조에게 음주와 관련해 나쁜 습관이자 특기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남에게 강제로 술 먹이기였다고 한다. 정조는 주요 행사가 있는 날이면 주연(酒宴)을 베풀었는데, 그 모임의 모토는 ‘취하지 않은 자, 집에 가지 못한다.’였다고 하니, 그 술자리가 얼마나 흥청망청이었을지는 실로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특히 술을 꺼리는 신하에게는 필통에 술을 부어 억지로 마시게 했다니, 요즘의 직장 상사였다면 ‘극혐‘의 대상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사가 왕인 걸 어쩔 것인가.

거기다가 정조는 화증(火症)까지 있었다. 현재의 의학용어로는 조울증 쯤 되지 않을까 싶다. 그는 화를 참지 못하였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겪은 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것으로 이해되지만 그 정도는 참으로 가볍지 않았으니, 욕이나 화풀이 대상으로는 나이든 신하일지라도 예외가 없었다고 한다. 살로 그의 ‘욱‘은 대단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이런 기질은 숙종부터 영조를 거쳐 정조에 이르기까지 집안의 내력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정조의 어진
어찌 되었건, 정조는 즉위 24년 만에 죽음을 맞는다.

탕평책을 펼쳤다고는 하지만 노론으로 대표되는 당파들의 힘은 여전하였고, 그가 아니어도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제도를 바탕으로 하는 통치시스템은 마련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후계자는 어렸다. 그의 후계자인 순조는 겨우 열 살의 나이에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그 임금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한 이는 영조가 66살의 나이에 계비로 맞은 정순왕후였다. 영조와 혼례 당시 그녀의 나이는 15살이었고, 그의 아비는 외척이라는 이유로 노론 벽파의 수장이 된 김한구다. 그런 배경의 정순왕후였으니, 세도가의 득세는 불문가지였다.

하지만, 정순왕후 사후에는 순조의 외척(장인)인 노론 시파의 김조순 가문이 확고부동한 세도정치의 정점이 되었으니, 노론 벽파 입장에서는 정순왕후가 오래 살지 못한 것이 또 어쩌면 한이 되었을 것이다.
수원화성 성곽길 60
그렇게 조선은 세도정치라는, 국가가 아닌 개인이나 일개 집안의 이익에 철저히 봉사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그 결과는 망국의 길이었다. 그로부터 60여년 뒤 고종의 아버지였던 흥선대원군이 나서 정조의 왕권강화책을 벤치마킹해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되살려보려 했지만, 당시에도 권력을 쥔 사람들의 욕심은 나라의 안녕이 아닌 권력을 통한 자신의 영달을 향하고 있었으니, 조선은 문을 닫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동장대의 모습
●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길은 동장대로 흐른다. 동장대(東將臺)는 연무대(鍊武臺)라는 편액을 달고 있다. 연무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장대 앞의 평지가 널찍하다. 보기만 해도 사병들의 사열을 받고, 훈련을 하였던 장소였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곳의 지형은 높은 곳은 아니지만 사방이 트여 있어, 왜 이곳에 장대를 세웠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동북공심돈의 모습
동장대를 벗어나자, 저 멀리 둥근 원심형의 건물이 보인다. 특이한 모습이 눈길을 끈다. 동북공심돈이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앞서 설명한 서북공심돈과 마찬가지로 성곽 주위와 비상시에 적의 동향을 살피기 위한 망루로서의 기능이 그 첫째다.

설명에 따르면, 동북공심돈은 군사적 요충지인 것은 물론 수원화성 건축물 중 유일하게 원형형태로 희소성이 높다고 한다. 그냥 보기에는 겨울철 양곡을 저장하는 사일로를 닮았다. 내부는 소라처럼 생긴 나선형의 벽돌 계단을 통해서 꼭대기에 오르게 돼 있어 일명 ‘소라각’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수원화성 성곽길 63
총안(銃眼)으로 바라본 성 밖에는 늦은 가을의 흔적이 드문드문 행인에게 아는 체를 한다. 창룡문을 지나면 줄지어선 마을을 따라 성곽길이 이어진다.

● 봉수대에서 전쟁을 생각하다

얼마가지 않아 봉수대가 보인다. 봉수대는 5개의 연기구멍을 갖고 있는데,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남쪽의 첫째 것만 사용하고, 적이 나타나면 2개,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그리고 적과 접전시에는 5개의 봉화를 올렸다고 한다.
수원화성의 봉돈
결국 이러한 성곽이 필요했던 이유는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목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전쟁이란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으로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았고, 그로부터 2천년이나 지난 18세기 말 조선의 어느 고을도 이렇게 성곽으로 둘러쌓았던 것이다.

전쟁은 국가의 존망과 생사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과정은 필사적이고 기본 속성은 대단히 파괴적이다. 그래서 전쟁이 두려운 것이다.
수원화성 성곽길 65
최근 한반도에서 조성되고 있는 핵위협과 전쟁 가능성에 수많은 말폭탄들이 우리를 위축되게 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대화와 잠시나마의 화해무드가 조성되고 있음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세력들도 이 땅에 공존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심지어 북한 인공기와 김정은의 초상화를 불태우기도 하고, 평화올림픽이니 평양올림픽이니 말싸움도 대단하다. 그들을 보며 아직도 남북한 간의 화해와 공존, 평화의 길은 멀고도, 또 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느 것이, 어느 방법이 우리의 안녕과 안전을 담보한다고 쉽사리 말할 수는 없다.
수원화성 성곽길 66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이론들이 그 당대에선 대단히 적확하고 정교한 통찰이었겠지만, 그마저도 시대의 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누군들 잘못된 길을 가려고 했을 것인가. 결과가 그렇게 되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탁월하다고 하나, 여전히 시대와 그 시대를 이끄는 인간의 한계는 끝없는 시행착오를 담보한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은, 불완전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인간이 그렇게 막연하거나 불완전한 존재만은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집단 이성은 오락가락하다가도, 늘 조금씩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합리적인 운동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평화를 향한 오늘의 모든 행위들도 지난 10년을 헤매다 이제야 방향을 잡은 그 합리적인 그 움직임의 연장선이 아니던가.
100여 년 전 장안문의 모습
하지만 어느 것에든 필연적으로 반동(反動)은 뒤따르기 마련이다. 특히나 우리처럼 열린사회에서는 어쩌면 당연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 반동이 파괴가 아니라 성찰의 기회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비판과 감시, 그 정도, 그 만큼이기 만을 기대해 본다. 
 동남각루의 모습
멀지 않은 곳에 동남각루가 보인다. 남수문 위의 계단을 오르면 동남각루다. 수원화성에는 3개의 각루가 남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동남각루다.

성곽길이 끝나는 지점이 머지않은 듯 행인들이 뜸하고 한산하게 느껴진다. 남수문을 지나자 길이 갑자기 뚝~ 하고 끊겨버린다. 잠시 어디로 가야하나 어리둥절했다. 지나는 분에게 팔달문이 어디냐고 묻자, 팔달문 앞에서 팔달문을 묻느냐는 투다. 사실 그랬다. 골목길을 조금 벗어나자 팔달시장이 나타난다. 팔달 시장 안으로 들어가 이것저것 구경하고픈 마음 간절했으나, 지체할만한 시간이 없는지라, 팔달문으로 나아간다.
팔달문의 모습
팔달문(八達門)은 화성의 남문으로,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통팔달(四通八達)의 그 팔달(八達)이다. 지금은 그 이름 그대로 로터리의 중심으로 어디론가 떠나가는 이들의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었다. 로마 가도의 그 방사형 길의 중심처럼, 팔달문 역시 길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다만 서울의 남대문이 그렇듯 성벽은 헐리고 문만 남아 제가 서 있는 목적을 잃은 듯한 모습에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수원화성 성곽길 70
도심을 지나자, 길은 서남각루를 향한다. 수원화성의 일주가 머지않은 것이다. 길은 다시 광교산 남쪽의 탑 모양의 산이라 하여 탑산이라고도 불리었다는 팔달산을 오른다. 마지막 스퍼트를 올려야 하는 지점이다. 앞에 놓인 계단길이 아득하다. 마지막이란 안도가 주는 나태함이 이만큼의 시련도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도 가자!

길 위에는 낙엽들이 지난 계절을 추억하고 있다.
수원화성 성곽길 71
● 다시금 역사를 생각하다

수원화성 성곽길을 걸으며, 새삼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진정 역사란 무엇일까? 왜 우리는 한낱 지난 일을 배우고 또 익히는 것일까?

그 답은 영국의 역사학자 카(E. H. Carr)가 말하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경구에서 얻을 수 있을 듯싶다. 오늘이란 어제가 만들어 놓은 바닥 위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쟁투하는 공간이 아니던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역사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많이 안다. 누구든 십여 년 동안 공교육 안에서 역사를 배웠으니 모르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진정 우리는 역사를 알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무슨 해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같은 객관적인 사실만을 외운 건 아니었는지... 30여 년 전 대학 입학 후 읽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나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책들이 주었던 충격은 기존의 역사 교육에 심각한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이었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남(西南)암문(暗門)의 모습
정조의 역사도 많은 부분이 미화되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다시금 묻게 된다. 나 자신이 역사에 과문한 처지이고 보니 논할 주제조차 되지 못하지만, 정조가 성군이자, 개혁적 군주로만 인식되고 있는 현실은 그 평가 면에서 조금은 일방적이고 또 과해 보인다.

그런 면에서 ”역사는 항상 새롭게 다시 쓰이며, 따라서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는 역사학자인 칼 베커의 지적은 항상 유효하다. 역사가 현재의 거울이 되기 위해서, 역사는 올바르게 정립되어야 하고, ‘백의민족’ 같은 맹목적인 긍정의 역사를 뛰어넘는 성찰과 반성, 그리고 계승발전이라는 대의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어야 토인비가 말했듯 ”인류에게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는 데 있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 않겠는가.
수원화성 성곽길 73
●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서남암문을 지나자, 길은 서장대로 이어진다. 어느새 출발지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여정이 끝난 것은 아니다. 성 아래 오목한 곳에 자리 잡은 수원화성 행궁으로 가야 한다.

행궁(行宮)은 왕이 궁궐 밖을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는 궁궐을 지칭한다. 화성행궁은 화성 안에 건축된 행궁으로, 수원화성 행궁은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융건릉에 능행할 목적으로 건축하였다.
정조대왕 능행차 어가행렬. 자료사진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수원화성 행궁에서 치르는데, 지금도 수원 행궁에는 그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수원화성 성곽길 75
수원화성 성곽길 75-1
행궁 내 커다란 고목 앞에서 아이의 엄마가 치성을 드리고 있다. 고목 주변으로는 종이띠가 줄지어 매달려 있다. 무슨 염원이 있어 저리도 처연할까? 다만 개인의 일이든 국왕의 일이든, 설사 나라의 운명조차도 마음대로 되는 법이 없다는 사실은 조금은 깨닫는다. 그저 사람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말고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도 어슴푸레 깨닫는다.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들만 있을 뿐.... 역사마저도 그 하루하루의 묶음이 아니던가. 
수원행궁 봉수당
▶ [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①
▶ [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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