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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야생조류 노리는 '농약 볍씨'…새들에게조차 부끄러운 나라

[취재파일] 야생조류 노리는 '농약 볍씨'…새들에게조차 부끄러운 나라
국립환경과학원 생물 안전 연구팀 직원들은 지난 21일 충남 아산시에서 야생조류가 집단폐사 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전남지방을 중심으로 오리농장에서 AI가 번지고 있는 상황이라 자치단체와 금강유역환경청 등 관계당국에서도 현장으로 달려왔습니다. 침수나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만들어놓은 하수처리장 근처 저류지에서 흰뺨검둥오리를 비롯해 쇠오리와 왜가리 등 야생조류 22마리가 죽은 채 발견됐습니다. 새들이 죽은 곳 근처 너럭바위에는 군데군데 볍씨가 뿌려져 있었습니다.
아산 오리폐사현장
연구원들은 죽은 새들을 수거해 AI검사부터 시작했습니다. 당일 바로 알 수 있는 간이검사뿐 아니라 정밀검사에서도 AI바이러스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죽은 새 22마리 가운데 흰뺨검둥오리 17마리 몸에서 농약성분이 나왔습니다. 나머지 5마리 가운데는 죽은지가 오래돼 부검이 불가능한 왜가리도 있고, 쇠오리의 경우에는 농약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흰뺨검둥오리 사체에서 나온 농약은 살충제성분인 벤퓨라캅, 카보퓨란입니다. 그런데 검출된 농약은 치사량의 무려 45.1배나 됐다고 과학원은 밝혔습니다. 영국곡물생산협회에 따르면 메추라기 대상 카보퓨란의 치사량은 1kg당 2.5~5.0mg이라고 하니 얼마나 많은 농약을 먹고 죽었는지 짐작이 갑니다.

흰뺨검둥오리의 농약중독은 먹이로 먹은 볍씨를 통해서였습니다. 저류지 바위에서 발견된 볍씨에서도 농약성분인 카보퓨란이 치사량 이상 검출됐습니다. 누군가 고의로 볍씨에 농약을 묻혀 바위에 뿌려 놓았고, 먹이인 줄 알고 덥석 먹은 오리들이 독성에 중독돼 죽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산 오리폐사현장
1년 전쯤 충남 청양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독수리가 죽어 있다는 신고를 받고 야생동물구조센터와 환경과학원, 자치단체 직원들이 농경지로 달려 가보니 독수리 사체 주변에서 가창오리 폐사체가 무더기로 발견됐습니다. 논바닥 곳곳에 볍씨도 뿌려져 있었습니다.
청양 독수리농약중독
검사결과 독수리와 가창오리 몸에서는 볍씨가 나왔고, 해충방제제로 쓰이는 농약성분 카보퓨란이 검출됐습니다. 논바닥에서 수거한 볍씨 속에서도 동일한 농약이 나왔습니다. 아산에서 흰뺨검둥오리를 죽게 한 농약과 같은 독성성분입니다.

논바닥에 누군가 뿌려놓은 농약볍씨로 인해 가창오리 51마리가 죽었습니다. 또 농약에 중독돼 죽은 가창오리를 먹고 독수리 11마리가 폐사했습니다. 멸종위기종이자 겨울진객인 독수리는 월동을 하러 우리나라를 찾아옵니다. 살아 있는 동물을 사냥하는 대신 죽은 동물을 먹는 습관이 있다 보니 농약중독으로 폐사한 가창오리를 먹고 2차 피해를 당한 것입니다.
청양 독수리농약중독
국립환경과학원이 지난해 1년간 야생조류 집단폐사 32건, 6백88마리를
분석한 결과 대부분 사체에서 농약이 검출됐다고 밝혔습니다. 부검을 통한 검사결과 농약성분이 나온 야생조류 폐사체는 무려 28건, 5백66마리에 이릅니다. 분석대상 가운데 87.5%에서 폐사원인이 농약중독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나머지 4건 67마리의 폐사체에서는 농약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새들은 질병이나 배고픔, 충돌 등으로 죽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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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새들에게서 나온 농약성분은 살충제 원료로 쓰이는 카보퓨란 등 14종입니다. 지역별로는 충남, 전북, 경기, 경북, 전남, 부산, 경남, 강원, 제주 등 거의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농약중독으로 야생조류 50마리 이상 폐사한 곳은 전북 김제 떼까마귀 69마리, 경남 창원 직박구리 119마리, 경북 경주 떼까마귀 86마리 등입니다.

야생조류는 물고기나 조개 등 수중 생물을 잡아먹거나 과일, 볍씨 등을 먹습니다. 이런 먹이습관을 이용해 누군가 볍씨에 농약을 섞어 농경지나 하천 등에 뿌려놓아 야생조류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계절별로는 12월부터 시작해 1월과 2월에 폐사가 집중 발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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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누가? 이런 후진적이고 야만적인 농약 볍씨를 살포하는 건가요? 새의 분변이나 소음, 또는 질병을 걱정해 저지른 극단적인 행동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농약 등을 살포해 야생생물을 포획, 채취하거나 죽인 사람은 2년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집니다. 만일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으로 지정된 조류가 피해를 볼 경우 5년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게 될 만큼 형량이 높아집니다. 처벌 규정이 있는데도 독극물 피해가 계속 나타나는 것은 범인 검거가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범행장소가 인적이 드문 농경지나 하천 등인데다 대부분 방범용 CCTV도 별로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목격자나 신고자가 없을 경우 독극물을 살포한 범인을 잡기는 어렵다고 수사 담당자들은 말합니다.

처벌보다는 야생생물에 대한 인식의 개선과 민주적 시민의식의 함양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새들을 포함해 야생생물은 퇴치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생태계의 구성원들입니다.

배가 고파 아무 의심 없이 볍씨를 먹었을 뿐인데 그곳에 들어 있는 농약에 중독돼 죽게 된다면 야생조류의 원망이 얼마나 심할까요? 농약 볍씨는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입니다. 야생 생물에게도 안전하고 떳떳한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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