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판사 블랙리스트', 그리고 그보다 더한 것도 있었다

[취재파일] '판사 블랙리스트', 그리고 그보다 더한 것도 있었다
개인의 인생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 그것을 1명에서 많게는 13명의 사람이 결정한다. 결정하는 사람은 판사다. 때문에 일각에선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판사들이 지나치게 큰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 동안 동서양을 막론하고 때론 과도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판사, 즉 법관의 판단을 존중해 왔다. 적지 않은 경우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에 굴종하는 모습을 보여 왔지만, 최소한 법관의 판단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독립된 판단일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130개 조문에 불과한 우리 헌법이 법관의 독립(103조)을 별도로 규정하고 있고, 법관 신분에 대한 안전장치(106조)를 또 한 번 규정하고 있는 건 이런 믿음이 현실이 되고, 계속되게 하기 위해서다. 법관의 독립이 담보되지 않으면 재판의 독립은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고, 훼손된 재판의 독립은 개개인, 나아가 우리 사회를 오염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 판사 블랙리스트는 있었다…스스로 무너뜨린 법관의 독립

법관들 역시 사법부의 독립을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법관 개개인이 사실상 사법부이기에 사법부의 독립은 결국 법관의 독립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법원 추가조사위가 어제(22일) 발표한 조사보고서를 보면 법관의 독립, 재판의 독립을 법원 내부에서부터 훼손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법원 개개인의 성향을 분석하고, 대응 방안까지 검토한 문건들. 이 문건들은 '법관의 독립'을 가장 앞장서서 외쳐온 법원행정처 소속 판사들에 의해 작성됐다. 어제 공개된 문건을 보면, 성향 분석은 단지 분석 대상이 된 법관의 판결문을 검토하는 방식으로만 진행된 것은 아닌 걸로 보인다.

어제 공개된 문건엔 개별 법관의 활동이나 동료들의 평가도 등장한다. 힘센 법원행정처 전·현직 판사들이 특정 법관의 평가를 수집하고 다녔다는 건데, 그런 사실을 해당 법관이 알게 됐다면 어떨까. 인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법원행정처 소속 판사들이 특정 판사의 뒷조사를 하고 다니는 걸 다른 판사들이 알게 됐을 때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뒷조사라는 행위 그 자체가 사람을 위축되게 만드는 건 당연지사다. 
법원, 재판, 생중계
● 블랙리스트는 없다?…문제는 사찰 그 자체

일각에선 어제 조사 결과 발표에서 '판사 블랙리스트'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1년이란 기간 동안 실체도 없는 '블랙리스트'를 이유로 괜한 소란만 일으켰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블랙리스트'라는 용어를 법관 뒷조사 사태에 편의적으로 붙인 것처럼, 조사 결과를 편의적으로 해석한 결과에 불과하다. 본질은 사찰 그 자체에 있다.

법과 사찰의 결과가 어떤 식으로 활용됐는지는 앞으로 규명되어야 할 문제다. 사찰 결과가 법관 인사에 반영됐는지는 사법 체게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강제 조사를 통해서라도 밝혀져야 한다. 하지만, 다시 확인하지만 핵심은 사찰 그 자체에 있다.

'사찰'은 그 결과를 어디에 활용했는지 뿐만 아니라 '사찰' 그 자체가 미치는 영향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본 심리적 위축 효과다. 과거 독재 시절에 이뤄진 사찰의 목적은 그 결과를 다른 곳에 활용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내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시그널을 보내 상대방을 압박하고, 스스로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사찰이 자행되기도 했다. '사찰'이 그 결과를 어떻게 활용했느냐는 떠나, 그 자체만으로 '민주주의 적'으로 불리는 건 이 때문이다. '자발'이라는 가면을 씌워서 상대방을 심리적 노예 상태로 만들기 때문이다.

법관에 대한 법원행정처 전·현직 판사들의 사찰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보수적인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법원행정처 전·현직 판사들은 왜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란 평가를 받은 판사들을 주된 사찰 대상으로 삼았을까. 만약 사찰이라는 압박 시그널이 사찰 대상이 된 판사에게 전달돼 해당 판사의 판결에 표면적으로는 '자발적인' 영향을 줬다면 어떨까. '사찰'의 작동 기제를 감안할 때 사찰을 한 판사들 명단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더구나 판사들을 그룹별로 분류한 명단이 존재하는 걸 볼 때, '블랙리스트'는 존재했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 원세훈 재판 앞두고 청와대와 연락한 법원행정처

어제 조사 발표에서 법관들에 대한 뒷조사만큼, 아니 더 충격적인 건 재판을 사법행정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려 했던 정황들이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의 숙원 사업은 상고법원 설치였다. 대법관 1명당 한 달에 많게는 수천 건씩 재판해야 하는 업무 부담을 덜기 위해, 상고심을 맡을 상고법원을 설치하겠다는 것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상고심의 효율성과 내밀성을 강화하고, 대법원의 정책심을 강화하겠다는 취지였지만 실질적 목적은 대법원, 나아가 대법원장의 위상 강화였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어제 공개된 문건엔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 선고 관련 각계 동향'이라는 문건이 등장한다.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1심에선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국정원법 위반 뿐만 아니라 선거법 위반 혐의도 인정돼 징역 3년이 선고된 항소심 다음날인 2015년 2월 10일 작성된 문건이다.

해당 문건은 법원행정처가 박근혜 청와대와 항소심 판결을 앞두고 내밀하게 연락해 온 정황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3권 분립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판결을 앞두고 사법부과 행정부랑 소통하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지만, 더 충격적인 건 그 내용이다. 해당 문건에는 항소심을 앞두고 '행정처도 불안해하고 있다는 입장'을 청와대에 알렸다고 적혀 있다. 불안해하는 행정처의 입장이 박근혜 당시 대통령에게도 전달됐다 취지의 언급도 있다.

● 양승태 전 대법원장 숙원 사업 '상고법원 설치'에 재판을 이용하려 했나?

독립된 법관에 의한 양심적인 판단을 앞둔 상황에서 법원행정처, 나아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불안해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문건의 뒷부분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해당 문건은 후반에서 상고심 처리를 앞두고 있는 기간 동안 '상고법원과 관련한 중요한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추진을 모색하는 방안 검토가 가능하다고 언급되어 있다. 행정처가 항소심 판결 전에 불안해했던 건 정권의 정당성과 관련한 국정원 댓글 사건에서 선거법이 유죄로 선고될 경우, 상고법원 설치가 물 건너가는 것 아니냐 우려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문건에선 항소심 판결 이후 법원의 대응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상고심 판단이 남아 있고 BH(청와대)의 국정 장악력이 떨어지고 있는 국면이니 발상을 전환하면 이제 대법원이 이니셔티브(주도권)를 쥘 수도 있다'고 적혀 있다. 정권의 정당성과 직결된 사안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 대통령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만큼, 상고법원 설치를 위한 주도권을 대법원이 쥘 수 있으니 이를 활용하자는 취지로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대법원의 모든 길은 상고법원으로 향한다'는 말까지 나왔던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재판까지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활용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법원, 재판, 생중계
아직 해당 문건은 누가 작성했는지, 그리고 검토 방안이 실제로 이행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문건을 작성한 것으로 지목된 당시 법원행정처 심의관은 문건을 작성한 적도 없고, 본 적도 없으며, 해당 문건은 행정처가 사용하는 양식도 아니라고 법원 추가조사위에서 진술했다. 하지만, 해당 문건이 법원행정처 심의관의 컴퓨터 저장매체에서 나온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체가 누가 됐든 강제 조사가 이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앞으로 조사 결과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어제 공개된 사실만으로도 법원 스스로가 법관의 독립 나아가 재판의 독립을 무너뜨렸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게 됐다. 앞으로 법원은 재판이 독립된 법관의 양심에 따라 불편부당하게 진행되니 결과에 수긍하라고 어떻게 국민들을 납득 시킬 수 있을까.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