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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목숨을 걸고 진실이 담긴 쪽지를 전했던 교도관

"25년간 숨죽여 지냈어요."
저는 영화 1987에 출연했던 배우 유해진 씨의 실재인물입니다.
영화에서처럼 87년 당시 
저는 교도관이었어요.
시사회에 초대돼 영화 1987을 봤는데 아슬아슬했던 그 날이 떠올라 심장이 두근거렸어요.
'쪽지만 전달했을 뿐인데...'
제가 마치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낸 영웅처럼 나오더라고요.
사실 저는 1987년 그날 이후
지난 25년 동안 숨죽여 지냈습니다.

군부독재 정권 아래에서
국가공무원으로 일한다는 게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영등포 교도소에서 근무할 때 어린 학생들이 매일같이 잡혀 왔어요.
당시 교도소에는 시국 사범이 늘어
감방이 모자랄 정도였어요.

처음엔 대학생들을 독방에 배정했는데,
나중엔 일반 범죄자와 함께 
마구잡이로 가둬야 했습니다.
'독재정권 물러나라'
수감된 상태에서도 학생들은 소리 높여 구호를 외치고 단식까지 불사하더라고요. 독재정권에 대한 항거였죠.
당시 교도관들은 '정권의 시녀'라고 불렸습니다. 독재정권 아래서 학생들을 잡아 들이는 공무원에 대한 반감이 컸던 거죠.
‘독재 정권의 지시를 
따르는 게 과연 옳은 걸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제게 답을 준 사람이
바로 해직 기자였던 이부영 형님이었어요.

형님은 5ㆍ3 인천항쟁의 배후로 지목돼
영등포 교도소에 수감돼 있었어요.
매일 오후 5시에 몰래 형님을 찾아가 
1시간씩 군부독재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들었습니다.

정권에 대한 적대감이 점차 커졌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쇼크사’로 발표하는 걸 보고는
더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재소자들이 수시로 경찰과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당하는 걸 목격했으니까요.
그때부터 점퍼 소매 안쪽에
쪽지를 숨겨 전달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라도 툭 하고 떨어질까 봐
소매 끝을 꽉 움켜쥐었죠.
영화에서처럼
검문을 당한 적은 없었어요.

수색하려는 기미만 보여도
바로 공무원증을 꺼내 들었거든요.
저는 2004년에 정년퇴직했고요.

지금은 경기도의 한 대학교에서
조경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촛불집회에도 매주 나갔고요.
지금 돌아보면 1987년은 
공직자가 정권이 아닌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해준 한 해였습니다.
제 일생을 통틀어
그날의 행동이
가장 잘한 일인 것 같습니다.
30년 넘게 지났지만
저는 아직도 6월 민주 항쟁이
진행 중이라고 생각해요.

국정 농단 사건처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죠.
제가 1987년에 깨달았던
너무나 당연한 원칙을 기억한다면
세상은 분명 좀 더 나아질 거라 믿어요.

이 카드뉴스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교도관이었던 한재동 씨와의 인터뷰를  1인칭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1987년 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한재동 교도관은 영화 <1987>에서 유해진 역의 실존 인물입니다. 그는 당시 해직 기자였던 이부영 씨의 쪽지를 교도소 밖으로 전달해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한재동 교도관은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기획 채희선, 이승환 인턴 / 그래픽 김태화, 김민정

(SBS 스브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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