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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된 위험'…오늘도 생각해 볼 '사랑의 이름'

전 남자친구가 보낸 편지
서울의 작은 카페 한편,
책상 위에
예쁜 편지봉투들이 가득합니다.
몰래 열어보고 싶게 만드는
문장도 쓰여 있습니다.
커플들의 연애편지를
모아놓은 듯한데,
‘이별을 통보한 여자친구에게
염산을 뿌려 살해한 50대 남성’

‘헤어지자는 여성을 차에 태운 뒤
바다로 뛰어들어 중태에 빠트린 남성’

봉투를 열어보니
예상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쓰여 있습니다.
데이트 폭력 사건들이 가득 적힌
예쁜 편지 봉투들.
<사랑의 이름><button class= 이미지 확대하기
이라는 이 전시물은 윤모 씨가 기획했습니다." data-captionyn="N" id="i201131903"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80102/201131903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
윤 씨가 처음 기획했던 작품은
이게 아니었습니다.
전시를 한 달 앞둔 시점,
하나뿐인 여동생을 잃으면서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23살에 처음으로
대학생이 된 동생이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해서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녔다.”
- 윤 씨가 쓴 글 중

윤 씨의 여동생은
4수를 한 늦깎이 신입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환 학생으로 뽑혀
지난해 12월 출국이 예정돼 있을 정도로
성실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출국을 한 달 앞둔
지난해 11월 19일,
돌연 실종됐고
다음 날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습니다.
“남자가 단 한 번만 만나달라고 하는 것에
동생은 ‘엄마, 너무 불쌍해요’하고
제가 죽을 지도 모르고
웃는 얼굴로 따라 나갔다.”
-윤 씨(가명)의 글 중

윤 씨의 여동생을 죽인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전 남자친구였습니다.
전 남자친구는 헤어진 이후에도
여동생에게 끊임없이 연락했습니다.

자신이 ‘병에 걸렸다’라며
여동생에게 매달렸습니다.
여동생은 괴로워하면서도
그 모든 게
스토킹에 해당된다는 걸 몰랐습니다.

“계속 연락이 와서
동생이 마음 고생이 심했어요.
그런데도 그게 다 폭력인 걸,
위험한 상황인 걸 몰랐어요.”
-윤 씨
갑자기 떠난 여동생 때문에
힘들어하던 윤 씨는 사건 현장에서

전 남자친구가 헤어진 이후
여동생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보게 됐습니다.
“네가 하는 일이 잘 됐으면 좋겠어,
하는 다정한 내용들이었어요.”
-윤 씨

편지만 보면 그는
전 여자친구를 스토킹 하거나
죽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할
다정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 위험을 감지하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비극의 소리들을 듣지 못했다.”
-윤 씨의 글 중

윤 씨는 사랑으로 포장된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습니다.
전 남자친구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그도 여동생을 죽인 뒤
뒤따라 목숨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동생이 죽은 이유를
몇 번이나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동생이 죽은 이유는
남성의 ‘사랑’을 거절한 여성,
남성에게 인도적인 태도를 보인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윤 씨가 쓴 글 중
윤 씨는 데이트 폭력으로 인한
강력 범죄 기사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기사는 다 읽기도 힘들만큼
많았습니다.

여자친구, 애인 등이
피해자로 나오는 기사가
2016년에 보도된 것만 200건에 달했습니다.
“여성들은 1.7일에 한 번씩
배우자나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하거나 살해 위협을 받는다.
내 동생이 죽은 것은
참 흔한 일이었다.”
-윤 씨의 글 중

윤 씨 여동생의 죽음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윤 씨는 몇 달 전부터 준비해온
전시 기획을 그 때 바꾸었습니다.

기사들을 편지지에 적고
예쁜 봉투에 담으며
전시를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사랑의 이름><button class= 이미지 확대하기
이라는 작품은 작년 12월, 서울의 한 카페에서 3일간 전시되었습니다." data-captionyn="N" id="i201131919"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80102/201131919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
데이트 폭력으로
목숨의 위협을 받는 것도 모자라
죽기까지 하는 누군가의 일이
셀 수 없이 많은 게

윤 씨는 너무 안타깝습니다.
“나는 오늘도
사라진 여성들의 기사를 읽고,
남은 딸의 생존을 확인하는
아버지의 전화와

예쁜 봉투에 들어있던
편지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사랑의 이름에 관해 생각한다.”
-윤 씨의 글 중

언니는 오늘도
동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커플들이 주고받았을 법한 예쁜 봉투의 편지들이 가득한 책상. 그중 한 봉투를 열자 사랑의 대화가 아닌 데이트 폭력으로 사망하거나 중태에 빠진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이 전시물을 기획한 윤 씨는 한 달 전 데이트 폭력으로 하나뿐인 여동생을 잃었습니다.

기획 하현종, 채희선, 김경희 / 그래픽 김민정
(SBS 스브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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