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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①

[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①
누구에게나 꿈은 있다. 어떤 이는 왕도를 세우기 위한 꿈을 꾸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일상의 편안한 삶이나마 계속 유지되기를 꿈꾼다. 이마저도 쉽지가 않더라는 푸념까지 섞어서 말이다. 그렇게 꿈은 자신의 처지를 바탕으로, 그 바탕 위에서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또 무엇인가가 되고자 하는 이들의 소망이자 바람이다.
 
나에게는 어떤 꿈이 있었던가... 아니 어쩌면 얼마나 많은 모래성을 쌓고 또 무너뜨렸던가를 따져보는 게 차라리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작은 너울에도 힘없이 무너져 내리던 숱한 모래성들... 차라리 집채만한 파도에 휩쓸려 스러졌더라면 불가항력이었다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으련만, 백사장을 오락가락하는 작은 파도에도 스르르 녹듯 사라지고 말았던 허접한 모래성이었으니 말해 무엇 하랴. 이제는 꿈조차도 사치인 양, 무엇하나 꿈꿀 수 없음이 눈물겹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정조 어진
250여 년 전 한 남자도 꿈을 꾸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이산(李?), 조선의 22대 왕인 정조다. 그의 꿈은 유교적 이상 사회의 실현과 왕도 건설이었다.
 
그는 임금을 선택하고, 선택된 왕과 권력을 나누었던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이자, 신하의 나라에서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른다. 왕에게는 부국안민(富國安民)이라는 통치자로서의 기본적인 소명 외에도 비명에 간 아비의 억울함을 풀고, 그에게 덧씌워진 죄인이라는 오명까지도 씻어내야 하는 소임까지 떠안고 있었다. 그의 아비가 바로 사도세자다.
멀리 화서문과 공심돈이 보인다.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와 노론세력뿐만 아니라 그 자신마저도 사도세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느꼈던 정조. 자신이 존재했기 때문에 영조는 후계 걱정 없이 사도세자를 죽일 수 있었다는 전제가 정조가 느끼는 죄책감의 근원이었다. 그렇게 아비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뿐만 아니라 아비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져 만들어진 도시가 바로 수원 화성(水原 華城)이다. 수원화성은 정조 효심의 결정체였던 것이다.
 
정조는 즉위 후 13년 만에 경기도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지금의 수원 화성으로 이장한다. 현재의 융릉(隆陵)이다. 이 와중에 기존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이주시켜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으니, 그들을 위해 개발한 신도시가 바로 지금의 팔달산 아래에 자리 잡은 수원 화성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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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data-captionyn="N" id="i201130876"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71229/201130876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수원화성은 1794년에 착공해 1796년에 완공한 둘레가 5.5km에 이르는 성곽도시다. 기존의 성곽들이 화강암을 이용해 쌓았던 반면, 수원화성은 돌과 벽돌을 이용해 성을 쌓았으며, 성곽에 필요한 옹성, 성문, 암문, 봉수대 등을 모두 갖추어 한국 성곽 건축 기술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이유로 유네스코는 1997년 수원화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에 이른다.
성신사의 모습
# <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겨울 햇살이 좋은 날 <수원화성 성곽길>을 걸었다.
 
길은 주차장을 출발해 팔달산을 오른다. 일차 목적지는 서장대다. 가는 길에는 화성(華城)을 지켜주는 신(紳)을 모신 사당인 성신사(城神祠)가 보인다. 성신사는 성(城)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사당으로, 화성성곽의 축성이 완료되는 시점에 정조가 직접 ‘우리 고장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맑게 하라’는 축문을 내리고, 설치를 지시하여 지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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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data-captionyn="N" id="i201130878"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71229/201130878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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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data-captionyn="N" id="i201130879"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71229/201130879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겨울이 성큼 들어선 야트막한 팔달산을 오르면 그래도 아직은 드문드문 가을 흔적들이 남아있어 가버린 계절을 추억한다.
서장대는 수원화성의 군사지휘본부다.
어느새 길은 서장대(西將臺)로 향한다.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 서장대는 화성의 군사지휘본부로서 '화성장대(華城將臺)'라고도 불린다. 서장대에 서면 산 아래로 수원 시내가 가없이 펼쳐진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서장대는 화성 일대는 물론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100리 안쪽의 모든 동정을 파악할 수 있었던 지휘부이자 군사 요충지였다.
서장대에서 바라본 수원 시내 전경
# 화성장대(華城將臺) 편액의 글씨와 서체반정
 
서장대의 연병장을 서성대다 올려다 본 편액의 글씨가 눈에 띈다. ‘華城將臺’라고 쓴 편액의 글씨가 꽤나 남성적이고 씩씩하다.
 
이 화성장대라는 편액의 글씨는 정조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조가 글씨에도 일가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실제 정조는 자신만의 서예철학이 뚜렷하여 서체반정(書體反正)을 일으켜 글씨체의 정돈을 주장하였던 왕이기도 하다. ‘華城將臺’라는 네 글자 속에서도 그의 서예 철학이 녹아 있는 것이다.
서장대의 화성장대(華城將臺) 편액
조선 초기의 글씨들이 반듯하면서도 품위 있고 강건하였던데 반해,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글씨체가 부드럽고 미려한 여성적인 서체로 변하자, 정조는 글씨란 무릇 굵직굵직하고 꾸밈이 없으면서도 소박하게 써야 한다는 그의 평소 지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서체반정(書體反正)의 시작이다. 이후 적지 않은 논쟁을 거치며 소박하면서도 굵직한 남성적인 서체가 조선 후기의 대세 필체가 된다. 화성장대라는 네 글자의 글씨체가 그러한 특성을 지니고 있음이 역력하다. 한편 서체반정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서체 중 대표적인 것이 김정희의 추사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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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data-captionyn="N" id="i201130883"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71229/201130883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 #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 정조의 험난한 왕위계승
 
정조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왕이었다. 특히 학문적 성취가 그러했는데, 정조는 스스로 대유(大儒, 최고의 유학자)라 여겨 신하들의 학문적 성취를 깔보았으며, 경연장에서도 신하들에게 ‘너네 이거 알아?’내지 ‘공부 좀 하쇼’ 같은 직접적인 힐난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대부분의 유교 경전을 완벽하게 암기한 조선의 왕 중 유일무이한 존재였으니 백전노장의 신하들조차 눈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서른 전후의 왕에게 공부 좀 하라고 꾸중 듣는 늙은 신하들이 당혹스러우면서도 우스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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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data-captionyn="N" id="i201130884"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71229/201130884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정조는 실제 웬만한 경전의 경우 어느 책 몇 페이지에 무슨 구절이 있는지를 다 꿰고 있었다고 한다. 신하들은 딴에는 책을 찾아 팩트 체크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헐~ 그때마다 무릎을 치며 놀랄 뿐... 그의 비상한 머리를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정조의 천재성은 이미 세손 시절부터 도드라졌다고 한다. 게다가 아비인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스스로의 목숨을 보존하는 방법을 체득한 그는 할아버지인 영조의 마음에 들기 위해 공부를 게을리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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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data-captionyn="N" id="i201130885"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71229/201130885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그러하였음에도 세손 이산이 왕이 되는 길은 험난하였다. 사도세자를 죽인 집권당파인 노론은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이 왕이 되면 아비의 복수를 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지라 세손이 왕이 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은 사도세자를 죄인으로 몰고, 그 연장선상에서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논리로 세손 불가론을 주장하였다. 이에 영조는 세손을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가 아니라 어릴 적에 죽은 사도세자의 형인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켜 ‘죄인의 아들’이 아니라는 호적 세탁까지 하여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영조 어진
# 세손 이산과 노론의 쟁투
 
팔순 노인이었던 영조는 세손이 무사히 자신 이후의 보위에 오를 수 있도록 길을 다지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영조의 나이 여든 둘, 당장 오늘 내일을 장담할 수 없었던 영조는 세손 대리청정을 추진한다. 그러나 노론 입장에서는 이는 안 될 말이었다. 대리청정을 한다 함은 왕 유고시 세손이 자동적으로 즉위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반대의 선봉장은 좌의정 홍인한이었다. 그는 정조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의 동생이니 조카 손자의 앞길을 막고 나선 것이다. 홍인한은 ‘동궁은 노론이니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누가 할 수 있는지 알 필요가 없으며, 국사나 조사는 더욱 알 필요가 없다.’며 세손의 대리청정을 적극 반대한다. 홍인한은 자신의 조카인 혜경궁 홍씨가 세손의 대리청정을 방해 말라는 서찰을 보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세손의 대리청정을 극렬 반대하였다. 홍인한은 영조에게 ‘도끼에 베어 죽어도’ 세손의 대리청정을 수용할 수 없다고 맞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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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data-captionyn="N" id="i201130891"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71229/201130891_1280.jpg" style="display:block; font-family:돋움,dotum,arial,tahoma,applegothic,sans-serif; margin:20px auto">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왕의 위상이란 것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도 50여 년을 통치한 왕이었음에도 세손의 대리청정이라는 왕통 계승 작업 하나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과 권위가 왕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세손의 대리청정 문제는 세손이나 홍인한을 위시한 노론 세력이나 모두 물러설 수 없는 건곤일척(乾坤一擲), 운명을 건 마지막 승부였다. 세손이나 노론이나 밀리면 죽음이었다.
 
두 세력의 쟁투는 결국 세손만큼은 지켜내야 했던 영조와 혜경궁 홍씨의 승리로 끝이 났다. 대리청정을 강행한 것이다. 영조 51년 12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영조가 승하한다. 여든 셋의 나이, 즉위 52년만이었다. 드디어 정조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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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data-captionyn="N" id="i201130892"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71229/201130892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 # 정조, 왕위에 오르다
 
정조는 즉위 후 스스로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한다. 즉위 후 열흘 만에 죽은 사도세자의 호를 '장헌'으로 높여 부르고, 사도세자의 묘소를 '영우원'으로 승격시켰다. 그렇게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지만, 사도세자를 ‘죄인’이 아닌 국왕의 아버지로 복권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런 정조의 뜻은 노론 세력에게는 잠재적 위협이 실제적 위협으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정조에 대한 반역 또는 암살 시도로 이어졌다. 실제 정조 즉위 초는 영화 <영원한 제국>이나 <역린> 등에서 그려지듯 수많은 암살 시도를 포함한 반란과 반역의 세월이었다. 이런 이유로 정조는 즉위 초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홍인한, 정후겸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노론 세력을 축출하지도, 사도세자를 복권시키고자 하는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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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data-captionyn="N" id="i201130893"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71229/201130893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한편으론 정조에게 사도세자는 딜레마의 상징이기도 했던 것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억울하다 하면 영조를 부정하는 것이 되고, 영조의 처분이 올바르다 하면 사도세자의 죽음이 정당화되는 모순이 그것이다. 그런 이유로 정조는 사도세자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쉽게 내보일 수도 없었고, 그런 이유로 노론을 거세게 내칠 수도 없었다.
 
왕이 된 지 13년이 지나서야 그는 비로소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성으로 이장하고 마음 속 깊이 남아있던 여한을 풀 수 있었다. 이곳 수원화성이 정조의 극진한 효심의 결과물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노대 모습
서장대를 지나자 서노대(西弩臺)가 보인다. 서노대는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2층 높이의 망루 비슷하게 지어진 팔각형 모양의 건물이다. 기단을 포함한 건물 대부분을 짓는 데는 구운 벽돌을 사용하였다.
 
성벽을 따라 이어진 길 위로는 낙엽들이 길을 따라 흩어져 있고, 겨울의 날씨임에도 햇살이 따뜻한지라 오가는 이들이 분주하다. 그리고 나처럼 카메라를 메고 부지런히 뭔가를 담는 이들이 여럿 보인다. 사진 동호회의 멤버들인지 두셋씩 짝지어 다니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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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data-captionyn="N" id="i201130895"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71229/201130895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 # 수원화성의 복원
 
가없이 이어진 성벽들이 새삼 이곳이 성곽이었음을 알려준다. 그 옛날의 성벽들은 긴 세월의 세파를 이기지 못한 채로 무너져 버리고, 지금의 성벽은 복권 후의 것인지라 긴 세월의 흔적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성곽은 일반적으로 관청을 포함한 시가지 전체가 긴 성벽으로 둘러싸인 모습을 하고 있다. 성곽은 우선 크게 주위를 둘러싸는 탄탄한 성벽과 외부와의 통로가 되는 주요 관문인 성문, 그리고 성벽에 부가하는 여러 가지 방어시설로 나눌 수 있으며, 전란을 겪으면서 병기의 발달과 함께 성곽의 재료와 축성술, 방어력과 공격력 등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렇게 발전된 우리나라 성곽의 총아가 수원화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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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data-captionyn="N" id="i201130896"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71229/201130896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그러나 수원화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수난 시대를 맞이한다. 일제강점기 동안 화성성곽과 행궁은 철저하게 훼손되고 파괴되었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시가지와 화성성곽 일대가 격전지가 되면서, 장안문(長安門)의 경우 폭격을 맞아 문루 절반이 파괴되어 떨어져 나가는 등 성곽 곳곳은 그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부서지고, 또 무너져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의 장안문. 자료사진
그렇게 파괴된 채로 방치되었던 화성성곽과 행궁은 1970년대에 이르러 국방문화유산 정비 계획에 따른 예산 지원에 의해 5년에 걸쳐 집중적으로 복원되기에 이른다. 군사문화재라는 이유로 군사정권의 호의를 입게 된 것이다. 그러한 노력 속에서 수원화성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재건되었다. 과거의 건축물을 현대에 이르러 원형을 유지하며 거의 완벽하게 복원한 드문 사례가 된 것이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수원화성을 축조하던 2년 8개월간의 공사 기간 중 있었던 축성(築城)의 모든 과정, 성의 설계, 건축물의 모양, 사용된 기기(器機), 소요된 비용 등을 도설(圖說, 그림)을 포함한 모든 내용들을 상세하게 기록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있었기 때문이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의 모습
그리고 수원화성이 복원된 유산임에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화성성역의궤라는 자료를 바탕으로 수백여년전의 성을 100% 그대로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는 사실을 유네스코가 인정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 오사카성의 경우, 일본의 대표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복원할 당시 그 당시의 자료가 없어 몇몇 글이나 그림을 토대로 철근과 콘크리트 위에 모양만 재현했다고 하니 그만큼 화성성역의궤의 가치는 실로 엄청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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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data-captionyn="N" id="i201130899"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71229/201130899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 # 서북각루(西北角樓)와 갈대
 

성벽을 따라 돌계단이 가지런하다. 오랜 세월을 성벽과 동고동락했던 소나무들이 떠난 자리에는 복원 공사 뒤에 심어졌을 것 같은 젊은 소나무들이 성벽을 에둘러 굽어보고 있다.
 
멀지 않은 곳에 서북각루(西北角樓)가 보인다. 각루는 성곽 부분 가운데 높은 지대에 누각 모양의 건물을 세워, 주변을 관찰하는 망루의 기능뿐만 아니라 휴식 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하는 정자와 비슷한 건축물을 말한다. 화성에는 동북각루, 서북각루, 동남각루와 서남각루 등 4개의 각루가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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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data-captionyn="N" id="i201130900"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71229/201130900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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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data-captionyn="N" id="i201130901"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71229/201130901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서북각루 아래의 성벽을 따라 갈대가 아찔하다.
 
여기서도 사진을 찍는 이들이 여럿이다. 저마다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한 셔터 소리가 요란하다. 갈대를 품은 성벽이 있고, 물결이 너울대는 듯 춤추는 한옥 건물과의 조화는 대충 눌러도 그야말로 작품이다. 아쉬운 점은 조금 더 나은 사진을 위해 갈대숲으로 들어가는 몇몇의 과잉이 조금은 눈에 거슬린다는 점이다. 갈대밭 이곳저곳이 벌써 무례한 발길에 짓밟혀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해서 얼마나 더 나은 사진을 얻었는지는 몰라도, 갈대는 사진을 위한 피조물이기 이전에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을 위한 공공재가 아니던가. 아쉬운 일이다.
 
갈대 행렬의 너머로 화서문(華西門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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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data-captionyn="N" id="i201130905"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71229/201130905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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