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모범사례에서 타산지석이 된 네덜란드

네덜란드는 국토의 1/4이 해수면보다 낮다. 갯벌에 제방을 쌓고 물을 막아 확보한 간척지가 국토의 40%에 달한다.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도 ‘암스텔’강 하류에 ‘댐’을 지어 건설한 도시다. 이런 간척지를 폴더(polder)라고 한다. 네덜란드인들은 척박한 간척지를 일궈 튤립을 심었고 풍차를 돌려 물을 빼냈다. 폴더엔 네덜란드인들의 억척스러움과 진한 공동체 의식이 거름처럼 스며 있다. 폴더에 바닷물이 침범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럴 때마다 힘을 합쳐 둑을 막고 물을 퍼내 위기를 극복하면서 공존과 협동, 상생의 댐을 쌓아 올렸다.

1980년대 초 네덜란드는 극심한 경기침체로 실업률이 치솟고 복지지출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경제난의 파도에 노동자들은 익사 직전이었고 늘어난 실업급여 때문에 복지의 댐엔 구멍이 숭숭 뚫렸다. 1982년 11월 노사가 머리를 맞댔다. 빔 콕 노총위원장과 크리스 반 빈 경영자연합회 회장이 휴양도시 바세나르(Wssenaar)에 있는 빈의 별장에서 협상을 벌였다. 마침내 노사는 대타협안을 발표했다. 노조측은 임금을 동결하기로 했고 사용자측은 노동시간을 단축해 일자리를 늘리겠다고 화답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바세나르 협약(Wassenaar Agreement)’이다. 정부는 세제와 재정을 통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크리스 반 빈 경영자연합회 회장(왼쪽)과 빔 콕 노총위원장(오른쪽)
대타협의 효과는 기대 밖이었다. 1983년 9.5%에 이르던 실업률이 2001년에는 1/3 수준인 3.1%까지 떨어졌다. 83년 50.6%에 불과하던 고용률은 2001년 72.1%로 뛰었다. 치유가 어렵다던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를 두고 세계인들은 ‘네덜란드의 기적’이라고 칭송했다. 네덜란드의 성공 스토리는 흔히 ‘폴더모델(polder model)’이라고 불린다. 간척지를 일구고 물길을 관리한 상생과 협동정신이 바탕이 된 노사화합의 모범사례라는 뜻이다.

폴더모델이 더욱 값진 것은 위기 속에도 함부로 희생양을 만들지 않았다는 데 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대개 ‘자유로운 해고’를 뜻하지만 네덜란드는 예외다. 경기 변동에 따라 노동자의 숫자를 줄였다 늘렸다 하는 식의 유연성을 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노동시간을 잘게 썰어 파트타임(시간제) 일자리를 늘리는 방식으로 유연성을 확보했다. 네덜란드의 파트타임 노동자는 다른 나라와는 달랐다. 정규직이다. 신분과 대우 면에서 전일제 노동자와 아무런 차별도 받지 않는다. 새로운 일자리를 파트타임 노동자들이 빠르게 채웠다. 파트타임 노동자의 비율은 전체 노동자의 38%나 된다. 그래서 네덜란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flexibility)과 안정성(security)을 동시에 실현한 유연안정성(flexicurity)의 대표적인 나라로 꼽힌다.
 

SBS가 매년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추구해야 할 핵심가치를 선정해 전문가와 함께 연구. 취재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미래한국리포트’ 2017년 편(‘함께 쓰는 대한민국 성장방정식-양극화 해소와 착한 성장사회’)에서도 폴더모델을 소개했다. 네덜란드 현지 취재를 통해 ‘유연안정성’을 이룬 배경과 그간의 과정을 짚었다. 하지만 시간상의 제약 때문에 미처 담지 못한 부분이 있다. 성공 그 이후의 이야기다. 견고하게만 보이던 폴더모델에 이상징후가 나타났다는 내용이다. 그 양태와 진행방향이 그냥 지나치기엔 우리나라와 너무도 흡사하다.

네덜란드에서 만난 노동시장 전문가들은 “2000년대 후반에 노동시장이 왜곡되기 시작했다.”고 입을 모은다. 기업들이 우리나라의 비정규직과 같은 임시직(Temporary)노동자, 파견직 노동자 채용을 슬며시 늘려나갔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프리랜서 노동자와 인터넷 상에서 콘텐츠를 만들어 공급하는 플랫폼 기반 노동자가 급증하고 있다. 고용보장도 안되고 임금도 낮은 질 나쁜 일자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마틴 쾨너 암스테르담 교수는 “질 낮은 일자리 종사자들이 전체 노동시장의 1/3을 차지할 정도로 빠르게 늘고 있다.”고 말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해 낸 우리나라와 닮은꼴이다.
마틴 쾨너 암스테르담 교수
마틴 쾨너 교수는 “1982년 바세나르 협약이 이뤄진 건 노사가 대등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 이후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등으로 파편화하면서 조직력을 잃어가자 사용자측이 입맛대로 시장을 재편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일자리의 질이 떨어지니 임금수준도 가파르게 하락했다. 그는 “노조의 견제와 감시가 약화하면서 폴더모델에 심각한 균열이 생겼고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이른바 유연안정성(flexicurity)도 깨졌다.”고 진단한다.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자 노사는 지난 2013년 협상을 벌였고 양질의 일자리를 늘린다는 내용의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4년이 지나도록 질 나쁜 일자리가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네덜란드의 노사정위원회인 사회경제위원회(SER)의 정부측 위원인 에버트 베어헐프 암스테르담 교수도 “질 낮은 일자리 종사자들을 방치하면 시장이 혼란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대타협의 경험조차 없는 우리나라는 훨씬 심각하다.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1/3을 차지한다.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을 조금 넘는다. 중소기업 비정규직의 보수는 대기업 정규직의 30%에 불과하다. 스마트폰 앱을 통해 배달이나 대리운전을 하는 플랫폼 기반 노동자, 도급계약으로 일하는 게임개발자나 학습지 교사 등 특수고용직 노동자가 청년층을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우리나라의 노조조직률은 10%로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평균치(28%)의 1/3 수준으로 최하위권이다. 전체 노동자의 88%가 일하는 중소기업은 대부분 노조가 없다. 사용자측의 상대적인 힘의 우위는 압도적이다.

‘2017 SBS 미래한국리포트’ 취재진과 대담했던 폴 피어슨 UC버클리 교수는 양극화와 불평등에 대해 “자연스러운 것도, 불가피한 것도 아니다. 힘의 문제다. 정치적으로 어떻게 힘을 조직화 해서 불평등에 맞설 것이냐가 관건이다.”라고 조언한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는 일자리창출이다. 그냥 일자리가 아니라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려면 노.사.정 협상의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한다. 어쭙잖게 중립지대에 서서 ‘상생’이나 ‘윈윈(win-win)’만 외쳐서는 곤란하다. 설사 대화에 들어간다 해도 기울어진 협상테이블에서 나온 타협안은 불만과 저항을 부를 게 뻔하다. 성공적인 협상을 위해서도 힘의 균형을 잡아 주는 게 우선이다. 문재인 정부가 정치력을 발휘해 풀어야 한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