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가해자 없는 아파트 단지 내 교통사고

[취재파일] 가해자 없는 아파트 단지 내 교통사고
지난 7일 보도( [SBS 보도 기사] ▶ 차 돌진해 아이 치었는데…'아파트 단지'라 처벌 불가? (12.07))가 나간 이후 많은 분들이 댓글로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댓글은 물론 제 개인 이메일로도 여러 가지 궁금증을 제시한 분들이 많아 취재파일로 사건을 좀 더 자세히 전달하려 합니다.

●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

지난 8월 7일 오후 4시 35분. 서울 강서구 마곡동의 한 아파트 단지 안 인도로 차 한 대가 돌진했습니다. 이 차는 킥보드를 타고 있던 6살 원 모 양을 치고 경비실을 들이받고서야 멈춰 섰습니다. 이 사고로 원 양은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맨 끝에 다행히 생명엔 지장이 없는 상태입니다.

회사에서 딸의 사고 소식을 접하고 택시 기사에게 현금 20만 원을 쥐어주며 버스전용차로로 빨리 가달라고 부탁했다는 원재성 씨. 딸의 병간호에만 집중해왔다는 원 씨는 기자를 만난 직후 사과 한마디 없는 가해차 운전자에 대해 서운함을 털어놨습니다. 가해차 운전자 72살 연 모 씨가 급발진을 주장하며 자신도 피해자라고 주장했다는 겁니다.
아파트 단지 내 어린이 사고 추돌 교통법 특례 개정 인도 도로
하지만 국과수 감정 결과 해당 차량의 급발진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판단됐습니다. 경찰이 본 사고 원인은 운전자의 ‘운전미숙’ 입니다. 충돌 전 차 안에선 라디오 소리만 들렸고, 운전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는 점. 또 급가속 시 들릴 수 있는 고 RPM의 엔진 소리가 없었다는 점 등이 이유입니다. 그런데도 경찰은 불기소 의견으로 해당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고, 검찰 역시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 결정을 내렸습니다. 원 양의 부모 입장에선 법원에서 가해차 운전자의 과실이 처벌을 받을 정도인지 따져볼 기회조차 없어진 셈입니다.

원 씨의 딸은 사고 직후 '외상성 경막하 출혈' 등의 상해를. 퇴원 이후엔 '미만성 뇌신경축삭 손상' 진단을 받았습니다. 뇌 손상의 일종으로 앞으로 최소 3년 동안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 현재 대소변을 잘 가리지 못하는 상태로, 추후 학습장애 등이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또 차에 대한 트라우마는 이 아이가 평생 짊어져야 할 짐이 될지도 모릅니다.

● 왜 처벌 안 되나?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사고 후 조치를 하지 않고 도주하거나, 음주측정 요구에 응하지 않는 경우 등이 아니라면 가해차 운전자에 대해 '업무상과실치사상죄' 또는 '중과실치상죄'를 적용할 수 없습니다. 같은 법 4조 1항에 따라 '교통사고를 일으킨 차가 보험 또는 공제에 가입된 경우'에도 공소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통사고 가해자가 다 처벌받지 않는 것이냐? 그건 아닙니다. 다들 알고 계시는 '12대 중과실' (기존 11대 중과실에서 이달부터 '화물고정조치 위반'이 추가됐습니다.)을 어겼을 경우엔 처벌이 가능합니다. 교통사고처리 특례법 3조 2항에 나와 있는 '12대 중과실'엔 신호 위반, 중앙선 침범, 제한속도 초과, 횡단보도 보호의무 위반, 보도침범 등이 있습니다. 원 양 사고 경우엔 CCTV 등을 확인해보면 '보도침범'과 '중앙선 침범'이 적용돼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경찰과 검찰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아파트 단지 내 어린이 사고 추돌 교통법 특례 개정 인도 도로
● 보도침범과 중앙선 침범 아닌 이유

사진을 보시면 충격 지점은 누가 봐도 '보도 위'입니다. 다만 도로교통법상 '보도'가 아닙니다. 사고 지점은 1.5미터 차이로 아파트 단지 안으로 분류돼 있습니다. 법적으론 엄연히 다른 공간입니다.

검찰은 불기소이유서에서 "피의 차량이 인도연석을 넘어 피해자를 충격한 것은 맞으나, 부딪힌 지점은 아파트 평면도와 단지 배치도로 볼 때 사고 지점이 건축한계선과 대지경계선 안쪽에서 발생하였고...사고 발생 지점을 도로교통법에서 규정한 '보도'로 보기 어려워 교통사고처리특례법 '보도침범' 사고로 의율할 수 없다고 판단되었다."고 적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고 현장 사진을 보면 가해차는 중앙선을 침범한 뒤 인도 연석을 넘어 보도를 침범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검찰은 "피의차량이 인도 연석을 부딪히고 차량의 진행 방향이 변경되고, 2차, 3차 충격을 받으며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되는 등 차량을 평소와 같이 통제를 할 수 없었던 상황으로 피의자가 중앙선을 침범하여 진행한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없고...직접적인 원인행위가 아닌 것으로...'중앙선침범' 사고로는 의율할 수 없다고 판단되었다."고 적었습니다.

중앙선 침범은 그럴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없었다는 이유로, 보도 침범은 타격 지점이 보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기소하지 않은 겁니다.

이같은 경찰과 검찰의 판단에 대해 변호인은 "지나치게 형식적인 판단"이라고 말했습니다. 보도침범 때문에 더 안전해야 할 아파트 단지 안에서 발생한 사고임으로 '보도 침범'으로 판단해야 하고, 회전교차로를 돌다 연석을 충돌한 뒤 급가속해 중앙선을 침범했으므로 운전자의 과실에 의한 '중앙선 침범'으로 봐야한다는 겁니다.
아파트 단지 내 어린이 사고 추돌 교통법 특례 개정 인도 도로
● 우리 아파트는 어떨까?

이번 사고는 어쩌면 법적인 '보도'와 아파트 단지 내 '보도'가 붙어있는 다소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안 도로에서 사고가 나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대법원은 2013년, 아파트 단지 내에서 어디까지를 도로로 볼 수 있는지 기준을 설명했습니다.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느냐가 도로의 기준일 수 있다"며 차단기가 설치돼 주민들만 통행하거나 방문객이 주민의 허락을 받는 곳이면 도로가 아니고, 설령 차단기가 있더라도 외부차량이 자유롭게 들어오는 곳은 도로가 된다는 겁니다. 같은 이유로 군부대나 대형 공장 내에서 진입 차량을 통제하는 곳에 있는 길은 도로가 아니고 식당 주차장이나 대형 관공서의 주차장은 누구나 이용 가능하기 때문에 도로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차단기가 설치돼 있는 등 통행에 제한이 있는 아파트 단지 내 도로의 경우 도로교통법 상 도로로 인정받지 않는 겁니다.

자동차와 사람이 공존하는 공간인 아파트단지 도로 사고는 피해자들이 고령자나 어린이들이 많아서 단순한 접촉 사고도 인명 피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사유지인 아파트 단지 도로는 도로교통법 상 도로가 아닌 탓에 경찰은 별도 통계조차 집계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법적인 도로가 아니므로 속도 제한, 보호구역 지정, 안전 시설물 설치 등이 의무가 아닙니다.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아파트 단지 내가 오히려 교통사고의 법적 사각지대인 셈입니다.
아파트 단지 내 어린이 사고 추돌 교통법 특례 개정 인도 도로
● 미국은 주거시설에도 도로교통법 적용

독일은 아파트 단지 등 주거지역을 보호구역으로 지정해 속도를 제한합니다. 이른바 '30 zone'을 설정하는 겁니다. 주거지 이면 도로로 들어오면 30km 이하로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또 과속방지턱을 설치하고 들어가는 길을 좁게 만들어 한 차밖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등 감속시설과 같은 각종 안전시설을 설치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주거시설 내 도로도 똑같이 도로교통법의 적용을 받아 관리됩니다.

한국교통연구원 임재경 연구위원은 "우리도 아파트단지 도로 운행 속도를 시속 10∼15㎞ 수준으로 제한하고, 어린이 보호구역 같은 안전 구역으로 지정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 한 사람의 실수로 바뀐 한 가족의 삶

원 양의 아버지는 사고가 난 이후 지난 4개월이 4년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더 안전하다고 믿었던 아파트 안에서 난 사고인데도 법적인 문제로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는 현실에 분노했습니다. 원 씨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을 개정해달라며 청와대에 청원 글을 올린 상태입니다.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061?navigation=petitions)

아무쪼록 원 양이 별다른 후유증에 시달리지 않길 바랍니다. 사고 이전처럼 밝은 모습을 되찾아 부모님의 품에서 건강하게 자라나길 기원합니다.  
 
* SBS뉴스 'VOICE'로도 들어보세요!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