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E 제보하기

[취재파일] 청동인장에 새겨진 키워드 '범웅관아'

김명진 기자 kmj@sbs.co.kr

작성 2017.12.08 08:01 수정 2017.12.08 09:30 조회 재생수24,645
프린트기사본문프린트하기 글자 크기
▲ 흥전리 사지(절터) 청동 인장 출토 동영상

막바지 더위가 극성을 부리던 8월 말이었다. 흥전리 절터를 발굴하던 조사원 한 명이 갑자기 흥분한 목소리로 "찾았다"를 외쳤다. 기단 부분을 조심스럽게 쓸어 내리는데 흙 속에서 문고리 모양을 한 유물 2점이 나란히 발견된 것이다. 대칼과 붓으로 살살 흙을 걷어내자 안에서 푸른 빛이 도는 금속이 나타났다. 장고지(사찰의 장독 보관시설) 바로 옆 '4호 건물지'에서였다. 사찰의 행정업무를 보던 건물로 추정된다.

청동 인장이었다. 두 과 모두 크게 훼손되지 않은 채 완전한 형태였다. 가로 세로 5.1센티미터 정사각형으로, 윗면에 끈을 매달 수 있는 손잡이가 달려 있다. 유적 발굴에서 인장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문헌 기록과 금석문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문자가 새겨진 인장에는 그 시대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엄청난 정보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석 달 남짓 보존처리를 거쳐 명문이 판독됐다. 한 과에서는 선을 기하학적으로 연결해 '만(卍)'자가 새겨져 있었다. 다른 한 과에서 '범웅관아지인 梵雄官衙之印'이라는 문자가 전서체로 돋을새김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고대사의 공백을 채워줄 또 하나의 키워드가 튀어나온 것이다.
흥전리사지에서 발굴한 청동인장'범웅'은 문자 그대로 부처님, 즉 석가모니를 뜻한다. 따라서 범웅관아라면 불교 관청이라는 뜻쯤으로 해석되겠다. 범웅이라는 말 자체가 잘 쓰이지 않는 말이고, 통일신라 이전을 기록한 어떤 사서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많지 않은 통일신라시대 비문에도 역시 나오지 않는 단어다. 범웅관아가 불교 관청을 부르던 고유명사인지, 아니면 일반 명사인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는 게 발굴을 진행하고 있는 불교문화재연구소측의 설명이다.

혹시 그렇다면 이 인장이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은 아닐까? 흥전리 사지에서는 그 동안 금당지, 탑지 등 가람 시설과 함께 '국통(國統)'이라고 새겨진 비석 조각, 청동 정병, 금동번(깃발)이 출토됐다. 이번에 발굴된 관인과 같은 토층에서 나왔기 때문에 동시대 유물로 판단하고 있다.

국통이 뭘까? 신라시대 왕이 임명했던 승단의 최고 지도자를 말한다. 삼국사기에는 국통이라는 키워드가 두 곳에서 언급된다. 진흥왕 12년 거칠부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쳐서 죽령 이북 10군을 빼앗았는데, 이때 혜량이 무리를 이끌고 신라에 귀화하니 그를 국통으로 삼았다는 것과 선덕여왕이 자장율사를 대국통으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흥전리 사지의 비문 조각에는 이 사찰에서 생활했던 국통이 당나라 유학생 출신이라는 사실이 기록돼 있어 통일신라 시대 유물이라는 확증을 더하고 있다.

또 하나 범웅관아 인장은 경주 황룡사 터에서 출토된 청동 인장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도 들 수있다. 가로 세로 길이가 6.2센티미터여서 범웅관아 인장 보다는 약간 큰 편이지만, 손잡이를 포함한 전체 형태와 글자체가 비슷한 점으로 볼 때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서 드는 기본적인 의문 하나를 풀어보자. 신라인들은 왜 더 단단한 철을 놔두고 청동으로 인장을 만들었을까? 우선 우리 머릿속에서 철기가 청동기 보다 우수하다는 선입견을 지워야 의문이 풀린다. 청동은 보존에 있어서 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하다. 장마철 습기가 많아 철이 쉽게 녹스는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구리와 주석을 섞어 제조하는 청동은 일단 살짝 녹이 슬고 안정화만 되면 잘 부식되지 않는다. 처음에 슨 녹이 일종의 코팅막 역할을 하면서 추가 부식을 막아주는 것이다. 청동은 철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조하기 쉽다는 점도 한몫 했다. 철을 녹이려면 청동보다 훨씬 고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청동이야말로 요즘 말로 가성비가 높은 소재인 셈이다. 왜 이순신 철상이 아니라 동상인가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국가다. 고구려가 372년 소수림왕, 백제는 384년 침류왕 때 불교를 받아들인 반면 527년 이차돈의 순교로 뒤늦게 불교를 공인했으니 150년 이상 늦은 셈이다. 그런 신라가 짧은 시기에 불교 국가가 된 데에는 중앙정부에서 '국통' '대국통' 같은 승관직을 임명해 관리했을 정도로 적극성을 보인 것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황룡사지 인장과 닮았다는 사실은 신라 정부가 관인까지 직접 제조해 지방 정부나 사찰에 내려 보냈을 것이라는 점을 뒷받침한다. 문무왕이 모든 관인을 국가가 주조하도록 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 역시 이 유물로 확인됐다.

흥전리 사지는 해발 700터가 넘는 고지에 약 2만8천 평방미터의 평지를 조성해 만든 대가람 터이다. 지난 2014년부터 올해 말까지 6차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뤄지고 있는데, 아직도 사찰명, 창건 시기 등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다만 국통이 거주했던 정도로 국가가 관리했던 대사찰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불교문화재연구소 박찬문 팀장은 "신라시대 국통은 주로 수도인 경주의 대가람에서 생활했을 것"이라며 "이 사찰은 신라 국왕이 국통을 마친 고승을 배려하는 뜻에서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이 곳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한 일종의 하안소인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5호 건물지 내부 토기 매장시설 전경흥전리 사지는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탄광지대에 있다. 신라는 왜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이렇게 큰 사찰을 조성했을까? 신라에게 삼척이란 지역이 가졌던 의미를 파악하면 이런 의문은 설명된다. 삼척은 신라에 있어 북방 개척의 교두보였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서기 512년 지증왕이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을 정벌할 때 출병한 기지가 삼척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는 동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이어지는 좁은 평지를 통해 고구려를 압박했는데, 이 동해안 통로는 경북 울진에서 끊겨 버린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내륙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바로 흥전리였던 것이다.

흥전리 사지 발굴은 지난 2014년부터 6차에 걸쳐 진행되고 있다. 두 개의 문화층 가운데 아래층은 아직 일부만 발굴된 상태다. 앞으로 아래층 발굴이 완료되면 우리 고대사의 비밀을 풀어줄 퍼즐 조각이 몇 개나 더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