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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훈장 없는 외로운 승리…7년 전 연평도 포격전

[취재파일] 훈장 없는 외로운 승리…7년 전 연평도 포격전
연평도 포격전이 벌어진 지 7년이 지났습니다.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부터 벌어진 명백한 남북의 전투였고 해병대의 승리였습니다. 혹자는 해병대 연평부대 포7중대의 ‘13분 만의 대응’이 늦었다고 말하고, 포7중대의 K-9 자주포가 도발 원점 주변 논바닥만 때렸다고 힐난하기도 합니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연평도 포격전을 연평도 포격 도발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무책임하고도 틀린 주장들입니다. 포화 속에서 13분 만에 북한군을 공격한 것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빠르고 용감한 대응이었습니다. 개머리 진지 논바닥을 때리기 전에 무도를 초토화시켰습니다. 2010년 11월 23일 연평부대는 북한의 선제 공격에 맞서 훌륭하게 반격하고 이겼습니다. 연평도 포격 도발이 아니라 연평도 포격전인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그 흔하디 흔한 훈장은 전투 중 산화한 두 해병에게만 수여됐습니다.

13분 만의 사격이 왜 빠른 대응이었는지, 반격이 왜 훌륭했는지, 왜 연평도 포격 도발이 아니라 연평도 포격전인지, 왜 훈장을 못 주는지 하나하나 짚어보겠습니다.

● 13분 만의 대응사격…"신화였다"

당시 해병대 연평부대에서 도발 원점을 향해 대응 사격을 할 수 있는 무기 체계는 K-9 자주포 1개 중대 뿐이었습니다. K-9 자주포가 딱 6문이었습니다. 연평도 포격전의 선봉 포7중대는 북한의 공격을 받기 직전, 실사격 훈련을 마치고 포를 정비하고 있었습니다. 훈련 중 포 1문에 포탄이 걸렸습니다.

오후 2시 34분 북한의 방사포탄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2문이 포탄을 맞아 불이 붙었고 포 진지는 불바다가 됐습니다. 6문 중 절반인 3문이 전력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진지 뒤편에 있던 장약과 포탄으로 파편과 불똥이 튀고 있어서 자칫 2차 폭발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는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포7중대는 오후 2시 46분, 3문으로 1차 사격을 했습니다. 1차 사격을 하는 동안 나머지 대원들은 자주포에 붙은 불을 껐고 그 중 1문은 악착같이 수리했습니다. 북한의 포격으로 포탑을 움직이게 하는 구동 제어기의 케이블이 끊어졌지만 수동으로 전환해서 사격할 태세를 갖췄습니다. 그래서 2차 사격 때는 급히 수리한 1문을 더해 4문으로 사격했습니다. 놀랍도록 침착한 대응이었습니다.

2010년 겨울 연평도를 방문한 미군 지휘관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용기를 보여줬다”며 연평부대를 치하했습니다. 당시 포7중대장이었던 김정수 소령은 “만약 우리가 선제 공격했다면 무도와 개머리의 북한군은 전멸했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포7중대의 1차 대응 사격을 맞은 무도 진지는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을까요? 정보 당국은 최소 30~4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 포7중대는 '자주포 머신'이었다!
불 붙은 철모 쓰고 싸운 임준영 해병
포 7중대는 2010년 1월 1일부터 포격전이 벌어진 11월 23일까지 455회의 전투 배치 훈련을 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휴일을 빼면 하루에 두 번꼴로 전투 배치 훈련을 한 것입니다. 포 7중대원 한 명 한 명은 눈 감고도 사격할 수 있는 ‘자주포 머신(machine)’들이었습니다. 마침 연평도 포격전은 사격 좌표가 없는, 눈 감고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자주포 머신들이 멋지게 해냈습니다.

포7중대는 1차 사격 때 도발 원점인 개머리 진지의 좌표를 받지 못했습니다. 연평도의 대포병 레이더 AN/TPQ를 운영하던 타군 측에서 좌표를 못 잡아낸 것입니다. 포 7중대는 숱하게 전투 배치 훈련을 하며 익힌 북한 무도의 방사포 진지 좌표를 목표로 1차로 50여 발을 쐈고 무방비 상태였던 무도의 북한군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도발 원점 대신 무도를 때린 것은 20세기의 클라우제비츠라고 불리는 전략의 대가 바실 리델 하트가 최고의 전술로 꼽는 '간접 접근' 즉 대용 목표에 대한 공격입니다.

연평부대는 1차 사격이 끝난 뒤 타군으로부터 좌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정확한 좌표였습니다. 고도가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무도는 이미 초토화됐기 때문에 원점인 개머리 진지를 향해 자주포 30여발을 2차로 사격했습니다.

이때 일부 탄착점이 북한 방사포가 있던 자리보다 뒤, 논 바닥에 형성됐습니다. 사격 못하는 포7중대라는 비열한 비난들이 쏟아졌습니다. 연평부대, 그리고 포7중대의 잘못이라면 엉터리 좌표를 받은 것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연평 부대장 이하 모든 해병대원은 엉터리 좌표를 손에 쥔 채 목숨을 내놓고 싸워 이겼습니다. 누구 하나 타군을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연평도 포격전의 상징인 불타는 자주포의 사수 강승완 해병은 당시 자주포 안 후배 해병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믿는 신이 없지만 너희들에게 신이 있다면 살려 달라고 빌어라” “꼭 살아 나가서 우리가 여기서 겪은 일들을 밖에 알리자” “꼭 살아 남아라” 그리고 싸웠습니다.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 2010년 11월 23일은 연평도 포격전이다!

2년 전 전 청와대 홍보수석 이동관 씨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도발 원점인 개머리 진지를 공습할 것을 지시했는데 군 관계자들이 주저해서 실행하지 못했다”고 밝혔습니다. “군 관계자들이 동종(同種) 동량(同量)의 무기로 반격해야 한다는 유엔사의 교전 수칙을 앞세우는 바람에 도발 원점을 타격하지 못했다”는 주장입니다.

어이가 없는, 엉터리 같은 말입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직접 뽑은 군 참모들은 당연한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최종 판단과 결심은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몫입니다. 도발 원점을 지도에서 지워버릴 결심을 했다면 대통령은 명령을 하면 됩니다. 하지만 군 통수권자는 결심도 명령도 안 했습니다. 공군과 해군을 동원한 반격을 안 한 것은 오롯이 군 통수권자였던 이명박 전 대통령의 책임입니다.
소나무에 박힌 고 서정우 해병의 정모 앵카
최고 지휘부가 갈팡질팡하는 동안 연평부대 포7중대는 사선을 넘나들며 싸웠습니다. 미련한 고(故) 서정우 해병은 기다리던 배를 타고 말년 휴가 가도 됐었는데 북한과 싸우겠다고 부대로 복귀하다가 북한 포탄을 맞고 전사했습니다. 막내 문광욱 해병도 선배 해병들 따라 열심히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임준영 해병 등은 철모와 군복이 불타고, 손바닥이 찢기고, 온몸 이곳저곳에 파편이 박히면서 자주포로 장약과 포탄을 옮겼습니다.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도 누가 뭐라고 안 했을 정훈장교조차 죽음을 무릅쓰고 포탄 속에서 포7중대원들의 용기를 촬영했습니다.

명백한 전투이고 승리입니다. <전쟁론>의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의지의 충돌’로 규정했습니다. 연평도 포격전도 남북 두 의지의 충돌이었습니다. 끝까지 버틴 의지는 해병대였습니다. 포를 먼저 쏜 쪽은 북한군 서남전선사령부였습니다. 해병대는 맞고 시작했지만 전투의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청와대, 국방부, 합참은 확전을 우려했습니다. 북한의 기습 공격에 당황했고 당했습니다. F-15가 출격했지만 개머리 진지를 공습할 수 있는 공대지 미사일을 장착하지 않았고, 해군 함정들은 연평도의 해병대를 홀로 남겨두고 연평도와 북한 사이의 바다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싸움을 피한 청와대와 군 지휘부에게 2010년 11월 23일은 그저 연평도 포격 도발입니다. 연평부대원에게 훈장 하나 내리지 않는 이유도 이런 데 있는 듯합니다. 해병대 연평부대에게 2010년 11월 23일은 북한의 기습 도발에 용감히 맞서 싸운 명백한 포격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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