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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신뢰의 위기' 못 읽는 우리은행장의 이메일

[취재파일] '신뢰의 위기' 못 읽는 우리은행장의 이메일
올 가을, 우리은행은 어느 때보다 차디찬 세간의 시선에 긴장하고 있다. 지난달 불거진 채용비리 의혹이 사회적 지탄으로 번진 탓이다. 지난 2일엔 또 한 번 깜짝 놀랄 소식이 터져 나왔다. 이광구 은행장의 전격 사의 발표였다. 2년 임기를 마치고, 연임에 성공한 그는 행장 2기 고작 6개월이 지났을 뿐이다. 그가 물러나길 결심한 진짜 이유는 뭘까. 우리은행은 이번 사태에서 어떤 교훈을 얻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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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로에서 사퇴까지
 
지난달 17일, 금융감독원 국정감사에선 지난해 우리은행 신입사원 공채 과정에 유력 인사의 청탁과 그에 따른 특혜 채용 의혹이 폭로됐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정의당 심상정 의원은 “약 150명인 신입사원 가운데 약 10%인 16명이 특혜를 입은 걸로 추정된다”라고 밝혔다. 금융감독원 전 부원장보나, 국정원 직원, 우리은행 예금 VIP 등의 직간접적 요청을 받아, 이들의 친인척이나 이들이 추천한 응시자를 ‘채용’했다는 의혹이다.

금감원으로부터 자체 감찰 지시를 받은 이광구 은행장은 이번 사건 진상조사를 위한 감사팀을 꾸렸다. 하지만, 구성 자체가 엉망이란 사실이 SBS 보도로 잇따라 확인됐다. 지난달 20일, 임직원 비리를 감시 감독하는 검사실장 이 모 씨가 금감원 부원장보 등의 채용 청탁을 은행에 전달한 인물로 지목돼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엔 더 어처구니없는 행태가 확인됐다. 그는 서울의 한 대학 부총장의 청탁 민원도 전달했는데, 이 때 합격을 요청한 인물은 자신의 처조카였던 사실도 드러났다.

하지만, 이런 ‘위기 상황’에서 만난 이광구 은행장은 사퇴까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기자는 지난달 27일 오후, 자체 감사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심상정 의원실을 찾은 이 행장에게 인터뷰를 시도했다. 그는 취재팀을 발견하자마자 쏜살같이 내달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기까지 5분간 이어진 질문 공세에서, 그는 당황한 듯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했다. 말미에 그는 “감사 결과를 보고 나중에 말씀드리는 기회를 갖겠다.”라는 뜻을 전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 우리은행은 약속한 대로 심 의원에게 '2016년 일반채용 관련 특별검사 진행 상황 보고서'를 제출했다. 결론은 추천 명단은 우리은행 내부에서 작성됐으며, 구체적인 내용 역시 알려진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또, 문건이 등장하는 일부 은행 내 인사들이 합격 가능성 등을 물은 적은 있지만, 합격지시나 부당한 변경, 업무 방해 등은 없었다는 결론이었다. 해당 조사는 전, 현직 우리은행 소속 특정 응시자를 추천했던 인물과, 채용 절차를 진행했던 12명의 ‘인터뷰’ 결과 나온 결론이었다. 철저히 내부자의 시각에서 작성된 보고서일 뿐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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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상 못한 전격 사의… 배경은?
 
이광구 은행장 입장에서 보면, 사태 초기 일정한 수습 절차는 자신의 주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세부사항 역시 파악하고 있었던 걸로 보인다. 기자가 인터뷰 시도를 한 27일 오후 기자와 만났을 당시, 기자는 이들 임원 가운데 검사실장 이 모 씨가 외부 인사를 사칭했다는 SBS 보도에 대해선, 어떻게 조사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이 행장은 “그거는 이번 감사대상에서 빠져 있어가지고, 저희가 말할 저기(내용)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인사 청탁성 의견 전달 등 경위와 사실관계는 확인했지만, ‘사칭’ 여부 등 구체적인 내용은 ‘저희’ 즉, 내부에선 규명을 못한다고 판단했단 얘기로 읽힌다.

이 행장은 몇 시간 뒤엔 검사실장 등 비리 가담 정도가 큰 3명을 직위해제했다. 사태 수습을 위한 은행 차원의 조치를 주도한 것이다. 그런데, 불과 엿새 뒤 사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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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구 은행장은 11월 2일 점심 무렵, 모든 사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사퇴의 변이 담긴 마지막 메일이었다. 그는 ‘강한 은행을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계신 1만 5천여 우리 가족 임직원 여러분께 무거운 마음으로 글을 올려 송구하다는 뜻을 전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곧바로 ‘2016년 신입직원 채용에 대한 국정감사 및 언론보도와 관련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최고 책임자로서 국민과 고객님들께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아울러 도의적 책임을 지고 오늘 이사회간담회에서 은행장직 사임의사를 말씀드렸다’며 자진 사퇴의 뜻을 분명히 한다.

사퇴까지 결심하게 만든 주된 원인은 무엇일까. 먼저, 이번 사건이 채용 비리 척결을 위한 상징적 사건으로 인식된 데, 부담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부정 채용 의혹은 지난해 하반기 신입직원 선발 기간이 그 무대다. 1기 이광구 체제가 공고하던 시기다.

핵심 임원을 검찰이 줄줄이 수사하는 상황이 예측되는 지금, 은행장이 이런 사실을 알았는지, 보고 또는 개입했는지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도의적 책임’을 언급한 부분은 따라서, 이런 사태만은 피하려는 포석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결단이 우리은행 전체를 위하는 길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두 번째 배경은, 리더십에 상처가 생각보다 크게 났다는 점이다. 우선 이번 사태 자체가 누군가의 투서로 촉발된 게 사실이다. 핵심 실무자 가운데 누군가가, 내부에서 외부로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고 공익제보를 한 것이다. 이런 행위 자체에 ‘이광구 체제’에 대한 불만이 깔렸을 수 있다.

취재 결과, 첫 번째 투서는 상당한 연쇄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우리은행 고위 임원은 기자에게 “누군가의 투서로 채용 비리가 공개된 뒤, 이 전 은행장를 비난하는 투서들이 은행 안팎으로 여러 건 접수 됐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투서 가운데 상당 부분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현재 수뇌부 그중에서도 은행장을 겨냥하는 내용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리더십이 흔들리는 상황 앞에서 이 행장은 심적으로 괴로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은행 안팎에선 고질적인 계파 갈등이 근본원인이라는 시각도 불거지고 있다. 우리은행 내부에선 과거 상업은행과 한일은행 출신이 번갈아 요직을 차지하는 ‘관행 아닌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상업은행 출신인 이 은행장이 연임하는 상황이 계파를 달리하는 조직원들은 탐탁하지 않았을 거란 일각의 추측엔 이런 배경도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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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뢰의 위기’ 못 읽다간…

사퇴의 변을 담은 이메일에서 그는 “2014년 12월 은행장으로 취임한 이후 2년 10개월여 동안 ‘내몫완수로 더 강한은행’을 이루고자 모든 임직원과 같이 일심동체가 되어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다”라고 강조했다. “2016년 11월 오랜 숙원이었던 민영화를 이루고 1등 은행의 초석을 마련했다”며, 자신의 업적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드러냈다.

업적과 기대감이 아무리 컸어도, 불과 1년 전 벌어진 채용 부정의혹 사건은 모든 걸 물거품으로 만들기 충분한 부정이다. 사실로 드러날 경우, 인사 담당 임직원은 물론 은행장까지 도덕적,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중대 범죄다.

고객과 국민들이 느끼는 실망감 역시, 그저 ‘꿈의 직장’으로 보이던 은행 내부의 낮은 도덕적 수준에서 오는 게 아니다. 분노에 가까운 실망은 자신이 보낸 ‘신뢰’에 배신을 당했다는 충격이 원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금을 더 유치할 수 있을 걸로 기대된다고 해서, 그의 친인척을 뽑는 은행을 신뢰하고 있었다는 자신이 한심할 수도 있다. 가장 투명해야 할 채용 과정이 청탁과 금전적 욕구만으로 오염될 수 있다면, 은행의 존립 근거인 ‘건전성’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 행장이 후배들에게 보낸 A4 한 장 분량의 이메일에서 이런 분노를 헤아리는 문장은 보이지 않는다. 상당 부분이 민영화에 뒤이은 ‘지주사 전환’ 과제를 못 한 데 대한 아쉬움과 이 목표를 달성해 주길 바라는 당부로 채워져 있다. 최근 들어 최고의 ‘성과’를 냈다고 평가받는 은행장의 편지는 CEO로서 조직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과 은행 주변에 닥친 ‘신뢰의 위기’는 읽지 못하고 있다.

적잖은 고객이 은행의 성과를 보고, 새로 돈을 맡길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많은 고객은 신뢰가 있기에, 거기에 돈을 계속 맡겨두는 것이다.

떠나는 행장과 남은 임직원은 이번 사태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을까. 이번 사태로 깨달은 교훈의 깊이가 미래를 바꿀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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