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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109 : '온갖 무례와 오지랖을 뒤로하고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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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하는데 치마 입으래? 산부인과 갔더니 왜 아무 설명 없이 다짜고짜 성경험부터 묻지? 늙고 아프면 믿을 것은 가족밖에 없으니까 결혼하라고? 애 키우기는 왜 아직도 엄마 혼자만의 일인 거지? 얼굴로 일하는 것도 아닌데 이력서에 왜 사진을 꼭 붙여야 돼?

…변화의 시작은 언제나 누군가의 의아함, 질문, 목소리입니다. 그 앞을 막는 어떤 무례와 오지랖에도 질문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일상을 기록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어떤 사람들은 불편하게 읽을 수도 있는(수위가 높진 않지만) 혹은 그래야만 하는 책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온갖 무례와 오지랖을 뒤로하고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저자는 화사 외에 42명, 최근 10년간 한국여성민우회 홈페이지와 소식지에 실린 글들을 골라 엮은 책입니다.

"직장에서 비난받지 않고, 눈에 띄지 않는 여름을 보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검열하고 판단하고 손질해야 한다. 둔하거나 나이 들어 보이지 않기 위해 살이 쪄서는 안 된다. 다리와 겨드랑이의 털은 깔끔하게 제거되어야만 한다. 맨발톱이 드러나는 것은 지저분하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은 손질을 하고 페디큐어를 칠해주어야 한다…. 상식적인 직장인으로 보이기를 요구하는 일터, 그런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시선들, 그리고 그 속에서 인정받고 살아남고 싶어 하는 욕구.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해 스스로의 표현 방식을 점검하는 나."

"'어떻게 하면 제모를 더 잘할 수 있을까'에서 '왜 난 제모를 하지?'로 물음이 바뀌게 되었다. 그동안 해야만 한다는 압박 속에 다른 선택지 없이 했던 것들에 대해 저항의 펀치를 날려야겠다는 마음이 한껏 차올랐다. 그리고 난 실행에 옮겼다."

"웅크리고 숨어 있다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경찰에 붙들려 나온 '파란 마스크'가 떠오를 때마다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 '소심한' 남자도 여성인 내 앞에서는 페니스를 내밀고 '힘'을 발휘하며 '만족감'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 아닌가…. 그 남자가 의도한 상황과 시선을 통해서 내가 원치 않는 성적 대상이 되고 있다는 느낌은 자아가 쪼그라드는 느낌이며 '위축감'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스스로가 위축되는 그 상황은 몸과 뇌리에 각인되어 두려움과 공포를 유발하게 된다. 이 문제는 인격적 모독이자 성폭력의 연장선에 놓여 있는 것이다."

"주말 설거지를 둘러싸고 티격태격하던 남편과 아들이 나란히 거실에 앉아 빨래를 개키기 시작한다. 누나와 엄마의 스타킹과 속내의까지 착착 각을 세워 접은 뒤 각자 방 서랍까지 배달하는 것으로 빨래 개키기는 끝난다. 앞으로도 집안일 훈련은 쭈욱 계속될 것이다. 함께 먹을 식사를 위해 국 끓이고 생선 굽고 나물 무치는 멀티태스킹의 현장에서 내 아들이 숟가락 하나 놓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작년 언젠가 '우리는 더 불편해져야 한다'는 제목의 칼럼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세상이 갈수록 불편해진다는 중년 남성들의 푸념으로 시작하는 그 칼럼은, 한쪽만 편하고 다른 쪽은 불편한 관계보다는 양쪽이 다 불편한 관계가 낫다는 내용을 거쳐, 규칙이 공유돼 경계가 만들어지면 그것은 곧 모두를 위한 자유가 된다는 말로 끝납니다. 갖은 무례와 오지랖에도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저와 우리들에게 경의를, 페미니스트로 정체성을 갖든 아니든 타인과의 관계에 조금씩 더 불편해질수록 우리가 같이 사는 이 사회는 조금씩 더 나아질 것이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 궁리 출판사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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