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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우중(雨中) 산책, 선비를 만나다…함양 선비문화 탐방로 ②

[라이프] 우중(雨中) 산책, 선비를 만나다…함양 선비문화 탐방로 ②
어제도 하로밤
나그네 집에
가마귀 가왁가왁 울며 새었소

오늘은
또 몇 십리
어디로 갈까

산으로 올라갈까
들로 갈까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오

(하략)

김소월의 시 <길>의 부분이다. 길을 떠난 나그네의 외로운 심사가 아릿하게 스미듯 느껴져 온다. 오라는 데는 없지만 어디론가 가야하는 나그네의 설움이라니... 유치환이 파도를 두고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고 절규하던 그 맘과 꽤나 닮아 보인다. 사랑에 목마른 그와 가야 할 곳이 필요한 그는 그렇게 시 안에서 울부짖거나 조용히 울거나... 그 안타까운 마음을 뉘라서 알 것인가.

다만 비오는 날, 그 비를 맞으며 걷다보면 어느 정도는 그 서늘한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조금, 아주 조금은 말이다. 그렇게 그날도 걸을 수 있을 만큼만 비가 오고 있었다.
돌아갈 그곳을 위해 사람들은 걷는다. 어도(魚道)의 모습.
● 삶이란 결국 ’유랑과 회귀의 반복‘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삶이란 결국 ’유랑과 회귀의 반복‘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내 삶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차피 떠난다는 것은, 그렇게 사람이든 다른 무언가를 좇아 세상 속으로 또는 세상 밖으로 나서는 일이면서, 그러다가 또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과정의 반복이며, 그 반복은 결국 삶을 위한 연습이면서 본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돌아갈 그곳을 위해 오늘도 걷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선비문화탐방로 37
길은 계곡을 따라 가지런히 이어지고 있었다.
 
선비문화탐방로의 장점은 계곡의 험한 곳에는 나무 데크로 길을 이어놓은지라 걷기가 편하다는 점이다. 반면에 이러한 장점이 가끔은 단점이 되기도 한다. 땅을 밟으며, 그 땅이 형성하는 높낮이에 따라 굴곡을 느끼며 소요하고픈 그들에겐 더욱 그러하다.
선비문화탐방로 38
얼마를 걸었을까.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수많은 단체의 리본들이 차양처럼 길을 막은 채로 나무를 장식하고 있었다. 차양을 살며시 걷고는 몇 걸음을 더 옮기자, 그 너머에 빗속에서 사색하는 또 하나의 정자가 보인다. 람천정(藍川亭)이다.
빗속에서 사색하는 또 하나의 정자가 보인다. 람천정(藍川亭)이다.
이곳 화림동 계곡이 예로부터 8정(亭)8담(淡)으로 불리는 이유는, 이렇듯 곳곳에 정자와 물이 있기 때문이다. 8정(亭) 중에서 이 람천정이 가장 소박하고, 또 안온해 보인다. 작은 규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드러나는, 그래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겸손하면서도 늠름하기 때문이다.

시냇물은 연신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내느라 여념이 없지만, 정자는 저 홀로 고요하다.
정자는 저 홀로 고요하다.
이곳에서 어디로 갈까 잠시 길을 헷갈려 하다가 멀찍이 보이는 이정표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시 걷는 길은 반갑게도 흙길이다. 길은 산을 향하여 제 맘대로 뻗어 있었다.
들풀들의 맹렬한 기세도 바퀴자국만큼은 어쩌지 못한다.
그 길이 특별히 반가운 것은 어릴 적 내가 보고 또 걷던 그 길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한적한 농로가 그렇듯, 길에도 잡풀이 가득하고, 수레든 경운기든 바퀴가 지나간 자리만큼만이 이곳이 길임을 알려준다. 들풀들의 맹렬한 기세도 바퀴자국만큼은 어쩌지 못한 것이다. 어릴 적에는 길 위의 질긴 풀들을 서로 묶어놓아 지나는 이들을 골탕 먹이기도 했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참 짓궂은 짓인지라, 머쓱해질 따름이다.
소나무들의 행렬이 가없다.
농로를 벗어나면, 길은 숲길로 이어진다. 긴 세월을 살아낸 나무들은 서로의 어깨를 짚어가며 경쟁이라도 하듯 하늘로 하늘로 승천을 꿈꾼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발을 옮길 때마다 이파리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의 타닥대며 고르게 흩어지는 소리는 소음인 양 또 음악인 양 경계의 문을 지나는 이를 위한 소박한 연주회 같기도 하다.
길은 숲길로 이어진다.
문득 이 길을 다시 걷기까지 잠시나마 겪었던 걷기의 슬럼프를 떠올린다. 말은 슬럼프지만 결국은 게으럼이 주범이었을 것이다. 다시금 걸어야 할 이유를 곱씹어본다. ’인간은 걸을 수 있는 만큼만 존재한다.‘는 사르트르의 말이 아니더라도 걸어야 할 이유야 차고 넘친다. 이 길을 벗어나면 다음엔 어느 길을 걸을 것인가가 차라리 궁금하여진다.

세계 3대 트레일 코스인 미국 시에라 네바다산 ‘존 뮤어 트레일’의 주인공인 존 뮤어가 말하듯 ‘최고의 여행 준비는 차 몇 봉지와 빵 몇 덩이를 배낭에 던져 넣고, 뒷마당 울타리를 뛰어 넘는 것’이 아니던가. 그냥 걸으면 될 일이다.
함양이야말로 좌(左)안동 우(右)함양으로 불리던 유학의 고장이었다.
 조선의 노론이여! 지겹구나, 역겹구나.

선비문화탐방로를 걸으며 전편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선과 성리학, 그리고 그 성리학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살아갔던 수많은 유학자들을 생각해 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 함양이야말로 좌(左)안동 우(右)함양으로 불리던 유학의 고장이 아니던가.
함양군 수동면 소재 남계서원. 함양군청 제공
그 와중에 만난 고은 시인의 시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시인의 역작인 <만인보(萬人譜)> 28권에에 실린 <조선 노론>이라는 제목의 시다.
너무 길구나
 
3백년 넘어
5백년에 이르는구나
또 과장하고
또 왜곡해도
누가 감히 탓하겠느냐
 
저 폐허의 17세기
 
북방 후금과 명 사이
중립으로
등거리로
나라의 위기 맞선 광해군
그를 내쫓을 때
그 명분
대명천자를 배신함 그것
 
이 시대의 극(極)으로부터
노론 등장
몇차례 고비 잘도 넘겨
조선 후기의 풍운을 몽땅 틀어쥐었구나
 
그 후예 길구나 질기구나
 
일제 작위 받았구나
현대사 도처 부귀공명 누리는구나
 
지겹구나 역겹구나
 
오로지 후예 이동녕 하나
임정 요인으로 중국 땅바닥 떠도는 순결의 곤궁이었구나
 
시인에게도 조선시대의 대표 당파 중 하나였던 노론은 역사의 죄인이었나 보다. 그것도 ’지겹고 역겨울 정도‘로 말이다.
오래된 정자의 지붕에는 잡풀만 그득하다.
시인은 제목에서 노론을 거론하였지만, 시의 내용상으로 해당 당파는 ’서인(西人)‘이 맞을 듯싶다. 물론 노론도 서인에서 분화한 당파이긴 하지만 시기적으로 1680년 숙종대의 경신환국(庚申換局) 이후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졌음을 감안할 때, 광해군을 폐위할 당시에는 노론이라는 이름의 당파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당파는 영화 <남한산성>에 등장하는 최명길과 김상헌 등이 속했던 당파인 서인 세력들이었다. 서인 세력들은 ’인조반정(1623년)‘이라는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았고, 그 권력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하기 전까지 300여년이라는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노론과 소론, 벽파와 시파로 분화되며 끊임없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초기 서인 세력들은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학문적 계통을 세웠던지라 10만양병설 등 실용적인 현실정치를 추구하는 세력이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후 그들은 성리학적 명분과 예학(禮學) 중심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의리와 명분은 그들의 최고의 가치였다. 군자정(君子亭)의 모습.
그들에게 ’의리와 명분‘은 최고의 가치였으며, 성리학이라는 경전에 목숨을 걸었으며, 성리학에 반하는 그 어떤 학설이나 주장은 철저히 배척되었고, 사대(事大)사상이 지나쳐 나라의 안위보다도 명나라와의 의리를 더 중시하는 수구 세력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 결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국토는 결딴나고, 백성들은 칼에 찔리고 맞아서 또는 굶어서 죽었으며, 또 60만으로 추정되는 어마어마한 수의 백성들은 청나라의 노예로 끌려가야 하는 굴욕의 역사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화냥년(還鄕女)과 호로자식(胡盧子)으로 불리는 그들이 그렇게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온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 아니던가.
남한산성의 모습
국가 간의 전쟁은 필연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피할 수 있는 전쟁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점은 과거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북한 변수로 인한 한반도 전쟁 가능성에 많은 사람들은 걱정하고 또 두려워하고 있다. 전쟁 시나리오가 구체화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과거를 통해 배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맹목적인 대결의식이 가져온 참화를 말이다. ’인류에게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다는데 있다‘는 아놀드 토인비의 말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남한산성의 서장대
병자년 당시, 명나라와의 전쟁만으로도 버거운 청나라가 굳이 조선을 침략한 이유는 조선이 청나라의 배후의 위협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청나라로서는 명나라와의 명운을 건 건곤일척의 전쟁을 앞두고 주변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스스로 명나라와 동맹국임을 자처하는 조선이야말로 청나라로서는 두고 볼 수 없는 배후의 적이었던 것이다. 이 모두가 인조반정 뒤 인조를 포함한 그 주역들이 자초한 것이었다. 전쟁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그렇게 엄동설한의 때에 단 3개월 만에 조선은 도륙을 면하지 못했고, 그렇게 항복을 하였으며, 인조는 삼전도로 나아가 청태조에게 머리를 땅바닥에 아홉 번 찧으며 사죄해야 했던 것이다. 그들의 맹목적 사대주의가 가져온 비참한 결과였다.
인조는 남한산성의 서문을 통해 굴욕의 장소인 삼전도로 향했다.
고은 시인도 지적하였듯이 서인(西人) 세력들은 광해군의 등거리 중립정책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어찌 명나라를 배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에게는 국가의 명운보다도, 임진왜란이라는 6년여의 전란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휼하는 것보다도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명분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서인(西人) 세력들은 광해군의 등거리 중립정책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남한산성의 모습
서인 세력들이 광해군을 몰아낸 뒤 발표된 인목대비의 교지를 보면 그들의 명나라에 대한 인식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나라가 명나라를 섬겨온 지 2백년이 지났으니 의리에 있어서는 군신간이지만 은혜에 있어서는 부자 사이와 같고 임진년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선왕(선조)께서는 40년 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셔서 평생 한 번도 서쪽을 등지고 앉으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광해는 은덕을 저버리고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오랑캐와 화친하였다. 천리를 멸절시키고 인륜을 막아 위로는 중국 조정에 죄를 짓고 아래로 백성들에게 원한을 사고 있는데 이러한 죄악을 저지른 자가 어떻게 나라의 임금으로서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으며 조종의 보위에 있으면서 종묘사직의 신령을 받들 수 있겠는가. 이에 그를 폐위시키노라.”

그들에게 중국, 특히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의 나라인 송(宋)나라와 그 송나라를 계승한 명(明)나라는 아비와 다름없었던 것이다. 아비를 섬기는 마음이 지나쳐 제 몸인 나라와 자식과 같은 백성을 파멸의 길로 내몰았던 것이다.
 
그들은 전란 후에도 집권 세력으로서의 지위를 놓치지 않았다. 영화 <남한산성><button class= 이미지 확대하기
장면" data-captionyn="Y" id="i201103118"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71016/201103118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거기에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국가를 환란 속으로 몰아간 그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집권 세력으로서의 지위를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조선이 망하는 그날까지도 집권 세력이었으며, 일제의 합병 후에도 송병준을 비롯한 그들은 작위까지 받으며 호의호식하였으니 어찌 시인의 입에서 욕인들 나오지 않겠는가. 문제는 지금까지도 이 땅의 곳곳에서 그들은 사대(事大)의 대상을 바꿔가며 그 권세와 부를 누리고 있다는 게 고은 시인의 평가다.

이 길이든 저 길이든 멀고도 험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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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소본능에 취하다.

자못 빗줄기가 굵어지는 터라 걸음을 서둘러야 할 것만 같다. 계곡이 내(川))를 이루고, 그 시냇물 속으로 하염없이 떨어지는 빗줄기는 행인의 머리 위로도 그 굵기를 더하며 제법 떨어진다.

우산을 펼쳐드니, 또 어쩌면 운 좋은 행락객이 된 느낌이다. 이렇게 분위기 있는, 또 운치 있는 걷기를 어딜 가서 또 경험해 볼 수 있을 것인가. 고향땅이 돌아온 탕자(?)인 내게 준 선물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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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얼마를 더 걸었을까. 갯가에 아름드리 뽕나무가 오디 향을 흩뿌리며 서 있다. 바닥에는 제 풀에 겨워 떨어진 오디들이 지천이다. 그야말로 자연산 그대로의 유기농 오디들이 행인들의 무심한 발길에 채이고 뭉개지고 있었던 것이다. 멀쩡하게 생긴 놈을 얼른 하나 입에 넣었다. 무슨 음식 프로그램도 아니고, 보는 이도 하나 없지만 오버액션이 나올 것만 같다. 시골의 순수한 바로 그 자연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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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어린 시절 양은 주전자를 들고 오디를 따겠다고 이산 저산을 헤매던 기억이 새롭다. 먹을 것이 귀하던 그 당시에 오디는 어린 우리에게 더없이 좋은 먹거리였었다. 그래서 여름이면 오디를 따러 다니는 게 일 중에서도 큰일이었으며 또 즐거움이었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뽕밭을 찾아 타고 넘은 산이 몇 개였던가. 그때는 그랬었다.

그런데 바로 그 오디가 땅바닥에서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저 홀로 뭉개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새삼 세월의 무상함과 그 세월의 변화가 가져온 오디에 대한 무관심이 조금은 아쉽기만 하다. 오디를 따겠다고 훠이휘이 산과 들을 헤매던 그 시절의 추억을 이제는 어디 가서 경험을 한단 말인가. 풍족한 먹거리가 가져온 역설이 아닐까 싶다. 이런 내 이야기에 내 처와 아이는 또 호랑이 담배피던 소리 한다고 뭐라 하겠지만... 여하튼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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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나무 너머로 시내를 막아선 둑이 보이고 그 둑에 연결된 어도(魚道)가 보인다. 어도는 보(堡)나 작은 댐 같이 하천의 흐름을 방해하는 구조물이 있을 때 어류나 기타 수중 생물의 이동로 확보 차원에서 만들어둔 인공 구조물을 말한다.

이 어도를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는 어떤 사연이 있어 이 멀고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는 것인지 새삼 궁금하여진다. 흔히들 귀소본능(歸巢本能)이란 단어로 뭉뚱그려 설명하지만, ‘재들은 원래 그래’라는 말로 퉁치기에는 그들의 운명적 노력이 과소평가되는 느낌이라 무언가 그들의 노력을 달리 표현하고자 하지만, 과문한 탓한 달리 떠오르는 무언가 없는지라 아쉬울 따름이다.
어도를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는 왜 이 멀고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는 것일까.
하긴 우리들 역시 때가 되면, 특히 명절이 되면 길게는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길을 달려 고향으로 달려가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본능이란 단어 자체에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해 주는 어떤 힘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어느 순간 때가 되면 가야할 곳이 있고, 그렇게 그 곳으로 가야하는 어쩌지 못하는 힘이야말로 생명을 지닌 모두가 감당해야할 법칙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 법칙이야말로 우주 만물을 조화롭게 하는 근본 질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오솔길이 소담스럽다.
얼마 걷지 않아 만나는 오솔길이 소담스럽다. 금계국과 싸리꽃이 길을 환히 비추어주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길이라면 언제까지고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아쉽게도 길은 다시 계곡을 만나 더 이상 오솔길이란 이름을 유지하지 못한다.

길은 도로로 이어진다. 얼마 걷지 않아 만나는 다리 아래로 계곡의 물은 그 폭을 넓혀가며 강으로 바다로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황암사(黃巖祠)는 순국선열을 모신 사당이다.
저 멀리 우뚝 솟은 한옥건물이 보인다. 황암사(黃巖祠)다. 처음에는 무슨 절인가 했다. 그런데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군과 싸우다 순국하신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라는 설명에 자못 진지해진다.
산과 계곡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경관의 위용이 자못 장엄하다.
산을 타고 흐르는 바위 절벽과 계곡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경관의 위용이 자못 장엄하다. 아쉬운 점은 길이 잠시 계곡을 떠나 도로로 이어져 있다는 점이다. 물론 도로를 걷는 여정은 길지 않다. 그 도로마저도 얼마가지 않아 폐도로로 연결되는지라 안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내 길은 다시 계곡을 따라 이어지고, 그 길은 나무데크로 만들어져 있는지라 걷는 것이 수월하기 그지없다. 하류로 내려올수록 계곡의 폭이 가히 작은 강 수준이다. 1,000여 평의 암반으로 이루어진 계곡의 풍광 또한 수려해진다. 황석산에서 흘러온 물이 보태어지니 물소리 또한 우렁차다.
너른 계곡 너머로 농월정(弄月亭)이 보인다.
● 농월정(弄月亭)에서 걸음을 멈추다

그 암반의 너른 계곡 너머로 농월정(弄月亭)이 보인다. ‘달을 희롱하는 정자’라... 이름이나 정자가 품고 있는 계곡이나 가히 화림동 계곡의 대표 정자가 아닐까 싶다.

농월정은 조선 선조 때 관찰사와 예조 참판을 지낸 박명부가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정자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팔작지붕 2층 누각형태로 지어졌지만, 아쉽게도 2003년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지금의 정자는 2015년에 복원된 정자인지라, 그 고풍스러운 자태를 찾을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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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부는 병자호란의 그날에 남한산성에서 결사항전을 주장했던 벼슬아치 중 한 명이었다. 예조참판이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차관급의 고위 관리였던 것이다. 그의 직속 상사(예조판서)가 주전론(主戰論)의 주인공, 김상헌이다. 그랬던 그였으니 삼전도의 굴욕을 감당하는 일이 오죽했을 것인가. 그 길로 낙향하여 머문 곳이 바로 이곳 농월정이다. 아래는 낙향한 박명부가 농월정에 머무르며 지은 시 <농월정>이다.
 
길 옆에 있는 별천지의 그윽한 곳을 누가 알리오
산은 빙 둘러 있고 물은 머무는 듯하네
선돌을 비친 못의 물은 맑고도 가득차고
창에 찾아든 푸른 기운은 걷히다가 다시 뜨네
주린 아이 죽으로 입에 풀칠하여도 화내지 않고
손님이 와서 집에 머리를 부딪쳐도 싫어하지 않네
노는 사람들 일 없다 말하지 말게나
늙어서 멋대로 속세를 떠나니 또한 풍류일세
 
선비문화탐방로 60
농월정(弄月亭)이라는 이름은 이태백의 시에서 따 왔다고 한다. 그저 달을 희롱한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다. 글자 농(弄)자의 모습이 옥(玉)을 두 손으로 떠받드는 모양이라 이에 착안해 달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만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니 이태백의 혜안이 놀라울 따름이다.
 
지족당장구지소. 지족당 박명부가 지팡이와 신발을 끌며 산책하던 곳이라는 의미로, 농월정 아래 반석 위에 새겨져 있다.
농월정의 계곡은 너른 반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덕유산을 흘러 내려온 계곡물은 반석 사이의 틈으로, 또는 너럭바위 위로 미끄럼이라도 타듯 세차게 흐른다. 그렇게 흐르던 물들 중 더러는 한가로운 반석 위에 연못을 만들며 잠시 쉬어 가는데, 달 밝은 날이면 이 잔잔한 연못에도 달이 뜬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도 월연암(月淵岩)이다.
 
굵어진 빗줄기 앞에서 길을 잃다.
빗줄기가 굵어진다. 더 이상의 여정은 무리일 듯싶다. 완주가 코앞인데... 아쉬운 마음 크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나마 거연정에서 농월정까지 이어지는 화림동 계곡의 주요한 정자와 여유로웠던 길을 걸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내일은 신라시대의 최치원 선생이 함양(옛 지명은 천령)군수로 재직할 적에 방풍(防風), 방수(放水) 목적으로 조림하였다는 천연기념물 제154호, 함양읍에서 지척인 상림(上林)숲을 걸어야 할 것 같다.
상림숲의 꽃무릇이 소담스레 피었다. 함양군청 제공
※ 함양 선비문화 탐방로 가는 길

- 대중교통
함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안의면정류장에서 서하방면 버스를 갈아타고 봉전정류장에서 하차 (1일: 15회 운행) <함양버스 (055)963-3745>

- 먹거리
함양 안의면 소재지의 안의갈비찜과 갈비탕이 유명하다. 농월정 관광지의 산채정식도 좋고, 근처의 초계탕집도 추천할 만하다.


▶ [라이프] ‘선비’를 다시 생각하다 - 함양 선비문화 탐방로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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