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하로밤
나그네 집에
가마귀 가왁가왁 울며 새었소
오늘은
또 몇 십리
어디로 갈까
산으로 올라갈까
들로 갈까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오
(하략)
나그네 집에
가마귀 가왁가왁 울며 새었소
오늘은
또 몇 십리
어디로 갈까
산으로 올라갈까
들로 갈까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오
(하략)
김소월의 시 <길>의 부분이다. 길을 떠난 나그네의 외로운 심사가 아릿하게 스미듯 느껴져 온다. 오라는 데는 없지만 어디론가 가야하는 나그네의 설움이라니... 유치환이 파도를 두고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고 절규하던 그 맘과 꽤나 닮아 보인다. 사랑에 목마른 그와 가야 할 곳이 필요한 그는 그렇게 시 안에서 울부짖거나 조용히 울거나... 그 안타까운 마음을 뉘라서 알 것인가.
다만 비오는 날, 그 비를 맞으며 걷다보면 어느 정도는 그 서늘한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조금, 아주 조금은 말이다. 그렇게 그날도 걸을 수 있을 만큼만 비가 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삶이란 결국 ’유랑과 회귀의 반복‘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내 삶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차피 떠난다는 것은, 그렇게 사람이든 다른 무언가를 좇아 세상 속으로 또는 세상 밖으로 나서는 일이면서, 그러다가 또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과정의 반복이며, 그 반복은 결국 삶을 위한 연습이면서 본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돌아갈 그곳을 위해 오늘도 걷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선비문화탐방로의 장점은 계곡의 험한 곳에는 나무 데크로 길을 이어놓은지라 걷기가 편하다는 점이다. 반면에 이러한 장점이 가끔은 단점이 되기도 한다. 땅을 밟으며, 그 땅이 형성하는 높낮이에 따라 굴곡을 느끼며 소요하고픈 그들에겐 더욱 그러하다.
시냇물은 연신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내느라 여념이 없지만, 정자는 저 홀로 고요하다.
세계 3대 트레일 코스인 미국 시에라 네바다산 ‘존 뮤어 트레일’의 주인공인 존 뮤어가 말하듯 ‘최고의 여행 준비는 차 몇 봉지와 빵 몇 덩이를 배낭에 던져 넣고, 뒷마당 울타리를 뛰어 넘는 것’이 아니던가. 그냥 걸으면 될 일이다.
선비문화탐방로를 걸으며 전편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선과 성리학, 그리고 그 성리학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살아갔던 수많은 유학자들을 생각해 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 함양이야말로 좌(左)안동 우(右)함양으로 불리던 유학의 고장이 아니던가.
너무 길구나
3백년 넘어
5백년에 이르는구나
또 과장하고
또 왜곡해도
누가 감히 탓하겠느냐
저 폐허의 17세기
북방 후금과 명 사이
중립으로
등거리로
나라의 위기 맞선 광해군
그를 내쫓을 때
그 명분
대명천자를 배신함 그것
이 시대의 극(極)으로부터
노론 등장
몇차례 고비 잘도 넘겨
조선 후기의 풍운을 몽땅 틀어쥐었구나
그 후예 길구나 질기구나
일제 작위 받았구나
현대사 도처 부귀공명 누리는구나
지겹구나 역겹구나
오로지 후예 이동녕 하나
임정 요인으로 중국 땅바닥 떠도는 순결의 곤궁이었구나
3백년 넘어
5백년에 이르는구나
또 과장하고
또 왜곡해도
누가 감히 탓하겠느냐
저 폐허의 17세기
북방 후금과 명 사이
중립으로
등거리로
나라의 위기 맞선 광해군
그를 내쫓을 때
그 명분
대명천자를 배신함 그것
이 시대의 극(極)으로부터
노론 등장
몇차례 고비 잘도 넘겨
조선 후기의 풍운을 몽땅 틀어쥐었구나
그 후예 길구나 질기구나
일제 작위 받았구나
현대사 도처 부귀공명 누리는구나
지겹구나 역겹구나
오로지 후예 이동녕 하나
임정 요인으로 중국 땅바닥 떠도는 순결의 곤궁이었구나
시인에게도 조선시대의 대표 당파 중 하나였던 노론은 역사의 죄인이었나 보다. 그것도 ’지겹고 역겨울 정도‘로 말이다.
초기 서인 세력들은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학문적 계통을 세웠던지라 10만양병설 등 실용적인 현실정치를 추구하는 세력이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후 그들은 성리학적 명분과 예학(禮學) 중심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그 결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국토는 결딴나고, 백성들은 칼에 찔리고 맞아서 또는 굶어서 죽었으며, 또 60만으로 추정되는 어마어마한 수의 백성들은 청나라의 노예로 끌려가야 하는 굴욕의 역사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화냥년(還鄕女)과 호로자식(胡盧子)으로 불리는 그들이 그렇게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온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 아니던가.
“어디 그뿐인가. 우리나라가 명나라를 섬겨온 지 2백년이 지났으니 의리에 있어서는 군신간이지만 은혜에 있어서는 부자 사이와 같고 임진년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선왕(선조)께서는 40년 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셔서 평생 한 번도 서쪽을 등지고 앉으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광해는 은덕을 저버리고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오랑캐와 화친하였다. 천리를 멸절시키고 인륜을 막아 위로는 중국 조정에 죄를 짓고 아래로 백성들에게 원한을 사고 있는데 이러한 죄악을 저지른 자가 어떻게 나라의 임금으로서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으며 조종의 보위에 있으면서 종묘사직의 신령을 받들 수 있겠는가. 이에 그를 폐위시키노라.”
그들에게 중국, 특히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의 나라인 송(宋)나라와 그 송나라를 계승한 명(明)나라는 아비와 다름없었던 것이다. 아비를 섬기는 마음이 지나쳐 제 몸인 나라와 자식과 같은 백성을 파멸의 길로 내몰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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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이든 저 길이든 멀고도 험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겁다.
자못 빗줄기가 굵어지는 터라 걸음을 서둘러야 할 것만 같다. 계곡이 내(川))를 이루고, 그 시냇물 속으로 하염없이 떨어지는 빗줄기는 행인의 머리 위로도 그 굵기를 더하며 제법 떨어진다.
우산을 펼쳐드니, 또 어쩌면 운 좋은 행락객이 된 느낌이다. 이렇게 분위기 있는, 또 운치 있는 걷기를 어딜 가서 또 경험해 볼 수 있을 것인가. 고향땅이 돌아온 탕자(?)인 내게 준 선물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바로 그 오디가 땅바닥에서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저 홀로 뭉개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새삼 세월의 무상함과 그 세월의 변화가 가져온 오디에 대한 무관심이 조금은 아쉽기만 하다. 오디를 따겠다고 훠이휘이 산과 들을 헤매던 그 시절의 추억을 이제는 어디 가서 경험을 한단 말인가. 풍족한 먹거리가 가져온 역설이 아닐까 싶다. 이런 내 이야기에 내 처와 아이는 또 호랑이 담배피던 소리 한다고 뭐라 하겠지만... 여하튼 그렇다.
이 어도를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는 어떤 사연이 있어 이 멀고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는 것인지 새삼 궁금하여진다. 흔히들 귀소본능(歸巢本能)이란 단어로 뭉뚱그려 설명하지만, ‘재들은 원래 그래’라는 말로 퉁치기에는 그들의 운명적 노력이 과소평가되는 느낌이라 무언가 그들의 노력을 달리 표현하고자 하지만, 과문한 탓한 달리 떠오르는 무언가 없는지라 아쉬울 따름이다.
길은 도로로 이어진다. 얼마 걷지 않아 만나는 다리 아래로 계곡의 물은 그 폭을 넓혀가며 강으로 바다로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내 길은 다시 계곡을 따라 이어지고, 그 길은 나무데크로 만들어져 있는지라 걷는 것이 수월하기 그지없다. 하류로 내려올수록 계곡의 폭이 가히 작은 강 수준이다. 1,000여 평의 암반으로 이루어진 계곡의 풍광 또한 수려해진다. 황석산에서 흘러온 물이 보태어지니 물소리 또한 우렁차다.
그 암반의 너른 계곡 너머로 농월정(弄月亭)이 보인다. ‘달을 희롱하는 정자’라... 이름이나 정자가 품고 있는 계곡이나 가히 화림동 계곡의 대표 정자가 아닐까 싶다.
농월정은 조선 선조 때 관찰사와 예조 참판을 지낸 박명부가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정자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팔작지붕 2층 누각형태로 지어졌지만, 아쉽게도 2003년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지금의 정자는 2015년에 복원된 정자인지라, 그 고풍스러운 자태를 찾을 길은 없다.
길 옆에 있는 별천지의 그윽한 곳을 누가 알리오
산은 빙 둘러 있고 물은 머무는 듯하네
선돌을 비친 못의 물은 맑고도 가득차고
창에 찾아든 푸른 기운은 걷히다가 다시 뜨네
주린 아이 죽으로 입에 풀칠하여도 화내지 않고
손님이 와서 집에 머리를 부딪쳐도 싫어하지 않네
노는 사람들 일 없다 말하지 말게나
늙어서 멋대로 속세를 떠나니 또한 풍류일세
산은 빙 둘러 있고 물은 머무는 듯하네
선돌을 비친 못의 물은 맑고도 가득차고
창에 찾아든 푸른 기운은 걷히다가 다시 뜨네
주린 아이 죽으로 입에 풀칠하여도 화내지 않고
손님이 와서 집에 머리를 부딪쳐도 싫어하지 않네
노는 사람들 일 없다 말하지 말게나
늙어서 멋대로 속세를 떠나니 또한 풍류일세
내일은 신라시대의 최치원 선생이 함양(옛 지명은 천령)군수로 재직할 적에 방풍(防風), 방수(放水) 목적으로 조림하였다는 천연기념물 제154호, 함양읍에서 지척인 상림(上林)숲을 걸어야 할 것 같다.
- 대중교통
함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안의면정류장에서 서하방면 버스를 갈아타고 봉전정류장에서 하차 (1일: 15회 운행) <함양버스 (055)963-3745>
- 먹거리
함양 안의면 소재지의 안의갈비찜과 갈비탕이 유명하다. 농월정 관광지의 산채정식도 좋고, 근처의 초계탕집도 추천할 만하다.
▶ [라이프] ‘선비’를 다시 생각하다 - 함양 선비문화 탐방로 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