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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why] 평창의 별을 꿈꿨던 '비운의 스타'…노진규를 아시나요

[평창why] 평창의 별을 꿈꿨던 '비운의 스타'…노진규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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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why] 한국 쇼트트랙 역대 최고의 명경기 (1) - 김기훈부터 전이경까지
▶ [평창why] 한국 쇼트트랙 역대 최고의 명경기 (2) - 안현수부터 심석희까지

※ SBS 뉴스가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평창why' 시리즈를 선보입니다.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동계올림픽을 맞아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이 보여줬던 땀과 눈물, 감동의 순간과 함께 알고 보면 더 재밌는 평창 동계올림픽 소식을 생생하게 전해 드립니다.<편집자 주>

세계 최고의 쇼트트랙 강국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한 대한민국 쇼트트랙은 20년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스타 선수들을 배출했습니다. 4개의 동계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건 '쇼트트랙의 여왕' 전이경을 필두로 남녀 종목 모두에서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월드컵 시리즈를 휩쓸었습니다. 한국 쇼트트랙 대표팀은 꿈의 무대인 올림픽에서 7차례에 걸쳐 42개의 메달을 휩쓸며 세계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장 찬란하게 빛나던 시기에 꽃을 미처 다 피우지 못하고 떠난 선수가 있습니다. 선수로서 기량이 만개할 불과 24살의 나이었습니다. 2011년 혜성처럼 등장해 남자 세계 쇼트트랙 무대를 평정했던 고(故) 노진규 선수입니다.

■ "남자 쇼트트랙에 샛별이 나타났다"…혜성처럼 등장한 노진규

노진규는 9살에 스케이트 선수였던 누나를 따라 스케이트화를 신었습니다. 빙판에서 속도를 내며 질주하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잠재력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폭발했습니다. 뛰어난 체력과 스피드를 바탕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과천중학교 시절 주니어 국가대표 상비군에 발탁됐습니다. 노진규는 2010년 세계주니어 선수권대회에서 남자부 개인 종합우승을 거머쥐며 세계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습니다. 강철같은 체력으로 순식간에 힘을 쏟아내는 폭발적인 주파력은 한국 남자 쇼트트랙에 신성이 나타났음을 알리기에 충분했습니다.

노진규는 2010년 10월 태극마크를 단 뒤 곧바로 성인무대마저 휩쓸었습니다. 고등학생이던 노진규는 그해 말에 열린 국제빙상연맹(IS) 쇼트트랙 월드컵 4차 대회에서 남자 1,000m에 이어 1,500m에서도 독보적인 기량으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계주에서도 금메달을 추가한 노진규는 남자 대표팀 가운데 유일하게 3관왕에 오르며 존재감을 떨쳤습니다. '토리노 동계올림픽 3관왕' 안현수의 뒤를 이을 한국 남자 쇼트트랙의 차세대 에이스로 급부상한 시기였습니다.
노진규 평창why
노진규의 전성시대였습니다. 노진규는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열린 6차례의 쇼트트랙 월드컵 시리즈에서 남자 1,500m 금메달을 모두 쓸어 담는 괴력을 발휘했습니다. 1,000m 금메달까지 포함해 8개의 금메달을 휩쓴 노진규는 남자 개인 종목의 최강자로 떠올랐습니다. 2011년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알마티 동계아시안게임에서는 주 종목인 남자 1,500m와 계주에서 2관왕에 오르며 누나인 노선영 선수와 남매 금메달리스트가 되는 기쁨도 누렸습니다. 같은 해 영국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대회에서는 남자 1,000m와 1,500m, 3,000m 슈퍼파이널까지 모두 휩쓸며 사실상 세계 최고의 선수로 군림하게 됩니다. 세계랭킹 1위 노진규를 따라 올 선수는 없었습니다. 대표팀에 막내로 승선한지 불과 1년 밖에 되지 않던 스무 살 청년 노진규의 거침없는 질주였습니다.

■ 선배이자 우상이었던 안현수…전·현직 쇼트트랙 에이스의 맞대결

19살에 국가대표 에이스로 떠오른 노진규에게는 안현수라는 걸출한 선배가 있었습니다. 7살 위인 안현수는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남자로서는 전무후무한 3관왕을 달성한 간판 스타였습니다. 안현수는 그러나 2008년 훈련 도중 무릎 뼈가 부서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으며 선수 생활에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부상에 재활로 고통 받던 안현수는 2009년부터 세 차례에 걸친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모두 탈락한 뒤 2011년 여름 러시아로 귀화하겠다는 뜻을 밝히게 됩니다. 그리고 러시아 대표팀에 들어가 국제무대에 도전장을 내게 됩니다.

한국 쇼트트랙의 대들보였던 안현수가 러시아의 빅토르 안이 된 2011년은 노진규에게 최고의 전성기였습니다. 노진규는 2011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쇼트트랙 월드컵 4차 대회 남자 1,500m 결승에서 2분09초041의 기록을 세우며 8년 동안 안현수가 지켜오던 세계신기록을 갈아 엎고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선수가 돼 있었습니다. 노진규는 한국체육대학교 선배이자 우상이었던 안현수와 맞대결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2008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처음 만났지만 안현수의 부상으로 제대로 된 대결을 하지 못했던 두 선수는 4년이 지난 2012년 2월 모스크바 쇼트트랙 월드컵 5차 대회 남자 계주 준결승에서 처음으로 맞붙습니다. 그리고 2012-2013년 시즌이 시작되면서 노진규와 안현수의 대결은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2011년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자인 노진규는 새 시즌 1차 대회부터 1,500m 금메달을 가볍게 따내며 산뜻한 출발을 알렸습니다. 안현수는 7위에 오르며 아직 몸이 덜 회복된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안현수는 남자 1,000m에서 예전의 기량을 찾은 듯 완벽한 모습으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안현수는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노진규와 곽윤기를 제치고 여유 있게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화려한 부활을 선언했습니다. 5년 만의 세계 정상 복귀에 주먹을 불끈 쥔 안현수가 후배 노진규의 등을 두드려주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노진규 평창why
노진규는 2차 대회에서도 1,500m 금메달을 따내며 최강자임을 입증했습니다. 러시아로 귀화하면서 자신의 주 종목을 500m와 1,000m로 바꾼 안현수는 6위에 오르며 노진규가 평정한 과거 자신의 주 종목을 향해 시동을 걸었습니다. 3차 대회 1,500m에서도 노진규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4차 대회는 안현수의 차지였습니다. 1위 신다운이 실격하면서 노진규보다 먼저 들어온 안현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안현수는 귀화 뒤 국제대회 1,500m에서 처음으로 정상에 오르며 노진규의 국제무대 12개 대회 연속 금메달을 저지했습니다.

안현수는 경기 직후 "이번 1500m에서 우연찮게 내가 금메달을 땄지만 진규는 여전히 훌륭한 선수이다. 이런 실력 있는 후배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한국의 쇼트트랙이 건재하다. 함께 선의의 경쟁을 펼칠 것이고 내 존재가 후배들한테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는다"라며 노진규에 대한 존중과 애정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노진규는 안현수와 경쟁하며 이듬해인 2013년 2월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5차 대회와 독일 드레스덴에서 열린 6차 대회에서도 1,500m 금메달을 거머쥡니다. 노진규의 시대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습니다. 2014년 소치올림픽까지 정확히 1년이 남은 시점이었습니다.

■ 심각한 부상에 어깨 종양까지…그럼에도 출전 강행했던 숨은 이유

최고의 기량을 과시하던 노진규는 2013년 4월 소치 동계올림픽에 출전할 국가대표를 뽑는 선발전에서 예상치 못한 성적을 거둡니다. 종합 성적 3위로 선발전을 마친 겁니다. 대표선발전 규칙에 따라 노진규는 학수고대하던 소치올림픽 쇼트트랙에서 계주에만 출전하고 개인 종목에는 나가지 못하게 됐습니다. 부동의 에이스였던 노진규에게는 충격적인 결과였습니다. 노진규는 그러나 주저앉지 않고 계속 달렸습니다. 계주 밖에 출전할 수 없었지만 월드컵 시리즈 개인전의 성적에 따라 대표팀에 소치올림픽 출전권이 주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해 9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2013-2014년 쇼트트랙 월드컵 1차 대회 남자 1,500m에서 노진규는 안현수와 캐나다의 찰스 해믈린을 꺾고 다시 한 번 금메달을 목에 걸며 건재를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경기 도중 찰스 해믈린과 부딪히면서 왼쪽 어깨를 다친 겁니다. 노진규는 대회를 끝까지 치르지 못하고 조기 귀국했습니다. 악재는 한꺼번에 찾아왔습니다.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노진규의 왼쪽 어깨에 6cm 크기의 종양이 있다는 것이 발견된 겁니다. 노진규는 그러나 소치올림픽 이후로 수술을 미뤘습니다. 꿈에 그리던 올림픽이 이제 불과 5개월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굳어져 오는 어깨로 힘들어하던 노진규는 소치올림픽 개인 종목에 출전할 수 있는 자격이 없었음에도 그해 11월에 열린 월드컵 3차 대회와 4차 대회 개인종목에 출전했습니다. 4차 대회에서는 박세영을 대신해 1,000m까지 출전했습니다. 대표팀이 시즌 세 차례 월드컵에서 개인전 출전 우선권이 있는 신다운과 이한빈, 박세영을 1,000m에 출전시켰는데 3차 대회에서 박세영이 44위로 부진해 노진규를 긴급 투입하게 된 겁니다.

세 선수 모두 20위 안에 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노진규는 분골쇄신했고 1,500m 준결승을 1위로 통과하며 자기 몫의 남자 1,500m 출전권을 대표팀에 안겼습니다. 1,000m에서도 조 1위로 가볍게 예선을 통과하며 올림픽 출전권을 확보했습니다. 대표팀 신다운이 실격으로 40위로 미끄러지면서 소치올림픽 남자 1,000m에는 결국 2명의 한국 선수만 출전할 수 있게 됐지만 노진규의 희생은 분명 값진 것이었습니다.
노진규 평창why
■ 양성에서 악성이 된 종양…못다 핀 노진규의 올림픽 꿈은 이제 후배들에게

스케이트를 놓지 않던 노진규는 2013년 말 이탈리아 트렌티노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남자 1,0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부활을 예고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 뒤인 2014년 1월 예상치 못한 큰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노진규가 태릉선수촌 빙상장에서 훈련을 하다가 넘어져 왼쪽 팔꿈치 뼈가 골절된 겁니다. 소치올림픽 개막을 불과 한 달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염원하던 올림픽 출전은 결국 무산됐습니다. 그러나 더 큰 시련은 따로 있었습니다.

의료진은 노진규의 팔꿈치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어깨의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에 들어갔습니다. 발견 당시 길이 6㎝이던 종양은 13㎝까지 커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왼쪽 어깨 견갑골과 종양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양성 종양이 악성 골육종으로 확인됐던 겁니다. 골육종은 뼈 암의 일종으로 10∼20대 남성의 무릎이나 팔 등에서 가장 많이 발병하는데 실제 환자는 100만 명 가운데 15명 정도만 걸릴 정도로 희귀한 질병입니다. 당시 노진규의 수술을 집도한 원자력병원 전대근 박사는 "견갑골 아래쪽은 골육종이 잘 생기는 부위가 아닌 데다 양성 종양인 거대세포종과 혼동하기 쉽다. 수술하면서도 처음에는 거대세포종이 검출됐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더 깊은 부위를 검사해 보니 골육종이 발견됐다"고 설명했습니다.

노진규는 이후 특유의 끈기와 근성으로 병마와 싸웠습니다. 이듬해인 2015년 1월 병세가 회복되면서 재활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골육종은 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힘겨운 투병 생활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인 2016년 4월 3일 노진규는 빙판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24살의 나이였습니다.

노진규의 사망 소식에 가장 슬퍼한 이들은 동료들이었습니다. 박승희, 심석희를 비롯한 쇼트트랙 대표팀 선수들은 노진규의 빈소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안현수는 "빙판 위의 너는 최고였다. 많이 그리울 거야"라며 함께했던 사진을 올렸습니다. 캐나다 쇼트트랙의 간판스타이자 노진규와 수많은 경기를 함께 뛰었던 찰스 해믈린도 노진규와 함께한 사진과 함께 추모의 글을 올렸고 영국 대표팀의 잭 웰본도 노진규의 때 이른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노진규 평창why
노진규가 세운 남자 3,000m 슈퍼파이널 세계신기록은 세계빙상연맹 홈페이지에 아직도 깨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노진규의 이름 위에 남자 1,000m 세계신기록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선수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대표팀에 막내로 승선한 고등학생 선수 황대헌입니다. 황대헌은 한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롤모델이 누군지 묻는 말에 노진규의 이름을 꺼냈습니다.

황대헌은 "진규 형은 언제나 묵묵히 훈련을 열심히 했던 선배였다. 진규 형을 보면서 자극을 많이 받았는데 그 결과가 나온 것 같다"라며 태극마크를 단 소감을 밝혔습니다. 노진규는 2011년 SBS와 인터뷰에서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서는 게 흔치 않으니까 2018년에 열리는 평창 올림픽에 꼭 한번 서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강도 높은 훈련으로 땀에 흠뻑 젖은 상태였지만 노진규는 평창을 이야기하며 웃어 보였습니다.
노진규 평창why
선수로서 가장 빛나던 22살에 소치올림픽을 눈앞에 두고 꿈을 접었던 노진규는 그토록 염원하던 평창올림픽마저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노진규가 만약 선수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면 평창올림픽이 열리는 내년에는 26살의 창창한 나이가 됩니다. 노진규의 때 이른 죽음이 더욱 안타까운 이유입니다.

못다 핀 노진규의 안타까운 꿈은 이제 평창에서 후배들이 이룰 예정입니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빙판을 달렸던 노진규의 한국 쇼트트랙을 향한 열정과 헌신이 평창에까지 전해지길 기원합니다.

(그래픽 : 김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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