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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선비’를 다시 생각하다 - 함양 선비문화 탐방로 ①

박대영 기자 cyumin@sbs.co.kr

작성 2017.09.19 10:35 수정 2017.10.17 14:21 조회 재생수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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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라이프] ‘선비’를 다시 생각하다 - 함양 선비문화 탐방로 ①
내 고향은
산, 산
그리고 쪽박샘에
늙은 소나무,
소나무 그림자.

눈이 와
눈이 쌓여
장끼는 배고파
까투리를 거느려
마을로 내리고,

눈 녹은 마당에서
듣는
솔바람 소리.

부엌에서 뒤란에서
저녁 늦게 들려오는
어머니 목소리.

<내 고향은> - 나태주
물레방아는 함양을 대표하는 상징 중 하나이다.고향이란 유년 시절의 애틋하면서도 즐거웠던 추억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는 곳이다. 특히나 나처럼 시골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에겐 고향을 떠난 지 수십 년이 흘렀어도  그 흔적들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어쩌다 들른 타향살이 객의 향수를 자극한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깨닫게 되는 고향은 시인의 시처럼, “부엌에서 뒤란에서 저녁 늦게 들려오는 어머니 목소리”가 있는 곳인지라 마음 한 끝이 아릿해지는 아픔 내지 슬픔이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다. 연로한 노모와 마주하는 것은 반가움이면서도 가슴 먹먹한 안타까움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지나는 시간 속에서 늙어가는 육신을 어떻게 해볼 도리야 없지마는, 그렇다고 그러려니 하고 바라볼 수만도 없으니, 그저 마음만 아플 따름이다. 그러함에도 멀고 바쁨을 탓하며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지라, 고향은 늘 스스로의 무심함에 죄스런 마음만 가득한 부채의 장소이기도 하다.
농월정의 모습나의 부채의 장소는 경상남도에 위치한 함양이다. 누군가는 산세가 좋아 살기 좋은 곳이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오지(奧地)라는 표현조차도 서슴치 않는 그 곳. 애써 좋은 방향으로 생각해서 보면, 나는 그 ‘살기 좋은 곳’에서 나고 자랐다. 남쪽으로는 지리산이, 북쪽으로는 덕유산이 자리한, 거창하게는 소백산맥의 고산준령의 틈바구니에 오목하니 자리 잡은 고을이 바로 함양이다. 

사실 지금이야 함양 가는 길이 번듯해졌지만, 대진고속도로 개통 이전에는 그 길이 멀고도 험했다. 얼마 전 작고하신 내 장인께서 오래 전 함양(내 고향은 함양하고도 수동면이다)을 처음으로 방문하신 다음에 ‘자네, 성공했구먼.’ 하셨다. 당신께는 이런 시골에서 나고 자라 서울까지 와서 공부하고 밥 벌어 먹고 사는 모습이 그렇게 보이셨나 보다.
화림동 계곡그 함양의 산과 계곡을 걸었다. 길의 이름은 <함양 선비문화 탐방로>.

덕유산 자락의 수려한 계곡을 따라 이어진 길이다. 그 계곡은 ‘화림동 계곡’이다. 예로부터 화림동 계곡은 8정(亭)8담(潭)이라고도 불리는데, 8개의 정자와 8곳의 소(沼)나 못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름에 걸맞게 계곡 곳곳에는 고풍스런 정자들이 저조차도 풍경인 양 고즈넉이 앉아 있다. ‘선비문화 탐방로’라는 이름조차도 이곳의 정자들이 지어준 이름일 것이다.
선비문화탐방로 4길은 ‘화림동계곡’이라 적힌 표지석 앞에서 시작된다. 

계곡을 향해 걸음을 내딛으면, 이내 그림 같은 풍경 속에 정자 하나가 날아갈듯 널다란 바위 위에 서 있다. 거연정(居然亭)이다. 거연정은 이름 그대로 ‘자연(然)과 더불어 살고(居)’싶은 뭇 사람들의 바람이 담겨 있는 정자이다. 그래서인지 “자연에 내가 거하고, 내가 자연에 거하니 길손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세상일을 잊게 하는 곳”이라는 설명조차도 그럴듯해 보인다.
거연정의 모습거연정은 조선중기 동지충추부사를 지낸 화림재 전시서가 억새로 정자를 지어 머무르던 곳이라 한다. 지금의 정자는 후손들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으며, 거연정이란 이름은 '한가히 내 자연(개천과 돌)을 즐기다‘라는 뜻을 지닌 주자의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이라는 시구에서 따왔다고 한다.

정자에 서면, 덕유산에서부터 먼 길을 내쳐 달려온 계곡물이 내는 소리와 선듯선듯 불어오는 바람에 서로 몸을 부대끼는 나뭇잎의 소리가 어우러져 나그네의 닫힌 마음을 풀어 헤친다. 게다가 날개짓이라도 하는 양 하늘로 치솟은 정자의 처마 너머의 푸르름이 더해지면 눈과 귀는 호강에 겨워 저절로 열리고 만다. 평화롭다는 느낌이 아마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거연정보통의 정자들이 풍경 좋은 곳의 가장자리에 위치하면서 자연을 바라보는 형태인데 비해, 거연정은 풍경 가운데에 자리하면서 자신도 풍경의 일부인 양 앉아 있는지라, 그 도도함이 유별나다. 다행인 것은 그 도드라짐이 거연정의 매력이라는 점이다. 거연정이 들어선 곳은 거연정이 중심에 있기 때문에 그 풍광이 더 빛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기 때문이다. 선인들의 건축 미학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선비문화탐방로 7거연정을 돌아 나오면 <선비문화 탐방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길가에 자리한 탐방로 안내도를 보자, 온통 정자 이름뿐이다. 거연정, 동호정, 군자정, 영귀정, 경모정, 람천정, 농월정, 구로정... 선비문화라는 것이 정자에서 노닐던 풍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정자문화 탐방로’가 맞을 듯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나는 ‘선비’라는 단어에 숨어 있는 그 계급성 때문에 선비문화탐방로라는 이름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도 않는다.
선비문화탐방로 8선비라 하면 대체로 조선시대의 사대부를 일컫는 말인데, 그 사대부들의 유학에 기초한 폐쇄성에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비는 양반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지 않은가. 양반들의 정자에서의 탁족과 음주가무라는 놀이 문화를 아무리 높게 쳐주어 ‘풍류’라는 이름을 붙여준대도 결국 그들만의 놀이이지 않겠는가. 그것이 선비문화라면, 이 길의 이름이 조금은 아쉬워 보인다.

물론 선비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있음도 알고 있다. ‘딸깍발이’로 대표되는 ‘청렴과 강직’의 선비 정신을 떠받들자는 일련의 흐름이 있음도 부인할 수 없고, 나름의 새로운 해석을 내놓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상과 생각을 탄압 내지 말살하고, 계급으로서 행해졌던 역할과 행위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선비문화탐방로 9하지만, 길은 훌륭하다. 녹음이 한껏 드리워진 길은 나무데크로 이어놓아 걷는 일이 가벼운 산책 수준이다. 길의 왼편으로는 높고 낮은 계곡이 흐르고 그 계곡에 담기어진 물은 때로는 부드럽게, 또 때로는 사납게 강으로 바다로 줄달음치고 있었다.
선비문화탐방로 10얼마 걷지 많아 만나는 영귀정의 지붕에는 잡풀들이 원래 그곳이 제 땅이라도 되는 양 맹렬하게 뿌리를 박고 있었다. 영귀정의 쇠락한 모습이 명승지나 문화재로 선택되지 못한 정자가 맞닥뜨리는 운명의 한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길은 다시 나무 데크를 지나고, 이어 들길을 지난다. 길에는 농작물에 손대지 말라는 충고(혹은 경고)가 붉게 눈을 치뜨고 있었다. 아마도 욕심보다는 호기심 많은 손이 농작물을 상하게 했으리라.
선비문화탐방로 12얼마나 더 걸었을까. 세차게 내처 달리던 계곡물이 어느 평평한 너럭바위 곁에서 쉬어갈 무렵, 노인은 긴 장대 끝에 그물을 매어 천렵(川獵)을 하고 계신다. 무엇을 잡고 계시려나. 문득 계곡의 맑은 물에서 유유자적 노닐던 물고기들이 혼비백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얼마나 놀랐을까? 공연한 상상에 웃음이 난다.  
동호정동호정의 옥류담과 차일암노인께서 천렵하시는 곳에서 머지않은 곳에 동호정(東湖停)이 있다. 동호정은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몽진하는 선조를 업고 강을 건넜다는 동호 장만리 선생이 낙향해 머물던 곳으로, 그 후손이 19세기 경 자연암반 위에 지은 정자다. 동호정은 화림동의 계곡의 정자 중에 규모가 가장 크고 화려하다.

특히 동호정 앞은 자연 암반의 우묵한 지형에 따라 세차게 흐르던 화림동의 계곡물이 쉬어가는 곳으로 시내를 이루는데, 이 커다란 담소의 이름이 옥류담이다. 이 옥류담을 너른 품으로 안고 있는 암반의 이름은 차일암(遮日岩)이다.
동호정자연을 벗 삼아 묵향(墨香) 흩날리며 일필휘지(一筆揮之) 시구(詩句)를 적으며 노래하던 선인들의 흔적은 삐걱대는 정자 마루에서나 짐작할 뿐 어디에도 없다. 그나마 그때를 기억하는 담소도, 저 커다란 바위도 워낙 입이 무거운지라 선인들이 탁족(濯足)하던 그때의 이야기를 들을 길도 없다. 다만 그들의 땅에서 일상의 한때를 즐기는 오늘의 향락객만 오락가락 할뿐이다.

(*탁족 -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는 노래에서 따온 말로,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며 노는 선비들의 피서법이다.)
정여창 고택예로부터 함양은 선비(유학자)의 고장으로, 좌(左)안동(安東)우(右)함양(咸陽)으로 불리던 곳이다. 이황의 안동과 필적할 만큼 뛰어난 유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기 때문이다. 함양이 배출한 대표적인 인물이 일두 정여창(1450년∼1504년)이다.

정여창은 사림(士林)파의 중시조격인 김종직의 문하로, 연산군의 스승이었지만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탄핵되고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하지만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신원이 복권되어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종(宗)으로 숭상되고, 이후 1610년(광해2년) 정몽주,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와 더불어 동방5현으로 문묘에 종사하였던 유학자이다.
남계서원함양군 지곡면에는 정여창이 나고 자란 일두 고택(古宅)이 그 옛날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정여창을 배향한 서원인 남계서원(藍溪書院) 역시 잘 보존되어 있다. 남계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에도 존속한 47곳의 서원 중 하나다. 김일손을 모신 청계서원도 함양 수동면에 보존되어 있다.
학사루 전경참고로, 항양읍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최치원 선생이 함양 태수로 봉직할 때 자주 올랐다는 학사루(學士樓)라는 누각이 있다. 이 학사루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 하나는 이곳이 무오사화의 빌미가 되었던 곳이라는 것이다. 사림(士林)의 거두였던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이 학사루에 걸려 있던 유자광의 시를 내리도록 했고, 이에 원한을 품은 유자광이 훗날 김종직의 조의제문(弔意祭文)을 문제 삼아 사화(士禍)를 일으켰으니, 이 사화가 바로 무오사화(1498)인 것이다.

이 무오사화로 인해 김종직을 위시한 정여창, 김일손 등 신진세력인 사림파는 참화를 겪게 된다. 이미 죽은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는 흉액을 겪기도 했다.
선비문화탐방로 18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데없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인지라, 계곡의 물은 그저 고요할 따름이다. 다만, 인걸들이 살다간 흔적들의 일부가 정자로 남아 계곡의 또 다른 풍경이 되어있음은 후손들에겐 선물이다.

계곡을 벗어난 길이 잠시 산자락을 오르다가, 제 갈 길은 결국 계곡뿐임을 고백이라도 하듯 이내 다시 계곡으로 이어진다. 계곡의 이편과 저편을 이어주는 징검다리가 정겹다. 더러는 물이 말라버려 제 목적을 잃은 징검다리도 있고, 겨우 돌무더기 주제에 댐이라도 되는 양 물을 막고선 채로 저 홀로 당당한 징검다리도 보인다.
선비문화탐방로 19선비문화탐방로 19-1결국은 징검다리도 길이었던 것을, 그 길 너머로 솔숲이 보인다. 소나무들은 어쩌다가 이곳에 무리를 지어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 산 아래 개천가에 숲을 이루고 있는 솔숲이 경이로우면서도 반갑다. 행인은 쉬어갈 수 있는 토막의 짬을 숲으로부터 얻는다.

다시 길은 나무데크로 연결되어 있고, 그 나무데크 길의 끝자락에 인삼밭이 있다.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인삼들이 검은 차양막 아래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선비문화탐방로 20길은 논둑길로 이어졌다가, 감자밭을 지나고, 과수원을 지나 마을 어귀에 다다른다. 호성마을이다. 마을 입구 작은 가로수에는 수많은 산악회와 모임들의 리본들이 나부낀다. 다녀간 흔적을 어떻게든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은 나무 하나를 리본으로 에워싸게 만든 것이다. 마치 티벳의 룽타(風馬)처럼 바람이 불면 제 몸을 흔들며 제 존재를 드러내 보지만, 차라리 안타까울 뿐이다.   
선비문화탐방로 21티벳의 오색(五色) 룽따는 ‘바람의 말’이라는 이름처럼, 바람을 타고 하늘을 달려서 부처님의 말씀을 알리고 소원을 이루게 해달라는 염원이라도 담겨 있지만, 작은 나무를 괴롭히는 리본들의 더미에서는 경쟁심과 괴시욕만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과시욕의 결정판이 나타났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가 좋은 자리의 큼지막한 바위에 왠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게 아닌가. 누군가의 이름이다. 새삼 이곳저곳의 경치 좋은 계곡이나 산의 바위에 새겨진 많은 이름들이 떠올려진다. 허긴 만리장성이나 여러 외국의 세계문화유산에도 한글 이름을 적어 놓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소식을 듣는 우리이고 보면, 이마저도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특성이 아닐런지...
선비문화탐방로 22하지만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법치고는 너무 과하고 또 볼썽사납다. 살아가는 세월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나름 이해하려 노력도 해 보지만, 그래도 눈에 거슬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당대의 명필이 남긴 글씨체라면 또 다르겠지만....

저 멀리 길은 숲속으로 달려가고 있다. 숲으로 흐르던 길은 결국은 다시 계곡을 따라 흐르고 만다. 물이 그러하듯 길마저도 계곡을 벗어나지 못한다.
선비문화탐방로 23간간이 듣는 빗방울이 조금씩 흩뿌리기 시작한다. 우중산책(雨中散策)이라... 걸음걸음 사이에 살며시 솟아나던 땀방울이 이내 어디론가 사라지고, 땀방울이 흐르던 그 자리에 빗방울이 스며든다. 오가는 이 하나 없는 개울가에 우두커니 서 있으려니 개울로 낙하하는 빗소리마저 피융피융~ 선율이 된다. 문득 여유롭다는 건 개울가의 바위에 걸터앉은 채 빗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런 처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경모정 전경
다시 길을 걸으니, 너른 반석 위에 경모정이 보인다. 경모정은 고려의 개국공신인 배현경의 후손들이 뜻을 모아 지은 정자로, 화림동 계곡의 정자들이 대부분 19세기 말에 지어진데 비해 비교적 근래(1978년)에 지어진 정자다.

정자에 오르니 그 호젓함이 이를 데가 없다. 마음이 가라앉고 눈이 열리는 듯 머리가 환하여진다. 정자를 세우는 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듯도 싶다. 이 청정한 자연을 두고 누구건 욕심이 나지 않겠는가. 다만 아쉬운 것은 그 욕심이 독점의 한 형태가 아니었을까 하는 염려다.
선비문화탐방로 25또 한편으론 그 욕심이 단순히 자연을 누리는 것이든 독점이든, 그마저도 그들만의 당연한(?) 특권이었다는 사실에 다음 세대의 지적이 있을 수밖에 없다. 토착권력을 지닌 그들에게는 자연마저도 독점하여야 할 대상이고, 그 마음을 실행할 현실적 힘이 있었던 것이다. 또 어쩌면 그들의 리그(토호나 양반사회)에서는 너나없이 세우는(또는 가진) 정자를 나라고 가지지 못할 것이 무언가라며, 그런 경쟁심이 이 화림동 계곡에, 나아가 덕유산 자락의 수많은 계곡들에 이러저러한 정자들이 경쟁적으로 들어서게 된 이유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선비문화탐방로 26그 당시 사림(士林)이라 불리는 일군의 세력들이 내세웠던, 사물에 대한 궁리를 통해 이치에 다가간다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주자학의 방법론은 사물에 대한 궁리보다는 이치에 대한 터득에 주력한 결과, 도덕적 완성으로 군주와 백성에게 봉사하겠다는 사대부의 이념은 퇴화되고 또 타락하고 말았다. 그렇게 그들이 중국의 주희(朱憙,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 이래 떠받들었던 퇴계와 율곡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 이르러 자기 계층의 이익에 철저히 봉사하는 폐쇄적이고 논쟁적인 학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흘러오다 결국 이르게 된 종착점은 왕실의 어른인 대비(大妃)가 상복을 몇 년간 입어야 하는지를 따지는 예송(禮訟)논쟁(論爭) 같은 것이었다.
군자정 전경예송논쟁은 근 20년 동안 이어진다. 문제는 성리학이 실사(實事)가 아닌 이치(理致)를 따지는 예학(禮學)으로 흐르면서 ‘그들만의’ 학문이 되어버렸으니, 통치이념으로서의 성리학은 결국 민중들의 삶과는 괴리된 채 수구사상으로서 그들만의 이념 놀이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조선에는 임금은 있었으되 절대 왕권을 통해 통치를 한 임금은 거의 없었다. 건국 초기 태종 이방원이 수많은 피를 손에 묻혀가며 왕권 강화를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조선은 재상 우위의 국가였고, 그런 이유로 지금으로 치면 내각책임제에 가까운 나라였다. 조선 중반기 이후로는 특히 더 그러했다. 그런데 국가를 운영하는 총리급이하 장차관들이 성리학이라는 하나의 경전만을 절대시하며, 그 경전의 해석에 따른 학풍에 따라 남인이니 북인이니, 서인이니 남인이니 하며 다투고 있었으니, 나라꼴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던 것이다.
선비문화탐방로 28개인적으론 재상 우위의 국가체제가 역사에 범한 최고의 실책은 인조반정, 즉 광해군 폐위가 대표적이라는 많은 학자들의 지적에 동의한다. 특히 역사학자 이덕일은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반정(仁祖反正)이야말로 ‘조선의 운명을 비극으로 이끌어 간 시대착오적인 대표적인 사건’이라며 개탄한다. 이 사건은 성리학을 공부한, 중국(명나라)을 상국으로 여기는 이 땅의 사대부(서인 무리)들이 광해군의 북방 중립정책을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라며 일으킨 쿠데타였다.

쇠락해가는 명나라와 신흥강자인 청나라에 끼인 조선이 선택할 수 있는 외교적 묘책이 무엇이 있겠는가. 현실적인 선택은 등거리(等距離) 외교였지만, 사대부라 불리는 당시의 지배층은 오랑캐인 청나라를 인정할 수 없다며 광해군 정권을 무너뜨리고 만다. 사대사상이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오늘날에도 대상만 다를 뿐 일각에서의 사대사상은 여전하다. 염려스러울 따름이다.
선비문화탐방로 29반정 후 조선은 인조라는 최악의 임금을 맞이하게 된다. 결과는 모두 다 아는 것처럼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참화로 이어지게 된다. 그들이 주장한 명나라를 우대하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친명배청(親明背淸) 정책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조선이 배척 대상인 청나라보다 우위의 힘을 가져야 하는 것이 기본이었거늘, 그들은 주장만 했고, 책임은 힘없는 민초들이 지는 기막힌 상황이 빚어지고 만 것이다.

일부의 왕을 제외한 조선 중기 이후의 역사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들, 사대부라고도 불리고, 또 양반이었으며, 결국엔 선비라고도 불리었던 그들의 이해와 이익을 위해서만 봉사한 세월이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는 토호와 지주들과 결탁해 지주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으며, 소작료 인상을 통해 그들의 배를 불렸다. 그 와중에 국토는 피탈당하고, 그 땅에 사는 민중들의 삶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이 곤궁하였던 시절이 그 시절이었다. 그들이 섬기던 유학에 대한 맹신은 그렇게 일제의 강점이 있은 연후에야 멈출 수 있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거연정 전경그런데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일제에 인한 강점이 이루어지자 두 팔 벌려 환영하면서 일제가 주는 먹이에 환호작약하며, 일가를 보존하고 토호로서 떵떵거리며 산 그들이 바로 당시 서인 계열의 사대부이며, 선비였던 그들이었다.(*김인호, 박훤 공저, <우리가 정말 몰랐던 조선이야기2>)

인조반정 후 정권을 잡은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 계열의 사대부라는 사람들은 소중화(小中華) 사상에 갇혀 있었다. 소중화가 무엇인가? 조선이 작은 중국이라는 말이고, 그들의 중국인 송나라, 명나라가 망했으니, 유학의 대의를 조선이 대신 이어받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렇게 중국이 천하의 주인이며, 조선은 신하의 나라로 항상 군신의 의를 지켜야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그들이다. 세상의 현실과 동떨어진 그들의 학문과 사상, 이를 통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외세의 침략과 부패, 궁핍이라는 재앙을 만들어 내고, 결국 조선이라는 나라를 결딴내고 말았던 것이다.
선비문화탐방로 3119세기말의 중국과 조선이 외세의 침탈에 속절없이 짓밟힌 이유 중 그 첫째가 유학을 섬기던 사람들의 그러한 맹신 때문이라는 주장에 공감이 가는 이유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중국이나 조선에서는 유학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죽이기까지 했으니 어찌 다양한 사상이 싹틀 수 있었을 것인가. 이슬람 원리주의나 기독교 원리주의에 버금가는 유교 원리주의가 시대를 휩쓸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성리학적 탈레반이었다.

그렇게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버렸던 중국과 조선의 운명은 외세의 침탈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는 뻔히 다 아는 바다.
선비문화탐방로 32중국의 학자인 이종오(李宗吾)는 그의 책 <난세를 평정하는 난세학>을 통해, 주자학으로 대표되는 유교적 원리주의를 비판한다.

“(나는) 공자의 인격이 높지 않다거나 그의 학설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공자 이외의 사람에게도 인격과 독창적인 학설을 만들어낼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다. 공자 자신이 우리를 억압하거나 우리에게 다른 학설을 만들지 말라고 말한 적은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후세의 위정자들이 한사코 공자를 앞세우며 모든 것을 억압하고 학자들의 견해가 감히 공자의 견해를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장정일의 <공부>)
선비문화탐방로 33그 위정자들이 선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 시대의 기득권층들이었다. 그러니 내가 선비라는 단어를 좋아할 리가 없는 것이다. ‘강직하고 청렴한‘ 사표로서의 선비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지 않은 다수의 양반이면서 사대부였고, 또 잘 먹고 잘 살았던 그들이 선비라는 단어를 차용하고, 선비라는 단어에 새로운 긍정적인 이미지를 입혀 그들이 행한 수많은 오류와 모순들을 감추려 하고 있다는 의심 때문에 이 선비라는 단어에 거부감과 의구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길은 또다시 이어진다. 저 멀리 정자가 보인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선비문화탐방로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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