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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스페셜] 5·18 헬기 사격, 조종사의 증언 ① 사라진 37년

장훈경 기자 rock@sbs.co.kr

작성 2017.09.15 14:41 수정 2017.09.20 14:01 조회 재생수15,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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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스페셜] 5·18 헬기 사격, 조종사의 증언 ① 사라진 37년
● "내가 분명히 봤다"…"모르고 하는 소리다"

80년 5월 광주에서의 헬기 사격은 거짓이었습니다. 37년 동안 그래왔습니다.
5·18 헬기사격 목격자봤다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고 조비오 신부, 피터슨 목사, 해군 군의관 등 10여 명이 증언했습니다. 목격담은 구체적이었습니다. 날짜와 시간이 특정됐지요. 21일 오후 1시 반부터 5시 사이, 옛 전남 도청 서남쪽 부근 2km 이내 구역에서 가장 많은 목격자가 있었습니다. 27일 새벽에 봤다는 증언도 있었지요.

하지만 증언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군 관계자들이 모두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목격자인 조비오 신부가 허위사실을 퍼뜨린다며 고발하기도 했습니다. 참가 조종사 16명은 ‘단 한 발의 사격도 하지도, 보지도, 듣지도 않았다’는 진술서를 써서 검찰에 제출했습니다. 부대원들의 불신으로 부대 단결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며 조비오 신부가 오히려 진실을 밝히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지휘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목격자들의 주장은 ‘헬기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일축했습니다. 88년 국회 청문회, 95년 검찰 수사 뒤이은 2007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까지 모두 3차례의 5.18 민주화운동 진상 규명 작업이 있었지만 헬기 사격은 밝혀지지 않거나 아예 조사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헬기 사격을 봤다는 사람만 있는 상황, 그렇게 목격자들의 말은 37년 동안 점점 거짓으로 굳어갔습니다.

● 37년 만에 나타난 증거, 전일빌딩 탄흔

상황이 바뀐 건 올해 초였습니다. 2016년 12월 옛 전남도청 앞 전일빌딩에서 리모델링을 위한 내부 점검을 하다 10층에서 탄흔이 발견된 것입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지난 4월, 4차에 걸친 집중 조사를 통해 193개의 총탄 흔적이 헬기 사격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주변에 전일빌딩보다 높은 건물이 없어서 헬기 사격 외에는 가능성이 없다는 게 대표적인 이유였지요.

목격담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너무 늦게 발견된 탓일까요. 군 관계자들은 증거에 아무런 반응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의 허위사실’이라던 헬기 사격이 실은 자행됐다”는 양심고백을 기대했지만 들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전두환 씨는 올 초 대표적인 헬기 사격 목격자인 조비오 신부와 피터슨 목사를 ‘가면을 쓴 사탄’,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며 비난하는 회고록을 내기도 했습니다.

물론 5.18 기념재단 등이 회고록의 출판과 배포를 못하도록 하는 가처분신청을 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조비오 신부 측은 전두환 씨를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광주지검에 고소하기도 했지요. 허위사실 유포자로 고발을 당했던 헬기사격 목격자가 30여 년 만에 상대를 역으로 고소하게 된 것입니다.

● 자위권에 의한 발포?
5·18 헬기 사격, 벌컨포 사격전두환 씨는 회고록에서 6페이지에 걸쳐 헬기 사격을 부인했습니다. 목격자 진술을 인용하고 이를 부인하는 군 지휘관의 검찰 수사기록까지 가져와 “헬리콥터의 기체 성능이나 특성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이거나 계엄군의 진압활동을 고의적으로 왜곡하려는 사람들의 악의적인 주장”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예전 논리 그대로 헬기 사격은 거짓말이라고 쓴 겁니다. 사실 전두환 씨를 정점으로 하는 신군부는 헬기 사격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자위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격이기 때문입니다.

자위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상에서 있었던 발포를 먼저 짚어봐야 합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통해 발포 기록을 정리해봤습니다. 계엄군의 최초 발포는 5월 19일 16시 50분에 일어났습니다.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사이에서 장갑차를 시위대가 공격하자 11공수여단 소속 대위가 M16 소총을 발사해 당시 고등학교 3학년생이 유탄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격은 개인차원의 우발적인 것으로 분석됩니다.

다음날 밤부터 부대 단위의 본격적인 발포가 시작됐습니다. 5월 20일 21시 50분 광주역에서 경계중인 3공수 소속 중사가 시위대 차량에 깔려 사망합니다.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각 대대에 M16 실탄 배부와 장착을 지시했습니다. 3공수 소속 군인들은 시위대를 향한 발포가 이뤄졌다고 시인했습니다.

21일부터는 계엄군의 사격이 본격화됐습니다. 13시 도청 앞 집단 발포가 대표적입니다. 시위대의 장갑차가 공수부대에 돌진해 11공수 소속 병사 한 명이 숨졌습니다. 11공수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50여명이 숨졌습니다. 민주화운동 기간 중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는 여전히 누구의 명령으로 어떤 작전 목적으로 이뤄졌는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계엄군이 자위권을 천명하기 전에 사격이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21일 19시 30분 방송을 통해 자위권 보유를 천명하는 경고문을 발표합니다. 한 시간 뒤에는 실탄 분배를 지시했습니다. 군이 자신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상대를 향해 발포하겠다고 선언한 것인데 21일 낮 도청 앞 집단 발포는 아직 군이 자위권을 공식화하기 전에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전두환 씨는 회고록에서 “자위권은 상급자가 부여하는 권한이 아니다”라며 “군인 스스로 갖고 있는 생존권 방호의 권리”라고 말했습니다. 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에 명령이나 지시가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전 씨의 주장처럼 “21일 도청 앞에서 시민군이 먼저 총격을 가했고 이에 계엄군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발포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실제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발포 전에 시민들쪽에서 총알이 날아들었다는 진술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07년 국방부가 당시 계엄군 사상자 명단을 확인할 결과 21일 도청 앞에서 총상에 의한 부상자나 사망자는 없었습니다.

● 헬기 사격 인정하지 않는 이유

21일 낮 도청 앞 집단 발포도 자위권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헬기 사격은 신군부가 주장하는 자위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대량 인명 살상이 가능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헬기 사격까지 동원했다는 건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학살에 가까운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SBS 기획취재부는 37년 만에 나타난 헬기 사격 목격담을 입증하는 증거에 더해 당시 군 관계자들의 증언과 양심고백을 얻고자 취재했습니다. 실제 취재진이 만난 당시 광주에 출동한 조종사들은 “상부의 지시 없이는 헬기 사격은 절대 이뤄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대체 누가, 왜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 밝히기 위해 국방부 5.18 특별조사위원회도 꾸려졌지요. 앞으로 조종사들의 증언과 군 기록 등을 통해 취재파일을 이어갈 예정입니다. 진실을 규명하는 양심 고백이 꼭 나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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