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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달걀과 생리대의 정치학

정혜경 기자 choice@sbs.co.kr

작성 2017.09.09 12:01 수정 2017.09.09 13:18 조회 재생수1,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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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달걀과 생리대의 정치학
케미컬포비아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케미컬포비아는 화학물질에 대한 공포를 이르는 말입니다. 대한민국을 온통 뒤집어 놓았던 ‘살충제 달걀’ 파동에 이어 이제는 생리대에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생리대에 문제가 있다면 기저귀도 위험할 수 있지 않겠냐는 불안도 최근 더해졌습니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나오는 얘기지만, “믿을 수 있는 게 뭐냐”라는 말, 많이 들었습니다.

식약의약품 안전처, 유통업계를 출입하는 기자들도 한동안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달걀 농가와 가공업체, 공장, 마트를 번갈아 다니며 케미컬포비아의 주인공이 된 여러 제품들의 각 유통 단계 단계마다 각자의 위치에서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 사상 초유의 '무란(無亂)'사태…'3일' 호언한 당국
달걀값 추락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지난달 14일 자정 무렵 갑작스럽게 농림축산식품부가 유통되고 있는 달걀 일부에서 살충제 성분이 검출됐다고 발표했습니다. 출입처를 담당하고 있는 기자들은 모두 퇴근한 상태였고, 야근자들이 부랴부랴 어두운 경기도 일대의 농가를 뒤져 기사를 만들었습니다.

다음날인 15일 광복절, 대형마트 3사가 일제히 달걀 판매를 중단했습니다. 하루 지나 정부가 살충제 성분이 검출되지 않은 달걀 정보를 공개할 때까지 그날 하루는 ‘무란(無亂)절’이었습니다. 그날엔 3일 만에 전수조사를 끝내고 결과를 공표하겠다는 당국의 ‘호언’도 있었습니다. 이 호언 때문인지 며칠 지나지 않아 전체 달걀 수급의 80% 이상이 회복됐습니다.

살충제 파동은 한 달이 지난 지금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됐지만 소비자들의 불안은 쉽게 가시지 않습니다. 한 육계업체에 따르면 이 여파로 생닭 매출도 전년에 비해 20% 가까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번 잃은 신뢰를 회복하기엔 시간이 걸리기 마련입니다.

● "뭘 써야 하나요?"…'친환경' 생리대 품절 사태
면생리대그리고 이젠 생리대입니다. 여성들에겐 생리대가 달걀만큼 소중한 ‘생필품’입니다. 3월 여성환경연대의 발표 이후 생리대 유해성 논란이 기업 간 마타도어로 진행되는 양상입니다. 제품명 공개를 놓고 배후에 특정 업체가 시장을 장악하려는 음모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연일 제기되고 있습니다.

빗발치는 문의에 식약처는 결국 국내 유통되는 생리대 전체에 대한 조사를 벌이기 시작해 이번 달 말쯤 그 결과를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여성 소비자들에겐 현실적인 문제가 남았습니다. 생리예정일은 가까워지는데, 도무지 뭘 써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가장 먼저 각광받는 제품은 일회용이 아닌 ‘면 생리대’입니다. 화학 용품을 사용하지 않고 천연 소재로만 만들어져, 아무래도 이번 유해성 논란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생리대가 아니냐는 것이 소비자들 반응입니다.

소비자들의 수요 폭증으로 한 대형마트의 면 생리대 매출은 생리대 파동이 본격화된 지난달부터 최근까지 매출이 400% 가까이 늘었습니다. 전체 생리대 매출이 30% 이상 줄어든 것에 비해 엄청난 선전입니다. 단 하나, 지금은 재고가 부족해 어딜 가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한 면 생리대 제조사는 밀려드는 주문에 서울에 한 군데 운영하고 있던 오프라인 매장을 임시 휴업하기도 했습니다. (▶관련기사: '생리대 불안'에 면·친환경 제품 불티…대안 될 수 있을까)

● 안전한 생리대를 찾아서…생리대 디아스포라族도

면 생리대 다음으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건 이른바 ‘친환경’, ‘유기농’ 소재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외국산 생리대입니다. 국내에도 물론 ‘친환경’ 딱지를 붙이고 판매되는 제품들이 있습니다.

다만 업계 관계자는 이 ‘순면’ 소재가 ‘커버’, 그러니까 피부와 밀착하는 표면 부분만 해당한 것인지, 아니면 그 속에 내장된 흡수체를 비롯해 모든 소재가 친환경인지를 따져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번 유해물질의 원인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 중 하나도 이 ‘흡수체’입니다. 어떤 이들은 속옷에 생리대를 고정시키는 접착제보다 더 피부에 닿을 가능성이 큰 이 흡수체가 이번 논란의 주원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입소문을 탄 외국산 친환경 생리대도 연일 품절 사태를 빚고 있습니다. 한 소비자는 외국산 생리대를 수입하고 있는 대기업 유통 매장을 세 군데나 찾았지만 모두 재고가 없어 끝내 구입하지 못했다고도 전했습니다.

해외 직구를 이용하는 소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 스웨덴, 핀란드산 생리대를 취급하는 직구 사이트에도 연일 생리대 제품만 ‘품절’ 표시가 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10월 돼서야 본격 국내로 수입되기 시작하는 생리컵도 덩달아 주문 수요가 커지고 있습니다.

● '기민한 대처' 유감, 달걀과 생리대의 정치학

그렇지만 문제는 이렇게 소비자들이 ‘안전하다’고 판단해 수요가 급증한 제품들의 안전성도 누구든 확신할 수 없다는 겁니다. 특히 여성환경연대의 평가 대상도 일부 제품에 불과하고, 유해물질이 검출되었다고 발표한 제품 중에는 면 생리대 특정 제품 한 가지도 포함돼 있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제품들이 ‘완벽한 대안’이라 불리기엔, 아직 부족합니다.

일각에서는 ‘3일 조사’를 호기롭게 장담한 살충제 달걀 파동 때의 당국과 이번 생리대 파동에 대한 대응이 사뭇 대조적이라는 점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물론 ‘3일 조사’가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 유해성 기준조차 없는 생리대와 달걀을 단순 비교할 수만도 없을 노릇입니다.

달걀의 경우에도, 현실적으로 전 국민의 먹을거리를 대상으로 하는 유해성 조사 시한을 ‘3일’로 굳이 못 박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소비자들의 불안감을 덜어내기 위해서였다지만, ‘3일’이라는 단어에서 왜인지 ‘보고서 결재자’에게 과제 완수의 의지를 보여주려고 했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습니다. 3일이라는 단어는 다분히 ‘정치적’입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액션’조차 없는 이번 생리대 파동을 바라보는 여성 소비자들은 씁쓸합니다. “전국 가임기 여성 지도까지 만들면서 저 출산 문제를 걱정하는 국가가, 정작 가임기 여성들의 건강 문제에는 무심한 듯해 착잡하다.” 실제 여성 소비자들의 반응입니다. 적어도 거론되는 유해물질이 인체에 구체적으로 어떤 증상을 일으킬 수 있을지 과학적 인과라도 쉽게 설명해달라는 게 요구사항입니다.

식약처는 위해성조사평가 결과를 9월 말 내놓기로 했습니다. 한 달 가까이 남은 시간, 이 시간을 어떻게 버틸 지는 오롯이 여성 소비자들의 숙제로 넘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