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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중국에서 본 한국 창작 뮤지컬 '빨래'

[취재파일] 중국에서 본 한국 창작 뮤지컬 '빨래'
안녕하세요.정말 오랜만에 취재파일을 씁니다. 중국 연수 기간 동안 많은 글을 쓰리라 다짐했지만, 생각만큼 실천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 예정했던 2년의 기간이 다 되어 한국에 돌아왔고,보도국 국제부로 복귀했습니다. 

중국에 있을 때 중국에 대한 글을 많이 쓰지 못한 건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습니다. 중국 생활 초기에는 제가 다졌던 중국 대학의 일부 교수와 직원의 이해할 수 없는 행태에 분통을 터뜨린 적이 많았습니다. 중국어를 하나도 못하는 상태에서 시작했기에 이방인이 낯선 곳에 정착할 때 겪게 되는 어려움을 곱절로 겪었고, 그래서 중국과 중국인들을 싸잡아 흉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언어를 배워나가고, 중국인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알게 될수록 중국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커졌습니다. 중국에 대해 알면 알수록, 사실은 내가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던 거죠. 그래서 글쓰기도 망설여졌습니다.  

그런데 요즘 국제부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중국 관련 기사들을 접하다 보니 저의 중국 생활이 자꾸 떠오르고, 중국에 대해 좀 얘기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거울 삼아 저의 중국 생활을 되돌아보는 경험을 하게 되니, 거창한 분석이나 해부가 아니라 소박한 방식으로도 중국 얘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사실 요즘 중국 관련 기사 댓글을 보다 보면 중국에 대한 적대감이나 무시를 드러내는 반응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지나치게 감정적이거나 오해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안타까웠습니다. 

중국에서 친하게 지냈던 한국인 유학생 한 명은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나도 중국 흉 볼 때가 많았지만, 중국에서 공부하고 왔다 하면 무슨 오지에서 지내다 온 것처럼 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답답하고 짜증스럽다’고요. 저도 공감하기에 글을 써보려 합니다. 

제가 문화부에 오래 근무했기에 아무래도 그쪽 방면 글이 많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분야 관계 없이 써보려 합니다. 마침 오늘은 한중 수교 2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글 한 편 한 편은 단편적이고 단발적일지라도 이런 조각들이 쌓이면 중국은 어떤 나라인지 중국인은 어떤 사람들인지 조금은 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글을 쓰는 저도, 글을 읽게 되는 여러분도 말입니다.
[월드리포트] 중국에서 본 뮤지컬 '빨래' 1
일단은 중국에서 보고 온 한국 뮤지컬 얘기부터 하려 합니다. 바로 창작 뮤지컬 ‘빨래’(중국 공연명은 洗衣服)입니다. 2005년 서울에서 초연된 ‘빨래’는 서울의 달동네를 배경으로 소시민들의 삶을 그려냅니다. 강원도가 고향이고, 서울에 올라와 야간 대학을 다니다 중퇴하고 불안정한 직장을 전전하며 살고 있는 나영, 그리고 고국의 가족들을 위해 모욕적인 처우도 감수하며 불법 노동자의 삶을 이어가는 몽골인 솔롱고가 주인공이죠. 

뮤지컬은 옥상에서 빨래를 널다가 알게 된 두 사람이 사랑을 키워가는 과정을 따라갑니다. 가진 것 없고 힘 없지만 서로 버팀목이 되어주며 희망을 놓지 않는 달동네 사람들의 이야기가 밝고 사랑스럽습니다. 소극장 창작 뮤지컬의 대표적인 수작으로 지난 2015년에는 일본, 그리고 2016년에는 중국에서도 공연된 바 있습니다. 2017년에는 한국에서 라이선스를 사들인 중국 공연 제작사가 중국 배우를 기용해 중국어로 만든 공연을 올렸습니다. 저는 귀국 전 베이징에서 이 공연을 봤습니다. 
[월드리포트] 중국에서 본 뮤지컬 '빨래' 2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국어로 중국배우들이 했지만 한국 원작에 아주 충실하게 옮긴 공연이었습니다. 무대에 한국어 간판도 보이고, 옹기종기 다닥다닥 건물이 붙어있는 달동네가 그대로 중국 공연장에 재현됐습니다. 한국에 돈 벌러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등장해 ‘한국어 어려워요’ ‘한국말 나 다 할 줄 알아요’ ‘서울 온 지 10년’ 같은 대사를 중국어로 합니다. 

사실 중국어에서 ‘중국어(한어, 한족(漢族)의 언어)’와 ‘한국어(한어, 한국어)’는 성조만 다를 뿐 발음이 같아서 굉장히 헷갈리는 단어인지라, 저는 ‘저 중국어 못해요’를 말한다는 걸, ‘저 한국어 못해요’로 말하는 실수를 종종저지르곤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 역을 맡아서 연기하는 중국인 배우들이 ‘한국어 어려워요’를 중국어로 말하는 광경은 더욱 흥미로웠습니다. 

등장인물 이름의 한자는 그대로인데, 중국식으로 발음해서 조금 달라졌습니다. 나영은 ‘나잉’이 되고, 솔롱고는 ‘송롱가오’가 되었습니다. 나영 역을 맡은 배우를 제외하고는 모든배우들이 쉴새 없이 분장을 바꿔가면서 1인 다역을 소화해내는데, 젊은 중국인 배우들의 연기가 예상했던 것보다 좋았습니다. 언어는 중국어로 바뀌었지만 원작의 정서는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월드리포트] 중국에서 본 뮤지컬 '빨래' 4
[월드리포트] 중국에서 본 뮤지컬 '빨래' 3
물론 100퍼센트 직역은 아니고, 중국어의 특성을 살린 부분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원작에서는 ‘참 예뻐요’라는 노래가 반복되면서 솔롱고의 나영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드러내는데, 중국어 버전에서는 처음에는 (그녀는 참 예뻐요)로, 후반부에는 (당신은 참 예뻐요)로 번역해서 솔롱고의 사랑이 혼자만의 감정에서 상호간의 애정으로 발전했다는 것을보여줍니다. 한국어를 아는 미국인이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한국어 라이선스 공연을 본다면 비슷한 느낌일까, 새삼 궁금해졌습니다.  

사실 저는 ‘빨래’가 중국어로 공연된다 했을 때 원작을 번안해 ‘중국화’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이 공연 프로듀서인 왕해소(중국식으로 읽으면 왕하이샤오가 되지만, 한국에서는 ‘왕해소’라는 이름으로 일하고 있으므로 한국식으로 표기)씨에게 들으니 원래 중국 제작사에서는 ‘번안’, 즉 ‘중국화’를 희망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원작을 충실하게 옮기는 쪽을 택했다고 합니다. 

무대를 중국으로 옮기게 된다면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온 외국인 불법 노동자’라는 설정 자체가 유효하지 않게 되니까요. 물론 중국에 외국인 불법 노동자는 없더라도 고향을떠나 도시에 돈 벌러 온 ‘농민공’은 있습니다만, 이런 식으로 ‘농민공’을 등장시키려면 이야기를 통째로 다 뜯어고쳐야 합니다. 그러면 완전히 다른 작품을 만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빨래’의 매력인 특유의 정서가 사라질 것으로 우려했다는 겁니다.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녔고 한국 공연계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왕해소 씨는 자신의 고향인 ‘난징’을 한국식 한자 발음인 ‘남경’으로 말할 정도로 ‘한국 물을 많이 먹은’ 중국인입니다. 몇 년 전 처음 만났을 때 ‘쓰릴 미’와 ‘빨래’를 중국에서 공연하고 싶다고 했었는데, 이미 ‘쓰릴 미’의 중국어 버전이 무대에 올랐고 ‘빨래’도 이렇게 공연되었으니 꿈을 이룬 셈입니다. 

다만 ‘빨래’의 중국어 공연이 흥행에 크게 성공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공연을 본 날은 주말이었지만 객석이 다 차지 않았고 초대권 관객도 꽤 있는 듯했습니다. 사드로 인한 갈등 때문인지공연 제작사측에서 홍보를 그리 적극적으로 한 것 같지 않습니다. 또 홍보를 하더라도 이 공연의 원작이 한국산이라는 걸 굳이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관계가 좋았을 때라면 한국문화에대한 중국 젊은이들의 호감을 감안해서 원작이 한국 것이고, 한국에서 호평 받은 수작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을 터인데 말이지요. 

게다가 아직은 중국의 뮤지컬 산업 자체가 아직 초창기라 관객층이 탄탄하지 않습니다. ‘오페라의 유령’이나 ‘레미제라블’ 같은, 유명한 대형 해외 뮤지컬들에는 관객이 몰리지만 아직 몇 달씩장기 공연 할 만한 시장이라고 하긴 어렵습니다. 대형 뮤지컬도 이런데 소극장 뮤지컬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공연이 끝난 직후 주역을 맡았던 배우들이 마치 일반인처럼 편한 차림으로 로비에 나와 돌아다녔고, 배우에게 사진촬영이나 사인을 요청하는 관객을 거의 볼 수 없었습니다. 아직 뮤지컬 ‘팬’ 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광대한 중국 시장 규모를 생각하면 중국 뮤지컬 시장은 앞으로 발전할 일만 남아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중국 공연계에서도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 대형 뮤지컬 일변도에서 벗어나 다양한 공연 제작 경험을 쌓고 싶어하는 만큼 한국산 뮤지컬에 대한 관심이 큽니다. ‘빨래’의 중국어 버전 공연에 이어 역시 한국산 뮤지컬인 ‘마이 버킷 리스트’의 중국어 공연도 이번 달 초 상하이에서 무대에 올랐는데요, 이 공연은 상하이의 대표적 뮤지컬 전문극장인 상하이 컬쳐스퀘어가 직접 제작을 맡아 관심을 모았습니다. 

저는 귀국 직전에 개막한 이 공연을 보기 위해 상하이행을 계획했다가 사정이 생겨 가지 못했습니다만, 이 공연을 본 뮤지컬 평론가 박병성 씨의 얘기를 들으니 굉장히 잘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마이 버킷 리스트’의 중국어 공연은 등장인물을 중국인으로 바꾸고 중국색을 가미해서 새롭게 제작했습니다. 또 다른 한국 창작 뮤지컬인 ‘빈센트 반 고흐’역시 중국어 공연이 예정돼 있습니다. 

사실 이런 공연들은 대개 소극장 뮤지컬이라 대형 공연들보다 현지에서 관심을 끌기 힘듭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이목을 끄는 대형 공연이 아니고 작은 공연들이라서 한중 관계가 껄끄러운 와중에 무사히 공연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작은 공연들이라고 그 의미를 폄하할 수는 없습니다. 이 공연을 보는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를 접하게 되는 셈이고, 중국의 공연 제작 관계자들에게도 새로운 공연 컨텐츠로서 ‘한국산’의 가능성을 보여주게 되니까요. 앞으로도 중국에서 더 많은 한국산 공연을 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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