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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쓰촨 취재기 : 하늘에 운명을 맡긴 사람들

[월드리포트] 쓰촨 취재기 : 하늘에 운명을 맡긴 사람들
촉나라 유비와 제갈공명이 활약한 덩샤오핑과 판다의 고향, 불교 4대 성지가 있고, 도교의 탄생지, 마파두부와 훠궈를 먹으며 두보와 이백이 노래하던 곳...이렇게 중국 쓰촨(四川)성을 소개하는 수많은 인물과 풍경이 있지만, 애석하게도 이젠 쓰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대지진일 수 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지난 2008년 8만명이 숨진 규모 8.0의 원촨(汶川)현 대지진을 비롯해 2013년 대지진, 올해 들어서도 지난 5월 마오(茂)현 산사태와 지난 8일 발생한 우리가 흔히 구채구(九寨溝)라고 불렀던 주자이거우 지진까지, 쓰촨성은 지진 악몽의 대명사가 되버렸습니다. 쓰촨성은 지난 100년 사이에 규모 7 이상의 강진이 8차례나 발생했고, 규모 5이상은 163번이나 발생했습니다.
쓰촨 대지진 취재 (정성엽 기자)
인도판과 유라시아판 지각이 맞닿아 있는 곳인 쓰촨성은 이 두 지각판이 충돌하면서 지진 활동이 활발합니다. 그래서 쓰촨성 동부는 광활한 분지 지역이지만, 두 판이 맞닿아 있는 서부는 해발 3000m미터가 넘는 산맥 지형들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청두(成都)시에서 주자이거우로 가는 길은 이 산맥 지형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가는 게 제일 가까운 길입니다. 청두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나오다보면 거대한 칭청산(靑城山)이 병풍처럼 가로 막고 서 있는데, 도교의 발원지이며 쿵푸 팬더의 배경인 바로 그 곳이죠. 도저히 휴대전화 사진으로는 표현할 길이 없는 압도감이 있습니다. 이 칭청산을 지나치는 곳이 청두에서 주자이거우로 들어가는 출입문입니다.
쓰촨 대지진 취재 (정성엽 기자)
지난 2008년 대지진이 발생한 원촨현은 주자이거우로 향하는 초입입니다. 지금은 청두에서 고속도로가 뚫려 있기 때문에 원촨현까진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로 찾아 들어갔습니다. 마침 SUV 차량이었기 망정이지 일반 승용차였으면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도로들을 지나쳤습니다.

산골 곳곳에 터널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어떤 터널은 아직 공사중이었던 모양인지 차량의 헤드라이트 외엔 아무런 불빛도 없는 곳을 통과하기도 했습니다. 길을 잘못 들었구나 싶었지만 터널 안이 너무 좁고 어두워 차를 되돌릴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그냥 햇빛이 보이기만을 바라며 직진할 수 밖에 없었던 곳이었습니다.

5km 정도 되는 이런 터널을 여러 곳을 지나다보니 원촨현 도로로 다시 들어섰고, 그 길들을 따라 들어가니 2008년의 규모 8.0의 대지진 참사 현장이 고스란이 남아 있습니다. 무너진 학교만 해도 1만 곳이 넘고 한 마을의 모든 집들이 산사태 더미에 깔려 생매장이 되버린 참혹한 현장..그러나 원촨현 정부는 그걸 그대로 남겨뒀습니다.

곳곳에 '5.12 대지진 유적'이란 푯말만 세워둔 채 9년 전의 참사 현장을 그대로 남겨뒀습니다. 사실 남겨서 보존했다기 보단 어쩔 수 없이 내버려뒀다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라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더 놀란 건 원촨현 현성(縣城)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로 따지면 '읍(邑)' 정도로 표현하면 될 듯 합니다. 원촨현 읍내는 도로 옆 지진 참사현장과는 완전이 다른 신세계가 펼쳐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고층 건물이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족히 25층은 돼 보이는 아파트 몇 채가 서있었고, 도시에선 3성급 정도는 돼 보이는 호텔도 여러 채가 보였습니다. 여타 도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트도 있었고요, 외식 식당촌도 보였습니다. '뭐도 있고 뭐도 있네.' 라고 일일이 열거하기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당연히 사람 사는 곳인데, 새삼스레 왜 놀라는가?'라고 스스로 반문해 보지만, 이 곳은 지진 활동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곳이고, 언제 무너져 내릴 지 모를 거대한 깎아지른 산이 바로 앞에 서 있는 곳이란 점 때문에 여느 지역과 다름 없는 일상의 모습에 놀라움을 멈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쓰촨 대지진 취재 (정성엽 기자)
원촨현을 넘어가면 마오현입니다. 지난 6월 무시무시한 산사태로 마을 하나가 통째로 사라져버린 바로 그 곳입니다. 산사태로  46가구, 100여명의 사람들이 눈깜짝할 사이에 그대로 묻혀버렸고, 지금까지 생존자 구조 소식은 전해지지 않은 곳입니다.

마오현의 도로는 말 그대로 깎아지른 산맥의 비탈길 도로였습니다. 도로를 타고 마을 깊숙이 들어가면 갈수록 해발 고도는 높아졌습니다. 깎아지른 바위산엔 나무가 많지 않아 곳곳이 산사태로 흘러내린 흔적이 보였고, 도로 옆으로 흐르는 옥빛 하천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맑고 아름다웠지만, 한눈에 봐도 유속이 굉장히 빨라 보였습니다.

한없이 이어지는 바위산 위엔 거대한 송전탑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과연 저걸 어떻게 저런 곳에 설치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니 인간의 위대함과 함께 고단함이 느껴졌습니다.
쓰촨 대지진 취재 (정성엽 기자)
산길 도로엔 곳곳에 산사태 흔적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지나가던 그날 아침에도 작은 산사태로 도로가 일부 매몰되면서 도로 복구할 때까지 한참을 도로 위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도로위 차량들은 주자이거우로 가는 구조 차량도 많았고, 도로가 티벳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였기 때문에 장거리를 달리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트럭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큰 트럭들이 아찔한 산비탈 국도를 달리며 서로 충돌할 뻔한 일을 한 두 번 목격한 게 아닙니다.  

마오현을 넘어 쑹판(松潘)현이나 헤이슈이(黑水)현으로 넘어가면 이때부턴 차도라고 불러야 할까 싶은 길들 투성입니다. 이번 지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기 저기 끊긴 길들이 많았고, 주자이거우로 들어가는 길들은 중국 경찰과 군인들이 가로 막았습니다.

산사태로 다리가 끊겼는데도 그곳을 지나가려는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두 시간 안에 길이 뚫릴 것도 아닌 상황 같은데, 왜 여기서 기다리느냐고 물어봐도 대답은 그냥 기다린다는 말 뿐입니다. 길이 뚫리면 가는 것이고, 안 뚫려도 달리 방법이 없답니다. 사실 되돌아갈 수도, 우회할 수도 없는 길이 태반입니다.
쓰촨 대지진 취재 (정성엽 기자)
해발이 워낙 높은 지역이라 그런지 머리가 아프다는 취재진도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주자이거우 취재를 나갔던 한국 기자들 모두 복통과 설사로 진땀을 뺐습니다. 운전에 너무 오래 집중해서 그런 지 코피가 터진 취재진도 있습니다.

GPS가 안 터지는 건지, 바이두 지도가 엉뚱한 곳을 가르키는 경우가 가면 갈수록 더 많아졌습니다.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가 터지지 않은 지역이 있는 건 그나마 반가웠습니다 ^^. 취재 기자들끼리 전화를 하며 서로 안부를 물어가며 우여곡절 끝에 주자이거우 현까지 다다랐습니다. 운이 좋은 사람은 이런 길을 20시간을 헤맨 뒤 주자이거우 관광구역까지 도착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운은 나에겐 없었습니다. 험한 길은 어떻게 어떻게 버텼지만, 중국 당국의 철저한 통행금지 통제까지 뚫을 운까지는 없었습니다.

주자이거우 지진 현장을 향하는 길 내내 스스로 마치 한마리 개미가 된 듯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거대한 흙더미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개미..목적지까지 어떻게 가야하는 건지, 이 길이 맞는 건지, 주변만 맴돌고 있는건 아닌지, 흙더미 위에서 그저 앞만 보고 전진하는 개미말입니다.

정처없이 헤매고 돌아다니다 혹시 돌더미가 떨어지는 건 아닐까? 폭우라도 내리면 어쩌지? 아님 큰 트럭들과 부딪혀 굴러 떨어진다면..워낙 차 속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이런 쓸데없는 상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이내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에이, 그냥 운명이지 뭐.." 걱정한다고 무슨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문득 이런 마음은 나 혼자만의 결론은 아닐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촨현 15층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도, 산사태로 옆 동네 마을 전체가 사라졌어도 오늘도 꿋꿋이 살아가는 마오현 주민들도, 지진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천막 생활을 하고 있는 주자이거우현 주민들도 나같은 마음이 아닐까? 자신들의 운명을 하늘에 맡긴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지진과 산사태 참사를 겪은, 지금도 겪고 있는 쓰촨 주민들의 일상은 놀랄만큼 평온했습니다. 주자이거우를 찾아가고 있다고 말하니, 일생을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평생동안 딱 한번 찾아가는 나에게 위로를 하고 걱정해줬습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길이고 산인데, 내가 가면 위험하다면서 자신들이 가면 괜찮다고 합니다.

취재기간 내내 돌더미라도 쓸려 내려오면 어쩔까라며 노심초사하던 나와 달리 그들의 일상은 그냥 여유로웠고 달관한 듯 보였습니다. 길이 막히면 기다리고..오래 막히면 그 자리에서 음식을 차려먹고, 아이들과 즐겁게 기다렸습니다. 그냥 그게 그들의 일상이었습니다. 무지막지한 자연의 위력을 보러 갔던 이번 주자이거우 출장에선 나는 그보다 더 의연한 인간의 크기를 배우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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