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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위안부' 김군자 할머니 별세…"모든 걸 다 주고 가셨다"

[리포트+] '위안부' 김군자 할머니 별세…"모든 걸 다 주고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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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생존자, 용감한 증언자이셨던 김군자 할머니. 지난 2015년 12월 31일 나눔의 집에서 할머니를 뵈었을 때 '피해자는 우리'라고 말씀하셨던 그 모습을 기억합니다. 이제 모든 고통을 내려놓고 하늘에서 평안하십시오." -문재인 대통령 페이스북 //" data-captionyn="N" id="i201074059"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70724/201074059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가 어제(23일) 오전 8시, 향년 91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빈소에 근조 화환을 보내고 페이스북에 "강인한 생존자, 용감한 증언자였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강경화 외교부장관 조문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직접 김 할머니의 빈소를 찾아 깊은 애도를 표하고 유족들을 위로했습니다. 또한,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을 비롯해 이재명 성남시장, 박원순 서울시장 등 고인을 애도하는 각계의 조문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 김군자 할머니의 왼쪽 귀를 앗아간 위안부 생활

지난 1926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난 김군자 할머니는 부모를 여의고 친척 집에 살다 17세이던 1942년 중국 지린(吉林)성 훈춘(琿春) 위안소로 끌려갔습니다. 김 할머니는 위안소 탈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붙잡힐 때마다 일본군에게 구타를 당한 김 할머니는 이 과정에서 결국 고막이 터지는 바람에 왼쪽 귀 청력을 잃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위안부 생활에 김 할머니는 3년 동안 7번이나 스스로 생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김 할머니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38일을 꼬박 걸어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당시 함께 강을 건너던 친구 1명이 강물에 떠내려가 죽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죽을 고비 끝에 고향에 돌아온 김 할머니는 위안소로 끌려가기 전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와 생활했지만,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1998년 72세의 나이로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나눔의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김 할머니는 홀로 가사도우미, 노점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왔습니다.

■ "한·일 합의 인정 못 한다"…'여장부' 같았던 김군자 할머니

김군자 할머니는 지난 2007년 2월,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등과 함께 미 하원 외교위원회의 인권 보호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했습니다. 김 할머니는 참혹했던 위안부 생활을 적나라하게 증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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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군자 할머니 / 2007년 미 하원 외교위원회 인권보호 청문회 당시]
"위안부 생활은 내 인생을 영원히 바꿔 놓았습니다. 3년간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맞아 지금도 너무나 많은 흉터가 남아 있습니다. 하루 평균 20명, 많을 때는 40명의 성노리개가 되어야 했고 수 차례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지 못하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로부터 5개월 뒤, 미 하원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해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습니다. 김 할머니의 증언이 "위안부 동원은 잔학성과 규모 면에서 전례가 없는 20세기 최대 규모의 인신매매"라는 내용이 담긴 '위안부 결의안'이 채택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겁니다.

2015년 12월, 박근혜 정부가 한·일 위안부 합의를 체결했을 때도 김 할머니는 "인정할 수 없다"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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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군자 할머니 /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당시]
"피해자는 우리인데, 정부가 어떻게 함부로 합의를 합니까? 우리는 그거 인정 못 합니다. 명예회복과 공식 사과를 받아야 합니다."
이듬해 김 할머니는 일본 정부가 출연한 '화해·치유재단'의 치유금은 받지 않겠다며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나눔의집 관계자는 "여장부였던 김 할머니가 많이 그리울 것"이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 "모든 걸 다 주고 가셨다"…기부 천사로 남은 김군자 할머니

우리는 김 할머니를 '기부 천사'로 기억합니다. 정부로부터 받은 배상금 등을 사용하지 않고 모아, 2000년, 2006년, 2015년 세 차례에 걸쳐 2억 5천만 원이 넘는 돈을 기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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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군자 할머니]
"장례식 비용 500만 원만 남기고 모두 기부할 겁니다."
안신권 나눔의집 소장은 "모든 걸 다 주고 가셨다"는 한 마디로 김 할머니를 기억했습니다. 김 할머니는 생전에 입버릇처럼 "나눔의집 생활을 하며 받은 도움을 갚고 싶다"고 말해온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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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태 앵커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은 일본 정부에게 공식 사과받고 정당한 배상을 받아서 이걸 사회에 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살아계신 위안부 피해자는 37분뿐입니다." data-captionyn="N" id="i201074065"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70724/201074065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기획·구성: 김도균, 장아람 / 디자인: 김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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