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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초등생 목에 흉기 댄 중학생에 "호기심 많아 고의성 없어 보여"…황당 학폭위

-당시 범행장면이 담긴 CCTV 영상

● 생애 가장 끔찍했던 30초

도망갈 곳 없는 엘리베이터 안. 초등학교 5학년 A군은 끔찍한 30초를 견뎌야만 했습니다. 5월 봄날이었습니다. A군은 엄마와 인사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학교에 가려고 탄 엘리베이터엔 중학생 B군이 이미 타고 있었습니다. A군이 타자 B군은 기다리기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재밌는 거 보여줄까”라며 가방에서 30cm 길이의 칼을 꺼냈습니다. A군은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러다 칼이 턱밑까지 밀려 들어오자 몸이 굳었습니다. 너무 긴장했던 탓에 A군은 당시 상황을 잘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한 마디는 기억난다고 합니다. “이거 찌르면 쑥 들어간다”는 중학생 B군의 말입니다. 내려가는 30여초 동안 B군은 A군 주위로 칼을 이리저리 휘둘렀습니다.
당시 범행장면이 담긴 CCTV
칼이 턱 밑까지 들어오는 순간은 A군에게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A군은 사흘 넘게 혼자 끙끙 앓았다고 합니다. 아이가 자꾸 불안해 하고 엄마, 아빠에게 안 내던 짜증을 내니 부모가 이상하게 여겨 왜 그런지 이유를 물었다고 합니다. 아이에게 전후 사정을 들은 부모는 그때까지도 반신반의했습니다. 

빠른 아이들은 초등학교 5학년이면 사춘기가 와서 짜증이 낼 수도 있으니까, 아이들은 사실보다 부풀려 말할 수도 있으니까 사실이 아닐 거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일단 경찰에 신고한 부모는 경찰과 함께 엘리베이터 CCTV를 확인하고 나서야 아이의 말이 진짜란 걸 알게 됐습니다.

● "호기심 많은 학생으로 고의성은 없어 보입니다" 황당한 학폭위

가해 학생 B군 학교에선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가 열렸습니다. 학폭위는 학교 차원에서 자치적으로 사태를 파악하고 대책을 내놓는 자리입니다. 이 중학교 학폭위는 대책을 내놓기 위해 사태를 파악할 때 다섯 가지 기준을 적용합니다. 고의성, 지속성, 심각성, 반성 정도, 화해 정도 입니다. 각 기준에 0점부터 4점까지 점수를 부여한 뒤, 점수가 높을수록 더 강도 높은 처분이 따르게 됩니다. 최소 서면사과에서 최대 강제전학까지 처분을 내릴 수 있습니다.

‘고의성 낮음(1점), 지속성 없음(0점), 심각성 높음(3점), 반성 정도 높음(1점), 화해 정도 없음(4점).’ 주어진 기준에 따라 처분을 내린 이 학교 학폭위 결과 보고 내용입니다. 가장 심각한 학교 폭력에 대해 20점을 부여하는 학교폭력위원회가 가해 학생 B군에 매긴 점수는 9점. B군은 교내 봉사 5일과 학부모 교육 5시간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런 처분을 내린 학폭위 위원들의 평가 근거는 더욱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호기심 많은 학생으로 고의성은 없어 보입니다. 고의성은 0점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가해 학생이 많이 반성하고 있는 것 같으니 반성정도 높음(1점)으로 주면 좋겠습니다.” “심각해 보이니 심각성은 3점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위원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심각해 보이긴 해도 호기심에 그런 일이고 많이 반성하고 있다는, 가해 학생에 치우친 결론입니다.

학폭위 위원들의 면면을 들여다 봅니다. 9명 중 3명은 가해 학생 학교의 선생님, 5명은 가해 학생 학교의 학부모입니다. 외부인사는 경찰관 1명 뿐입니다. 피해 아동 A군의 입장을 제대로 대변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위원 구성에 절차상 문제는 없다는 게 학교측 입장입니다. 학교 측 책임자는 기자에게 이런 말도 했습니다. “장난이었는데 학폭위에까지 불려와야 하는 상황에 대해 가해 학생 측이 부당성을 제기했다”고 합니다. 이 상황을 ‘장난’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게 가해 학생 학교 관계자들의 합의된 의견이었습니다.

● 피해 학생 등굣길엔 여전히 가해 학생이…

피해 아동 A군은 사건 이후 매주 심리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B군은 A군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합니다. 피해 아동인 A군이 알아서 피해 다녀야 한다고 A군 부모는 하소연합니다. 소년범인 데다 구속 사유에 해당하지는 않아 구속하기는 어려웠다는 게 경찰의 설명입니다.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적어도 학폭위에서만큼은 피해 아동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가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피해 아동인 A군 부모가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라고 합니다. A군이 더 이상 가해 학생 B군과 마주치지 않는 일입니다. 최소한 멀리 전학을 보내 이사라도 갔으면 한다고 합니다.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피해 아동 부모의 목소리는 가해 학생 학교 학폭위에선 남 얘기에 불과했던 모양입니다. 가해자를 위한 학폭위가 특정 학교에만 있는 문제는 아닌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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