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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15분만 늦췄어도…" 25년차 베테랑 정비사의 죽음

[취재파일] "15분만 늦췄어도…" 25년차 베테랑 정비사의 죽음
● 안타까운 그날…사고 당시 재구성

2017년 6월 28일 새벽 0시. 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에서 대방역 방향으로 100m 정도 떨어진 선로에서 정비사 7명이 선로 보수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57살 김 모 씨는 그날도 어김없이 다른 정비사 6명에게 열차가 들어오는 지를 알려주는 ‘통제수’ 역할을 맡았습니다.

작업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새벽 0시 13분. 김 씨는 대방역을 출발해 노량진역으로 들어오던 지하철 1호선 ‘0534’번 열차에 부딪혔고, 근처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졌습니다. 경찰의 검안 소견은 ‘다발성 외상’. 목격자들의 진술을 종합해볼 때 열차에 치여 사망한 게 확실합니다. 동료 정비사들은 김 씨가 선로 보수 작업 중임을 알리는 ‘안전 표지판’을 옆 선로에 설치하고 복귀하던 중 다가오는 열차를 인지하지 못해 치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김 씨와 충돌한 열차는 동묘역까지만 운행하는 1호선 마지막 열차였습니다. 정비사들이 작업을 시작한 시간이 자정인 점을 고려하면 불과 15분 정도만 늦게 시작했더라도 이 참담한 사고는 피할 수 있었습니다. 
'15분만 늦췄어도…
● 열차가 다니는 중 진행되는 '상례작업'…예견된 사고

사고가 발생한 노량진역에는 모두 6개의 선로가 있습니다. 4개는 지하철 전용선이고, 나머지 2개는 KTX와 새마을호, 화물열차 등이 다니는 곳입니다. 이날 작업은 KTX 등이 다니는 1개 선로에서 진행됐습니다. 작업을 시작한 0시에는 보수 작업이 실시된 선로 양 옆으로 모두 열차가 운행 중이었습니다. 좌측엔 지하철 1호선, 우측으론 KTX 등이 다니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이렇게 선로 전체를 완전 통제하지 않고 실시되는 보수 작업을 ‘상례작업’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상례작업은 서울교통공사가 관할하는 지하철에선 진행되지 않습니다. 터널 형태인 지하철 선로의 경우 완전 차단하지 않은 상황에선 작업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코레일이 관할하는 선로는 사정이 다릅니다. 노량진역처럼 야외에 놓여있는 선로는 일부 구간에서 열차가 다니더라도 정비사들이 옮겨 다니며 작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코레일 측은 정비 작업을 크게 열차 운행을 일시 중지하고 실시하는 ‘차단작업’과 앞서 설명한 ‘상례작업’으로 분류한다고 설명합니다. 작업의 성격과 규모에 따라 달라지는데 매일 진행되는 선로 보수 작업은 ‘상례작업’으로 해도 무리가 없다는 판단입니다. 일부 구간에서 열차가 다니더라도 작업 선로만 차단하고 사전 승인을 받으면 문제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정비사들은 선로 정비 도중 양 쪽으로 열차가 지날 경우 “숨이 막힐 정도의 공포감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작업이 실시되는 시간이 대부분 불빛에 의지해야 하는 어두운 밤인데다, 열차는 최소 시속 60km로 빠르게 달리기 때문입니다. 잠시라도 정신을 차리지 않거나 딴 생각을 할 경우 언제든 열차에 부딪힐 수 있는 상시적인 위험에 놓여있는 것이 코레일 정비사들의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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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위험한 ‘노량진역’…정비사들 방치한 코레일

선로가 많고 곡선 구간이 지나는 노량진역은 정비사들에겐 특히 위험한 곳입니다. KTX와 ITX, 무궁화호, 누리로, 화물열차에다 지하철까지. 각각 속도가 다른 열차들이 동시에 다니는 상황이라 야간에는 특히 주의가 필요합니다.

철도건설규칙 상 선로 사이 간격은 4m 30cm를 넘어야 합니다. 정비사들의 보행로 안전을 위해섭니다. 하지만 사고 발생 지점은 4m에 불과했습니다. 코레일 측은 “최근에 설치한 역들은 기준에 맞춰져 있지만 과거에 만든 역 중에는 기준에 맞지 않는 곳도 있다”고 해명했습니다.

이 때문에 노량진역 구간을 비롯해 영등포역, 신길역, 구일역 등 6곳 인근의 선로는 작업 위험 구간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노량진역의 경우 곡선이 심하고 대피소가 없으며 선로 사이가 가깝다는 이유로 작업 위험 구간 ‘C등급’으로 분류돼 있습니다.

철도 노조 측은 “위험 구간을 지정해 놓고도 ‘상례작업’을 강행하는 건 빡빡한 열차 운행 일정을 유지해 최대한 수익을 내기 위함”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수익보다 사람이 먼저인 작업 환경이 마련되지 않으면 이 같은 사고는 또 나올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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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전을 외치던 25년차 베테랑

숨진 김 씨는 1993년 코레일에 정규직으로 입사한 25년차 베테랑 정비사입니다. 전국철도노조 전 시설국장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당한 사고와 비슷한 일이 발생하면 현장으로 달려가 코레일 측에 안전 대책을 요구하던 장본인입니다. 동료들은 “누구보다 동료들의 안전을 외치던 김 씨가 정년을 1년 6개월 앞두고 사고를 당했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철도특별사법경찰은 김 씨가 열차를 인지하지 못한 이유 등 현장에서 안전상에 문제가 없었는지 면밀하게 조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서울지방고용노동청은 노량진역 선로정비작업을 열차 운행 중에 중단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열차 안전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다 안타까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열차에 치여 숨진 25년 베테랑…위험에 노출된 정비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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