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인천 삼형제섬을 걷다 ②

▶ [라이프] 인천 삼형제섬을 걷다 ①

썩지 않기 위해
제 몸에 소금을 뿌리고
움직이는 바다를 보아라
잠들어 죽지 않기 위해
제 머리를 바위에 부딪히고
출렁이는 바다를 보아라
(하략)

<바다·3, 이도윤 시(詩)>

시인의 말처럼 잠들어 죽지 않기 위해서건, 길을 막아선 섬을 향한 파도의 울분이건, 섬은 파도의 공격에 자신의 속살을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끊임없이 죽어라 덤벼드는 파도에 섬인들 달리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인가. 그렇게 섬은 깎이고 패여 절벽이 되고, 바위 구릉이 되고, 종내는 모래사장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섬에서의 길은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이어지기도 하고, 바위 구릉을 타고 넘어야 하고, 발이 빠지는 모래사장으로도 이어지는지라, 이런저런 다양한 길이 주는 작은 수고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수기 해안둘레길이 그랬다.

다행인 것은 그 바위를 타고 넘어 앞으로 나아가는 즐거움이 있다는 사실이다. 무릇 이런저런 길을 걷는다는 것은 삶의 다양한 모습과 닮아 있고, 길이 제시하는 도전과 장애물을 극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거친 바위를 타고 넘자, 수기해변이 보인다.

해변은 돌로 쌓은 방파제를 앞에 두고, 조금은 이르게 찾아온 뜨거운 계절이 즐거운 사람들과 시끌벅적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해변의 가장자리로는 울긋불긋 텐트들이 가득하고, 군데군데 고기 익는 냄새가 여행자의 허기를 도드라지게도 한다.

아이들은 썰물의 갯벌에서 무언가를 찾고, 잡느라 호미로 열심히 갯벌을 두드리고, 또 파헤치느라 여념이 없다. 소년은 무엇을 잡았을까? 워낙 진지한 모습이라 감히 물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 길은 수기해안 둘레길로 이어진다

섬을 에둘러 얼마를 갔을까. 전망대가 보인다. 전망대 저 너머로 육지가 보인다. 처음에는 그냥 육지려니 했다. 그런데 수기 전망대의 안내판은 그 육지가 다름 아닌 강화도란다. 조금 뻥을 치면 헤엄쳐서 닿을만한 거리인 것처럼 보이는데 저 너머로 보이는 산이 바로 마니산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강화도에서 이 섬을 과녁 삼아 활을 쏘았다 해서, 화살 시(矢)자를 써서 시도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전망대에서 시선을 돌리자, 저 멀리 신도가 보이고, 모질게 들이대는 파도에게 바지가랭이가 벗겨져 기어이 속살을 드러낸 시도의 부끄러움이 보인다. 지하철 환풍구 위에서 바람에 날리는 치맛단을 붙들던 마릴린 몬로을 닮은 듯 보인다. 억지스럽더라도 그렇게 보였다.^^

길은 산등성이를 따라 숲으로 이어진다. 숲에서 길은 너그러워지고, 여행자는 보물찾기라도 하는 양 한 발 한 발 내딛는 순간순간 다른 모양, 다른 느낌으로 다가서는 길에 취한다. 게다가 은근히 코끝을 간질이는 숲의 향기는 심신을 깨우고, 지친 육신을 일으켜 세운다.

커피가 그렇듯, 사람과의 관계도 '볶는 과정' 속에서 서로 어울리며, 더 나은 향을 발산하게 된다.

묵묵히 앞서가는 친구를 불러 세운다. 표정이 좋다.

문득, '사람들이 맛있는 커피를 만들기 위해 싸우고 투쟁해온 게 아니라, 그냥 즐겨왔기 때문에, 그 '즐김'의 결과로서 우리가 다양한 커피를 맛보게 된 것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일을, 여유를, 오늘을 즐기는 것이 사람의 위대한 성취를 이루는 길'이라는 <행운의 절반, '친구', 스탠 톨러 作>의 구절이 떠오른다.

그냥 즐기는 가운데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성취가 이루어진다는 작가의 충고처럼 나 역시 지금 무언가를 이루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더불어 즐거운 행위로서의 걷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릇 세상의 여러 일 가운데 혼자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 것이며, 결국 산다는 것 역시 결국 누군가와 '더불어 떠나는' 장거리 여행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작가는 나아가 '커피가 그렇듯, 저마다 영혼에 그윽한 향기를 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볶는 과정이 필요하듯, 그렇게 사람과의 관계도 볶는 과정 속에서 서로 어울리며, 그런 결과물로서 서로 더 나은 향을 발산하게 된다.'고 말한다.

커피의 블렌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러 종류의 커피가 서로 섞기고 어울리면서 더 나은, 더 풍요로운 맛이 나오지 않던가. 누군가와의 어울림이야말로 살아가는 일의 근간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더 열고, 더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나무들 역시 서로 어울리면서 서로 기대기도 하고, 가끔은 경쟁도 하면서, 종내는 숲을 이룬다. 숲을 지나자, 수줍은 듯 길 하나가 숲 속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많은 오고가는 발걸음들이 모이고 모여 만들어진 길이라 그런지 반듯하고 또 아늑하다.

길과 잇닿아 있는 밭 하나. 노련한 농부의 밭갈이가 일품이다.

창조자이면서 종합예술인인 농부의 작품을 만나다.

밭 위로 펼쳐진 이랑과 고랑이 만들어내는 질서정연한 선(線)들이 차라리 추상화, 그 자체다. 예술작품의 수준이다. 이랑의 봉우리를 일정한 폭과 높이로 유지하면서도 전체의 구도가 흔들림이 없다. 또 고랑은 어떤가. 반듯하면서도 일정한 깊이의 고랑을 이루는 선이 곧으면서도 유려하다. 작물을 재배할 밭이라기보다는 전위예술이 펼쳐진 화랑처럼 보인다.

새삼 창조자이면서 종합예술인인 농부의 재능과 수고스러움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이 밭에서 자라게 될 농작물은 아마도 더 건강한 먹거리가 될 것이라 짐작해 본다.

마을을 지나자, 울타리를 자처한 모란꽃이 화사하다.

마을을 벗어난 길 아래로 폐가 하나가 잡목더미 속에서 시나브로 쇠락해가고 있었다. 시도초등학교다. 시도초등학교는 1989년도까지 42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난 뒤 폐교되었다고 하니, 근 30여년을 저렇게 방치된 채로 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때는 멀쩡했을 건물과 운동장을 저렇게 방치하고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질 않는다. 다시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길 기대하는 것인지…. 수풀 속에서 녹슬어가는 축구 골대가 애잔하다.

● 길은 모도로 이어진다.

왜 섬 이름은 모도(茅島)였을까?

시도와 모도를 연결하는 연도교 옆으로 작은 섬인 양 소나무 두 그루가 의연하다. 소나무 옆에는 어디론가 달려가는 형상의 조각상이 즐겁다.

모도는 면적이 1평방km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이지만 섬 주변이 모두 좋은 어장이라고 한다. 특히 시도와의 사이에 있는 갯골은 '웬돌끼미'라고 하는데, 곳배(*새우잡이를 하는 데에 쓰는 돛이 없는 바닷배) 어장으로 새우, 우럭, 농어가 많이 잡히던 곳이란다.

그런데, 왜 섬 이름은 모도(茅島)였을까? 그물에 고기는 올라오지 않고 띠(茅)만 걸려 올라온다고 해서 한글로는 ‘띠염’, 한자로는 모도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전설 아닌 전설은 어쩌란 말인가. 여하튼 모도는 모도다.

길은 모도의 '해송숲길'로 이어진다.

늦은 오후로 접어드는 시간인지라, 비스듬히 비치는 햇살에 숲의 저 편이 꿈속같이 아련하다. 여러 시간을 걸은 탓에 몸도 노곤하고 정신조차 온전하지 못해서인지, 혼곤한 육신 앞에 펼쳐지는 빛의 파노라마는 더욱 휘황하고, 귀신에 홀린 듯 걸음은 빛 속으로 빠져든다.

걸으면 발은 저절로 움직여진다.

어쩌다 오늘처럼 도보 여행을 하노라면 저질 체력의 한계와 직면하면서 스스로에게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어쩌랴… 그렇게 생겨먹을 걸 어쩌란 말인가. 그래도 계획대로 걷는다면 이래저래 족히 20km은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걷는다>의 저자인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말한다. 누구나 걸을 수 있다고. 어느 순간까지의 고통만 넘기게 되면 발은 저절로 움직인다고. 도보여행자의 구루이자 끝판왕인 그의 이야기이니만큼 신뢰할 수 있는 말이다.

그가 누구인가.

그는 유수의 신문 기자 생활을 끝낸 다음 해, 예순이 넘은 나이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다. 장장 2,300km에 이르는 길을 걸은 후 걷기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산티아고 길의 마지막 지점에 이르러서는 실크로드를 걸어서 완주하는 최초의 인물이 되고자 하는 꿈을 꾼다.

그의 나이 62살, 드디어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西安)까지 12,000km에 이르는 장도에 오른다. 그 당시(2000년 즈음) 분쟁지역이던 터키,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중국까지, 햇수로는 4년, 1,099일 동안 홀로 걸어 실크로드를 완주한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그는 10여 년 후 75살의 나이에 그가 살던 프랑스 리옹에서 이스탄불까지 3,000여km를 추가로 걸은 그야말로 걷기의 끝판왕이다.

'온 몸을 던져 걸은' 그가 '걷기엔 특별한 비결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은 걷기 위해서 태어났고, 누구나 걸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니 조금 걸었다고 투정대는 모습은 그야말로 어리광인 것이다.

대신, 그는 '걸을 땐 철저히 혼자여야 한다.'고 말한다. '혼자 걸어야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고, 생각도 자유로워진다.'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인간에게는 고독이 필요하고, 홀로 걸을 때 신체균형을 되찾고 사고도 건전해진다고 강조한다. 그에게 걷기는 자신을 되찾는 재충전의 시간이면서, 인간에 맞는 속도를 다시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걷기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이고, 에너지 충전 시간이라는 말이다.

앞으로도 베르나르 올리비에에 대해 말하는 기회는 많을 것이다. 걷는 한 그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길은 '검은돌이' 해변으로 가라 한다.

오목한 해변에는 검은 자갈로 가득이다. 몽돌해안이다. 하지만 그 폭이 좁은지라 기대만큼은 해안의 경관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다만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긴 세월 동안 벌어졌던 섬과 파도가 서로 부딪고 또 부서지는 쟁투의 현장이었음에는 분명하다. 섬의 속살은 바위가 되고, 그 바위는 이렇게 몽돌로 해안을 뒹굴고 있으니 말이다.

모도에서의 길은 산을 따라 이어지는 해솔길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 틈엔가 바닷가에서 서성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중간중간 많은 이정표가 검은돌이 해변, 시든물 해변, 뾰족바위 해변 등으로 자꾸만 유혹하기 때문이다. 이정표를 따라 내려간다는 것은 다시 올라와야 한다는 당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는 유혹에 흔들리지 말자는 다짐 아닌 다짐을 하게도 된다. 서산에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고, 아직도 목적지는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강돌 해변의 유혹에는 살짝 넘어갔다. 여기에서는 박주기(박주가리)까지 해변을 따라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얼마간은 바위투성이의 길을 개척하며 걸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말이다.

이름이 특이한 박주기는 모도의 끝 뿌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모양이 박쥐같이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모도의 땅끝에서 인고의 소나무를 만나다.

이 박주기에 인고의 세월을 이겨낸, 또 어쩌면 지금도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있는 중인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주위로 붓꽃이 아름다운 바위덩이 위에다 뿌리박고 살아가는 소나무의 기상이 감탄스러우면서도 경이롭다.

요즘 같은 가뭄의 계절을 견디기에는 그 딛고 선 땅이 지나치게 척박해 보여서 안타까운 마음까지 인다. 그럼에도 설사 낙락장송은 먼 미래의 꿈일지라도, 작은 몸이나마 잘 부지해 이 모도의 땅끝을 지키는 수호목으로서 오랫동안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해본다.

오늘 여정의 끝이 보인다. 모도제방만 걸으면 우리는 버스를 타고 신도선착장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모도의 명물 중 하나인 '배미꾸미조각공원'은 가보질 못했다.

모도제방의 또 다른 이름도 해당화길이다. 삼형제섬의 제방 길의 이름은 다들 해당화길인 까닭은 긴 제방의 둑 가장자리에 해당화를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공통적인 해당화길의 특징 중 하나는 해당화들이 잡초들과 지난한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끝에 이르기까지 진정으로 살아있고 싶다.'

갯벌 위로는 낮 동안의 조업에 지친 배가 몸을 누인 채 쉬고 있고, 덩달아 새벽부터 이어진 하지 무렵의 긴 여정을 마감하려는 뜨겁던 태양마저 쉴 곳을 찾아 서산을 넘어가고 있다.

짙은 푸른빛이 드리워진 바다 저편으로 발갛게 노을이 익어간다. 머지않아 노을이 지는 가운데, 바다는 먹빛으로 물들어 갈 것이다. 휴식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