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면1.
주인공이 옷장 속에 숨겨놨던 통장을 꺼낸다. 통장을 몇 장 넘겨보고, 모아놓은 돈을 몰래 바라보며 흐뭇해한다.
# 장면2.
주인공은 어려운 일을 당한 친구(악당인 경우도 많았죠)에게 "급한 대로 쓰세요"라며 통장을 건넨다. 옆에서 "아니 어떻게 모은 돈인데…"라면서 반대하지만, 주인공은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많이 나왔던 장면은 바로 이걸 것입니다. 하루 먹고 하루 살기도 힘든, 경제적으로 어려운 주인공의 부모님이 결혼을 앞둔 주인공을 부릅니다. 이 주인공은 경제적 어려움, 혹은 경제적 격차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자식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얼마 안 되지만 결혼에 보태 써라" 그러면서 통장을 건네줍니다.
● 종이통장이 사라진다…2020년까지 단계적 폐지
오는 9월부터 종이통장이 단계적으로 사라집니다. 기존에는 꼭 통장을 발급해줬지만, 이제는 반드시 그럴 필요가 없게 되는 겁니다. 60살 이상 고객이나 통장 발행을 원하는 고객에게는 통장을 만들어주지만, 종이 통장 발행이 원칙은 아닌 것입니다.
"아니, 내 돈 맡겨놓고 그 증거로 통장을 받는 건데, 내가 왜 돈을 내? 그 돈 가지고 은행들이 돈 버는데 왜 내가 돈을 내?"
● 통장은 내가 보관하는 '전산기록'
통장 121개를 보관 중인 71살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통장보다는 쓰지 않는 오래된 통장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왜 이걸 보관하고 계실까요?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은행에 갔다 오면 내가 얼마 있다, 얼마를 거래했다는 게 보면 마음이 푸근해요. 불안하지 않고. 안심이 되죠"
"은행을 어떻게 믿어. 내가 통장에 다 찍어놓고 있어야지"
"은행 컴퓨터가 다 지워지면 어떻게 해? 은행이 내 돈 없었다고 하면 증거가 있어야지"
"통장에 넣은 돈이 찍히는 게 재미있고 좋지"
이유야 모두 다르지만, 통장은 은행 거래에 있어서 너무 당연한 '매개체'였던 것입니다.
● '비용 줄이기'…'종이 통장' 만드는 돈도 아깝다?
은행들이 이런 소비자들의 생각을 모를 리 없죠. 왜 종이 통장을 단계적으로 폐지하는 걸까요? 은행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바일, 인터넷 뱅킹을 쓰는 분이 많아요. 그래서 종이 통장을 쓰지 않는 분도 많고요. 집에 넣어두고 안 쓰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왜 은행은 아직도 통장을 신뢰하고, 통장을 쓰는 분들은 애써 외면하는 걸까요?
바로 '비용 절감' 때문입니다. 통장 만드는 비용, 디지털 장비 가격, 종이 가격, 디자인 가격, 배송 가격, 보관 가격 등을 따져보면 5천 원에서 1만8천 원까지 들어간다는 게 은행들의 계산입니다. 게다가 문제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통장만 없애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은행 지점에 가서, 대기표 뽑고, 직원과 상담하고, 서류에 사인하고, 통장을 받아서 나오는, 일련의 은행업무 프로세스의 중간 과정들이 사라지거나 아니면 비싸지기 때문입니다.
● 사라지는 은행 창구, 줄어드는 ATM
한국은행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4년 전보다 은행 지점이 640여 곳 줄었습니다. 4년 전과 비교하는 것은 그때 가장 많았기 때문입니다. 은행 지점이 줄어든 만큼 은행 창구 숫자도 줄었지만, 그건 집계가 되지 않습니다. 요즘 유난히 은행 가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다면 나름 근거가 있는 '느낌'인 셈입니다.
이렇게 은행 지점을 줄이면, 은행 입장에서는 임대료도 줄일 수 있고, 인건비도 줄일 수 있습니다. 특히 은행은 대부분 임대료가 비싼, 목 좋고 교통이 편리한 곳에 있다 보니까 더더욱 비용을 줄일 수 있겠죠. 그런데 이건 은행 입장입니다.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교통 편한 곳에 있는 은행 창구를 찾아가기가 더욱 힘들어지고, 더 멀어지고, 더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 현실이 된 '디지털 소외'…대책 마련 시급
물론 디지털 뱅킹이 대세이고 큰 흐름입니다. 또 시중은행도 상장된 기업이기 때문에 비용을 줄이고, 이윤을 최고로 추구하는 것에 뭐라고 하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통장을 쓰고, 창구를 찾아가고, ATM을 즐겨 찾는 '디지털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가 크지 않았다는 점은 안타까운 대목입니다.
특히 시중은행은 공공성이 강한 사업장입니다. 정부 지분이 많기도 합니다. 어려울 때 국민 혈세가 투입돼 다시 살아난 은행도 있습니다. 시중 은행이 고객을 외면하고 이윤만 추구한다면 은행을 믿고, 돈을 맡기고, 때로는 지원까지 해준 국민들의 상실감이 얼마나 클까요? 게다가 디지털 소외계층은 비단 고령층뿐만이 아닙니다. 장애인, 저신용층도 마찬가지로 모바일·인터넷 뱅킹에서 소외될 수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금융당국과 은행 모두 '디지털 퍼스트'를 외치며 '미친 속도'로 달려왔습니다. 그게 정글 같은 금융 경쟁에서 유일한 생존의 방법이었을 수도 있겠죠. 그래서 더 여유가 없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금융업도 본격적인 '디지털 금융 세상'으로 넘어가기 직전까지 와있습니다. 혹시 바로 지금이, 잠깐 멈춰서, '디지털 소외계층'과 함께 가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할 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