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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이정현은 어떻게 악역(惡役)에서 주인공이 됐나?

이정찬 기자 jaycee@sbs.co.kr

작성 2017.05.06 19:09 수정 2017.05.06 19:13 조회 재생수13,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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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가 각본 없는 드라마라면 거기엔 당연히 주인공이 있고, 악역도 없을 수 없습니다. 프로농구 인삼공사 가드 이정현은 2017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드라마를 완성한 매력적인 악역이었습니다. 악역에서 주인공으로 거듭난 이정현 선수를 만났습니다. 6부작 드라마, 이번 챔피언결정전 코멘터리(commentary)를 직접 들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농구선수 이정현● 챔프전 최고의 악역 탄생

191cm, 89kg 훤칠한 인물. ‘탈(mask)’이 좋은 배우가 2차전 탈(?)을 냈습니다. 연세대학교 1년 후배 삼성 이관희와 거친 몸싸움을 벌였습니다. 이미 파울이 선언 된 뒤였지만 이정현이 이관희를 밀어 넘어뜨렸고, 이관희는 벌떡 일어나 보복했습니다. 이관희는 바로 퇴장을 당했습니다. 이정현이 챔프전 최고의 악역이 되는 장면입니다. 그 배경에는 몇 가지 씬(scene)이 있습니다.

#Scene 1. 이정현이 신경질적으로 이관희 목을 밀친다.

#Scene 2. 이관희에게 보복 행위를 당한 이정현은 충격이 큰 듯 한동안 코트에 누워있다. 

#Scene 3. (회상씬) 둘은 지난해 6강 플레이오프에서도 거친 몸싸움을 벌인 경험이 있다. 


이정현은 보복 행위로 퇴장을 당한 이관희보다 더 큰 비판을 받았습니다. 시리즈 내내 삼성 팬들은 이정현이 공을 잡으면 야유를 쏟아냈습니다.

이정현은 “살면서 이렇게 욕을 많이 먹어본 적이 있었나 싶다”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척 억울하더라고요. 맞은 건 나인데...”

악역이 된 장면에 대해서도 해명을 했습니다.

#1. “파울 콜이 나온 상태에서 계속 붙어있으니까 그게 좀 짜증이 났어요.”

#2. “제가 바로 일어나 반격을 하면 더 안 좋은 모습이 될 것 같았어요. 벤치에 돌아가 웃은 건 관희가 퇴장당해 좋아서 그런게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였어요. 같은 대학 1년 선후배 사이인데 말이죠.”

#3. “관희는 관희 나름대로 플레이 스타일이 있고, 저도 제 스타일이 있는데. 관희는 막아야 하는 입장이고, 저는 넣어야 하는 입장이죠. 입장이 상충하다보니 감정이 좀 과열 된 것 같아요.”


이정현 선수에게 비판이 집중된 건, 위 장면 때문만은 아닙니다. 평소 이정현 선수가 큰 동작으로 상대 선수 파울을 유도한다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또 큰 소리로 자신이 파울을 당했다고 어필하는 모습을 안 좋게 본 안티팬들은 이정현 선수에게 ‘으악새’ ‘악정현’란 별명을 달고 비꼬았습니다.

“제가 군대 다녀온 뒤 (2014~2015시즌 제대 후 복귀) 플라핑(flopping:일명 ‘헐리우드 액션’으로 의도적으로 수비자 파울을 유도하는 행위)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제가 봐도 제 액션이 큰 건 있어요. 그래도 농구 규칙 안에서 정당하게 하려고 하는 건데, 좀 억울하죠. 파울을 얻어내는 것도 기술이라고 배웠거든요. 다른 선수가 하면 ‘영리한 플레이’가 되는 데 제가 하면 플라핑으로 보이는 거는 아쉬워요. 하지만 고칠 점이 있으면 고쳐야겠죠. 적어도 소리는 좀 덜 내야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이정현 선수 입장에선 ‘내로남불’의 반대인 거죠. 파울 유도가 ‘내가하면 불륜, 남이 할 때는 로맨스’가 된 겁니다. 그럼에도 2차전 이관희 선수와 몸싸움 장면에 대해서는 팬들에게 분명히 사과했습니다.

“챔프전 축제 자리에서, 더군다나 대학교 선후배가 그런 모습을 보여 창피하고 부끄럽습니다.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한 부분은 분명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 악역으로 시작해 주인공으로 끝냈다

악역에게는 야유가 쏟아졌습니다. 2차전, 3차전, 그리고 또 4차전. 이정현이 공을 잡을 때마다 삼성팬들은 “우~”소리를 높였습니다.

“3차전 때 솔직히 경기장 가기가 두렵더라고요. 그래서 희종이 형한테 ‘솔직히 힘들다’고 했어요. 희종이 형이 ‘내가 다 막아줄 테니까 너는 경기에만 신경써라’고 얘기해줬어요. 그런데도 초반에는 야유 소리에 정말 혼이 나갈 정도로 적응이 안됐어요. 다행히 후반이 되니 인삼공사 팬 쪽을 향해 공격할 수 있었고, 저를 응원해주시는 분들 목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제 이름 불러주시는 소리를 듣고 ‘나를 응원해주시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더 힘내서 흔들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렇게 이정현은 ‘반전’을 준비했습니다. 엔딩씬은 그렇게 연출됐습니다.

#엔딩씬. 86대 86. 남은 시간은 5.7초. 이정현이 레이업으로 결승골을 넣는다.

이 장면 직전, 작전 시간. 김승기 감독은 2대 2 플레이를 주문했습니다. 이때 이정현이 감독에게 직접 제안을 합니다.

이정현 : 2대 2하면 스위치 하니까 (어려울 것 같아요)
김승기 : 알았어.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
이정현 : 이렇게 해서 여기서 제가 1대 1 할게요.
김승기 : 네가 혼자하려고? 그래. 알았어. 그럼 세근이가 여기 있다가 돌아.


결국 이정현은 삼성 골밑을 과감하게 돌파해 챔피언결정전을 끝냅니다. KBL 사상 처음으로 선수, 코치, 감독으로 챔피언전 정상에 선 김승기 감독은 이정현을 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워낙 감독님께서 저희 말씀을 잘 들어주세요. 2대2를 하면 세근이를 막던 선수가 스위치해서 저를 막게 될 텐데 그러면 좀 어려울 것 같았어요. 삼성 앞선에 저보다 크고 느린 선수가 있으니 제가 흔들어서 1대 1 하는 게 낫겠다 싶었죠. 자신이 있었어요.”

이정현은 1년 전 6강 플레이오프에서도 똑같은 상대, 똑같은 상황에서 같은 장면을 연출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딱 올라가는 데 던지기도 전인데 ‘아 이건 들어가겠구나’ 느낌이 들었어요. 백코트 하는 데 저도 모르게 막 환호하고 손들고, 정신이 없었어요.”

악역은 주인공이 됐습니다.

“넣는 순간 너무 후련했어요. 저로 인해서 저희 팀 이미지가 악동이 되고, 악역을 맡게 됐잖아요. 저 때문에 여론이 안 좋아졌는데, 또 제가 위닝샷을 넣을 수 있는 기회가 왔고, 그렇게 끝내게 됐고. 참 고마운 상황이었죠.”

이정현은 이번 기회에 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먼저 안티팬에 대해.

“안티팬이라고 해서 저를 인간적으로 싫어하시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제 스타일, 저희 팀 스타일보다는 다른 선수, 다른 팀 스타일을 좋아해서 응원하시는 분들이시고. 제가 변한다고 금방 저를 좋아해주실 분들도 아니신 듯해요. 다만 제가 그 분들도 납득할 만한 플레이를 하고 공정하고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면 그 분들의 야유도 수그러들지 않을까요. 제가 3차전, 4차전에서 좋은 모습 보여드리니까 확실히 그 이후엔 야유 소리도 좀 줄더라고요. 결국엔 좋은 경기력 보여서 안티팬들께서도 별로 하실 말씀이 없도록 하는 게 우선이겠죠. 매너 있게 경기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야유를 뚫고 ‘이정현’ 이름을 연호한 팬들에게

“이번 일을 겪고 확실히 느꼈어요. ‘그래도 지난 시간 농구를 허투루 하지는 않았구나’ 저를 응원해주시는 팬들이 진짜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큰 힘을 얻었어요.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다 저를 좋아하겠어요. 좋아해주시는 분들께 잘 보답해야죠. 제가 열심히 해서 팬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선수가 되는 게 가장 옳은 길인 것 같아요.”

훌륭한 연기로 악역을 맡고도 돋보인 배우가 많습니다. 명작은 그렇게 완성되기도 하죠. 자유계약 선수가 된 이정현의 2017~2018 시즌 드라마는 어디서 어떻게 전개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