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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꽃길만 걷자던 지자체, 시각장애인의 '눈'을 빼앗다

[취재파일] 꽃길만 걷자던 지자체, 시각장애인의 '눈'을 빼앗다
지난 4월 23일 <미관 해친다고 없앤 '눈'…슬그머니 사라진 점자블록> 기사가 보도되자 여기저기서 지자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심지어 '실속보다는 외형에 목숨 거는 나라'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일부 지자체는 억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매년 장애인 복지 증진을 위해 큰돈을 쏟아 붇고 있는데도 욕을 먹었다고요. 하지만, 돈보다 더 중요한 건 소수자와 더불어 살고자 하는 마음가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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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각장애인의 생명줄 '점자블록'
점자블록
본격적인 글쓰기에 앞서 '점자블록'이 무엇인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인도를 걷다 한 번쯤은 노란색 블록을 보신 적 있으실 텐데요. 이게 바로 점자블록입니다. 시각장애인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 위험한 곳은 어디인지 알려주는 중요한 보도 시설물입니다. 점자블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점형블록'이고 다른 하나는 '선형블록'입니다. 점형블록은 원 모양이 튀어나온 블록인데, 위험 감지용으로 이 블록이 나오면 우선 정지를 하게 됩니다. 선형블록은 선 모양이 튀어나와 있는데, 보행 방향을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점자블록은 시각장애인의 '눈'과 같습니다. 이 블록이 없다면 원하는 목적지까지 이동하기가 쉽지 않죠. 차도나 낭떠러지 같은 위험지역도 알려주기 때문에 점자블록을 시각장애인의 '생명줄'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슬그머니 사라진 시각장애인의 '눈'
2017년 04월 23일 8뉴스 서울 동작구 점자블록 철거 자료화면
서울 동작구 사당역과 이수역 사이에는 시각장애인이 자주 왕래하는 지압원이 하나 있습니다. 사당역 10번 출구에서 지압원까지는 직선거리로 500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점자블록이 일직선으로 쫙 깔려 있었습니다. 덕분에 시각장애인들이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죠.

그런데 지난해 10월 이 점자블록이 갑자기 사라져버립니다. 담당 구청이 인도 교체 공사를 하면서 슬그머니 점자블록을 없애버린 것입니다. 인도 끝 부분에만 블록이 남고 중간에 연속적으로 설치돼 있던 블록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점자블록이 사라진 곳은 이곳만이 아니었습니다. 서울 회현역 4번 출구에서 서울역 방향으로 가는 일부 길목에서도 점자블록이 철거됐습니다. 강원도에서도 대전에서도 멀쩡하게 있던 점자블록이 증발해버렸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 서울시 매뉴얼의 '구멍'

처음부터 점자블록이 없었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있던 것을 없애버린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무려 500미터에 달하는 점자블록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서울 동착구청을 찾아가 물어봤습니다. 구청의 답변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했습니다.

"서울시 매뉴얼대로 했습니다."

매뉴얼대로 해서 문제 될 것도 없다니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매뉴얼을 직접 찾아봤습니다. 구청 공무원이 말한 매뉴얼은 2013년 서울시가 발간한 '똑똑한 보도공사 길라잡이-보도공사 설계시공 매뉴얼 Ver1.0'입니다. 선형블록 설치 방법을 설명해 놓은 68쪽을 보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장애물을 피하게 유도하는 경우, 유도 경로가 복잡한 경우, 시각장애인이 빈번하게 이용하는 경우 등에는 선형블록을 연속적으로 설치한다."

이것만 보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실 겁니다. 문제는 바로 뒤에 나오는 표현에 있었습니다.

"유효 보도폭이 2.0m 이상이고, 유효보도폭 좌우로 위험요소가 없는 경우에는 점형블록에 연계해서 통행방향을 잡는 데 필요한 일정한 거리까지만 설치할 수 있다."

구청 관계자가 따랐다는 매뉴얼 내용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인도 폭이 5m가 넘고 특별히 위험한 요소가 없다고 판단돼 선형블록을 제거했다는 것입니다. 시각장애인들은 이 내용이 점자블록의 설치를 방해하는 '구멍'이라고 주장합니다.

● 점자블록은 도시 미관 해치는 '흉물'?

구청 관계자는 다른 얘기도 꺼냈습니다. 인도는 시각장애인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점자블록을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점자블록이 인도를 울퉁불퉁하게 해 보행자나 휠체어를 탄 장애인,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니는 사람에게는 거추장스러울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점자블록의 폭은 30cm입니다. 5m 폭의 인도에서 30cm가 차지하는 비중을 계산해 볼까요? '6%'입니다. 비시각장애인의 보행에 정말 방해가 되는지는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이번엔 서울시청을 찾았습니다. 왜 이런 내용이 매뉴얼에 들어가게 된 건지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서울시는 "매뉴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원칙대로 적혀 있을 뿐이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그러던 중 서울시 관계자의 입에서 충격적인 얘기가 나왔습니다.

"황색이기 때문에 미관 개선이나 도시 디자인 차원에서는 흉물이 될 수도 있어요. 디자인 보도를 까는 입장에서는 (점자블록을) 가급적 안 깔고 싶어 하죠. 구청 공무원들 교육할 때도 그 얘기가 나왔었어요. (설치) 안 하면 안 되겠냐..."
2017년 04월 23일 8뉴스 ‘도시 미관 해친다’ 점자블록 철거 자료화면
쉽게 얘기해서 노란색이고 울퉁불퉁해서 보기가 흉하니 다들 설치를 안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구청 사람들이 서울시에 '저희는 점자블록 안 깔면 안 되나요?'라고 물었다는 건데, 이게 정말 우리 공무원들의 생각이 맞는지 제 귀를 의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갑자기 사라진 점자블록에 시각장애인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요. 시각장애인 홍서준 씨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팔이 없어진 것하고 똑같은 심정이에요. 정말 상실감이 크고 내가 다시 또 올 수 있을까 그런 걱정도 들고요. 익숙한 길이라고 해도 선형블록이 없으면 방향이 틀어지게 되고 이렇게 부딪혀 가면서 다녀야 되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시각장애인 김성욱 씨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인도에는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촉각 뿐 아니라 오감을 곤두세우고 이동하는데 망가진 점자블록이 많고 있던 점자블록이 사라지기도 하고 외출하기가 무섭죠."

굳이 헌법까지 들먹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말이 나온 김에 한 번 읊어보겠습니다.

헌법 제 34조
- 1항.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 4항. 신체장애자 및 질병·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일터로 가는 길, 집으로 가는 길, 연인을 만나러 가는 길. 우리는 행복을 찾아 매일 수많은 길을 걷습니다. 시각장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지겹고 때로는 설레기도 하는 그 길들을 안전하게 걸어야만 시각장애인도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시각장애인 복지는 이것을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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