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라이프] 바다와 역사가 숨 쉬는 길 - 강화 나들길 2코스(호국돈대길) ①

풀밭을 가른 사람에 길
뻘밭을 가른 물길
사이에
접속사처럼 배 한 척 쉬고 있다
(후략)
강화도의 물길 사이에는 접속사처럼 배 한 척 쉬고 있었다.
20여 년 전 우연히 놀러갔던 마니산이 너무 좋아, 그 길로 근처 폐가를 빌려 강화도에 산다는 함민복 시인. 그의 시, <길은 다 친척이다>의 부분이다.

바다를 지척에 두고 사는 이들에게는 너무도 친숙한 풍경이 시인을 만나 그림이 되고, 또 의미가 되어 사람들의 가슴에 수채화 한 폭을 그려놓는다. 하필이면 배는 왜 접속사처럼 쉬고 있었는지…. 시인의 통찰과 감성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길은 더러는 굽은 채로 바다를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길이란 대저 사람들이 살아낸 흔적이며 그 사람들이 움직인 자취이고, 결국엔 사람에게로 다가가기 위한 여정이기에 끊임없이 이어져야 하는 건 당연지사. 가끔씩 물을 만나고, 물 앞에서 주저앉기도 하지만, 기어이 배라는 이름의 또 다른 길이 단어와 단어를 이어주는 '접속사'처럼 길과 길을 이어준다는 사실을 시인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강화나들길은 "어제와 오늘의 삶을 잇고 일과 휴식과 놀이를 잇는다."고 말한다.
4월이 열리는 어느 즈음에 함민복 시인이 노래한 그곳, 강화도의 길을 걸었다.

강화 나들길은 강화도에 14개 코스 175km, 이웃한 섬인 교동도 2개 코스, 석모도 2개 코스, 주문도 1개 코스, 불음도 1개 코스 등 총 20개 코스로, 그 길이는 310km에 이르는 다양하면서도 풍성한 둘레길이다. 마음먹고 걸어도 보름은 족히 걸어야 할 긴 여정인 것이다.

'강화가 품고 길러낸 자연과 땅 위의 모든 것과 연결한 길'이라는 설명이 마음에 와 닿는다. 특히나 '어제와 오늘의 삶을 잇고 일과 휴식과 놀이를 잇는다'는 나들길의 표제 앞에서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강화나들길 2코스(호국돈대길) 코스 지도
내가 걸은 길은 강화도의 여러 길 중 두 번째 코스인, <호국돈대길>.

강화나들길 두 번째 코스의 이름이 '호국돈대길'이 된 이유는 이 코스에 성곽의 한 종류이면서, 전투를 위한 최전선의 요새인 돈대(墩臺)가 유독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대가 많다는 사실은 적의 침탈이 많았던 전장이었음을 알려주는 증표이니 '호국(護國)'이란 단어 역시 당연해 보인다. 

사실 강화도는 고려시대 몽골항쟁 때의 고려 고종 이래, 조선의 인조 등 여러 명의 왕들이 몸을 의탁한 피난지이자 전략요충지였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서는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 운요호 사건(1875년) 등 새로운 문명과의 격렬한 충돌의 현장이기도 했다.  

갑곶 돈대 너머로 강화대교가 김포와 닿아 있다.
길은 강화역사관이 있는 갑곶 돈대에서부터 시작된다.

걸어야 할 여정은 초지진에 이르는 17km 남짓. 뿌연 하늘이 나름 마음먹고 나선 길을 훼방 놓고 있었지만, 기왕 나선 길이니 어쩔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길은 바다를 향해 뻗어 있다.
길이란 이름의 그 '바탕'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떠나야 하는 자리’인지라, 무작정 머물 수 없음에 발을 천천히 떼어놓음으로써 '걷는' 일을 시작한다.  

그렇게 길 위에서 발을 떼어놓으면, 길 밖으로 떨어지거나 이탈도 안 되지만, 집착도 안 된다는 세상의 이치가 저절로 다가오고, 또 체득되는 신기함이 있다.  

그런 이유로, 길은 단순히 '떠나기 위한 자리'이고, 그 떠나는 일이 펼쳐지는 '과정의 터전'인지라, 신발끈을 고쳐 매야 하는 '다짐'의 순간이면서, 떠나야 하는 '이별'의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
길은 단순히 '떠나기 위한 자리'이고, 그 떠나는 일이 펼쳐지는 '과정의 터전'이다.
강화나들길 2코스는 해안을 따라 이어진 길을 걷는 여정이다. 해안둑길을 걷기도 하고, 뻘밭 위로 놓여진 돌길을 지나기도 하고, 더러는 야트막한 산길을 걷기도 하고, 운이 좋으면 갈대숲을 헤치며 걷는 즐거움도 숨어 있는, 나름 호젓하고 운치가 있는 길이다. 하지만 아팠던 격랑의 역사가 길 곳곳에 숨어 있기에 조금은 무거운 여정이기도 하다. 

길의 시작은 도로와 나란히 이어져 있다. 다행인 것은 오래지 않아 길은 바다를 향하고, 길은 바다 앞에서 깜짝 놀라 살짝 몸을 돌려 철길의 철로마냥 서로 엇갈린 채로 한없이 이어진다. 다가가 안을 수 없는 평행의 숙명을 체념하듯 수긍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 바라보기만 할 뿐 길이 끝날 때까지 길과 바다는 서로 닿지 못한다.   
길은 바다와 땅을 가르는 둑이면서, 또 길이 된다.
평행의 숙명이 주는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무심히 해안 둑길을 저 홀로 걷다보면 막막하면서도 아릿한 슬픔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고독의 변형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득히 침잠(沈潛)하는 듯 고요한 마음이 애달프다.

저 멀리 바다 위에서 '접속사'가 되기 위해 쉬고 있는 배처럼, 나 역시 길 위를 부유(浮游)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아마도 길 위에서 문득 문득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순간이 찾아오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렇게 스스로와 대면한다는 것은 간혹 슬픔일 때가 있다. 특히나 살아온 날이 많을수록 그 대면의 순간은 서늘한 아쉬움으로, 또 울음 같은 탄식일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러다 사람들은 그렇게 길 위에서 한바탕 울음 울고 난 후의 개운함으로 자기 자신과 친숙해지고, 걸어 온 길과 걸어가야 할 길의 무게를 자신의 저울에 올려놓으며 안도하기도 하고 재촉하기도 하는 것이다.
스스로와 대면한다는 것은 가끔은 슬픈 일이다.
마침 고장 난 저울 하나가 길 위를 우두커니 지키고 있다. 하필 이 곳에다 저울을 버린 그 마음을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저울을 버린 이의 마음이나, 길을 걷는 내 마음이나 조금은 통하는 점이 있기는 했던 모양이다. 걸으면서 스스로의 마음도 삶의 무게도 재보라는 그 누군가의 충고가 가볍지 않다. 
도래미(島來美)는 '아름다워서 또 오게 되는 섬'이라는 뜻이다.
얼마를 걸었을려나…. 길은 도래미 마을을 지난다.

도래미 마을의 도래미(島來美)는 '아름다워서 또 오게 되는 섬'이라는 뜻이란다. 그리고 도래미라는 이름에는 농촌역량강화라는 정책적 목표가 담겨 있기도 하단다. 기존의 지산리, 신정리라는 딱딱한 마을 이름을 도래미라는 부르기 쉽고, 또 기억하기에도 좋은 새로운 이름으로 디자인해 상품화하겠다는 의지가 그것이다.

그런데 도래미 마을 언저리를 걷다가, 아뿔싸! 길을 잃고 말았다. 스스로 뒤통수 한 대 칠 뻔 했다.

'길은 외줄기 / 남도(南道) 삼백리(三百里)’가 아니라, 길은 외줄기인데 아스팔트길의 연속이다. 트럭들은 쌩쌩 달리고, 먼지는 풀풀 날리고…. 아스팔트 옆길로 빠졌어야 했는데, 무심코 걷다가 벌어진 실수였던 것이다. 다행히 얼마가지 않아 '용당돈대'를 가리키는 푯말이 있어, 그제야 제 길을 찾아갈 수 있어 큰 안도의 숨을 쉬었다. 
용당돈대에는 지사 풍모의 나무 하나가 있다.
용당돈대에는 돈대 가운데 커다란 나무 하나가 외롭게 서 있다. 얼핏 보면 뜻이 깊은 지사(志士)의 풍모가 느껴지기도 하는데, 돈대를 지키다 스러져 간 수많은 민초들의 굳은 뜻이 스며 있지 않나 짐작해 본다.

용당돈대를 지나면 길은 짧은 산길로 이어지다가, 이내 바다만큼의 높이로 낮아진다.
길은 더러 길을 숨긴 채로 걷는 이를 유혹한다.
화도돈대(花島墩臺)를 지나고, 또 오두돈대(鼇頭墩臺)를 지나면 길은 너른 갈대밭으로 향한다. 갈대밭은 자신들의 땅을 길에게 내어주고, 더러는 무심한 발걸음에 채이고 꺾인 채로 넘어져 지나는 행인을 삐딱하게 쳐다본다. 새삼 그 눈길이 차가운 게 딴에는 많이 억울했던 모양이다. 풍경 좋은 길을 걷는다는 즐거움이 도리어 갈대에게는 미안한 일이고, 무안스러울 수도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봄바람의 흔들림이 갈대에게로 와서, 춤이 된다.
그래도 풍성한 갈대들의 군무는 나름 황홀하다. 봄바람의 흔들림이 갈대에게로 와서 춤이 되는 마술은 그 자체만으로도 걷는 이에겐 크나큰 선물이다. 몸들이 부대끼며 내는 가슴이 쏴 해지는 소리와 그들의 서늘한 춤사위는 관객의 혼을 빼놓는다.
부지런한 몸과 마음은 버려진 땅에도 봄을 심는다.
길이 마을 옆을 지날 즈음에는 부지런한 농부의 손이 마늘 모종을 심느라 여념이 없다. 둑 아래의 땅인지라 농지가 아닐텐데도 부지런한 몸과 마음은 버려진 땅에다 봄을 심는다. 그 땅이 어디에 있건 힘든 세월을 살아낸 어르신들에겐 땅이란 모름지기 생명의 터전이며, 생산을 위한 공간일 것이다. 그런 땅을 버려두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다와 땅 사이, 그 경계의 꿈. 어디로 가야 하나?
길은 바다와 땅을 경계 짓는 둑 위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둑과 바다 사이에는 비무장지대라도 되는 양 뻘밭이 제 땅으로 덤벼드는 잔파도를 뿌리치며 바다를 에둘러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뻘 위에 조각 하나 있다.
그런데 뻘밭 위에 무언가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작은 게들이 뛰어다니고 조개들이 사는 뻘밭에다 조형물을 설치할 마음을 먹은 그는 누구였을까. 그 누군가의 뜻은 갸륵하나, 내 스스로 과문한 탓이겠지만 뻘밭의 어수선한 조형물은 과유불급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뻘밭은 뻘밭이라 그 자체로도 충분한데, 굳이 조형물 설치라는 덧칠이 필요한 일이었을까. '텅 빈 충만'은 뻘밭에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광성보의 성문인 안해루.
길은 광성보로 이어진다.

광성보는 1871년 미국의 아시아 함대에 맞서다 장렬히 산화해 간 신미양요의 현장이기도 하다. 힘없는 나라의 힘없는 백성들이 겪어내야 했던 절망과 아픔의 현장이 광성보다. 


** 강화도 가는 길

강화도 가는 버스 : 직행 3000번, 좌석 800번, 급행 8601번, 급행 8600번 (서울 도심 기준)
강화도 내 시내버스(강화나들길 2코스) : 길상53번 - 갑곶돈대와 초지진 사이 운행(1일 3회)
강화도 내 택시 : 강화콜(1577-6669), 개인콜(1566-1771), 초지진에서 갑곶돈대까지 택시요금 13,000원~15,000원(협상요금).


(계속)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