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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모습 드러내는 세월호…아직 돌아오지 못한 9명

[리포트+] 모습 드러내는 세월호…아직 돌아오지 못한 9명
세월호가 1,072일 만에 다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전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9명의 미수습자를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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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디찬 바닷속에 있을 미수습자 9명은 단원고 학생 4명과 선생님 2명, 그리고 일반인 3명입니다. 정부는 지난 2014년 11월 11일 이들 9명의 시신을 찾지 못한 상태로 수색 작업 종료를 발표했습니다.

세월호가 인양돼 목포로 들어오면 이들을 찾는 작업도 다시 본격적으로 진행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리고 곧 만나야 할 9명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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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고 교사 고창석 선생님(실종 당시 40세)은 배 안에서 제자들 탈출을 돕다가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체육 교사였던 고 선생님은 세월호가 기울자 자신의 구명조끼를 제자에게 벗어주며 '탈출하라'고 외쳤습니다.

고 선생님은 지난 2005년 학교에 불이 났을 때도 아이들을 가장 먼저 대피시켰다고 합니다.

학생들에게 '또치쌤'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고 선생님은 인명구조 자격증을 보유했고 수영도 잘 했지만 바다를 건너오지 못했습니다. 그에겐 교사인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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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담당했던 양승진 선생님(실종 당시 57세)도 본인의 구명조끼를 제자에게 벗어 준 뒤 제자들을 구조하다가 화를 당했습니다.

양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갑판으로 나오라'고 외치면서도, 정작 본인은 제자들을 구하기 위해 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고 전해집니다.

아내 유백형 씨는 남편은 정 많고 따뜻한 사람이었다며 남편의 뼈라도 찾아 따뜻한 곳으로 보내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마침 세월호가 인양된 오늘 3월 23일은 부부의 결혼기념일이고, 내일(24일)은 선생님 생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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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유독 좋아하던 조은화(실종 당시 18세) 학생은 학창시절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던 우등생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회계 담당 공무원이 꿈이었습니다.

부모님에게는 다정하고 속 깊은 딸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머니에게 뽀뽀를 했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문자나 카톡을 보냈습니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어려운 집안 사정에 32만 원가량의 수학여행 비용이 부담될까, 부모님께 미안해했던 효심 가득한 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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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다윤(실종 당시 18세) 학생은 3년 전 수학여행 길에 오르며 아버지의 검정 모자가 마음에 든다며 그 모자를 빌려 간 것이 마지막이 됐습니다.

다윤양 어머니 박은미 씨는 “아빠의 모자도, 다윤이가 입고 간 옷과 신발도 모두 올라왔는데, 다윤이만 나오지 않았다”고 전했습니다.

유치원 선생님을 꿈꿨던 다윤 학생은 교회 주일학교에서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보살피는 봉사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하지만 다윤 학생의 꿈은 세월호 침몰과 함께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다윤 학생은 어린 시절 물놀이 사고를 겪어 물을 무척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그런 다윤 학생이 아직까지 깊은 바닷속에 있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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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연주가 취미였던 남현철(실종 당시 18세) 학생은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현철 학생은 글도 잘 썼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2학년 이다운 군의 자작곡으로 가수 신용재 씨가 부른 ‘사랑하는 그대여’의 작사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현철 학생의 아버지 남경원 씨는 4대 독자인 남 군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전남 진도 팽목항에 기타를 가져다 뒀습니다.

남 씨는 팽목항에서 아들을 기다리는 동안 지병이 도져 목포와 진도를 오가며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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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인(실종 당시 18세) 학생은 집안일을 자주 돕고 부모님과 스스럼없이 장난치기를 좋아한 딸 같은 아들이었습니다.

운동을 좋아한 영인 학생은 학교에서 만능스포츠맨으로 통했습니다. 체대로 진학해 좋아하는 운동을 계속하기를 꿈꿨습니다.

어머니 김선화 씨는 아들이 사달라고 한 축구화를 못 사준 일이 가슴에 맺힌다고 전했습니다. 사고 이후 새 축구화를 팽목항에 가져가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뭍 위로 올라온 것은 영인 학생의 가방뿐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지난 1월 5일 영인 학생의 스물한 번째 생일상을 팽목항에서 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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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숙 씨(실종 당시 51세)는 제주도에 떨어져 있던 외아들과 함께 살기 위해 배에 올랐습니다.

일찍이 남편과 사별한 뒤 생계를 위해 아들과 내내 떨어져 살다가 2015년 드디어 제주에서 아들과 함께 살기 위해 이삿짐을 옮기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호가 바닷속으로 가라앉으면서 영숙 씨는 “아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꿈을 멀리 하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아들은 오늘도 여전히 어머니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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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규(실종 당시 6세)는 사고 당시 한 살 터울의 여동생 권지연 양(당시 5세)과 엄마 판응옥타인(사망 당시 30세, 한국 이름 한윤지), 아빠 권재근 씨(실종 당시 50세)와 제주로 이사를 가고 있었습니다.

제주도에서 새 출발을 꿈꿨던 단란한 가족은 그러나 세월호 참사 이후 각각 생존자, 희생자, 미수습자란 이름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단원고 학생들과 일반인 승객들이 구조해 낸 동생은 ‘오빠가 구명조끼를 벗어 입혀줬다’고 말했습니다. 권 군은 평소 한 살 어린 여동생을 끔찍이도 아꼈다고 합니다.

지연 양은 올해 초등학생이 됐습니다. 재근 씨 형 권오복 씨는 3년째 팽목항에서 동생과 조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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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구성 : 김도균, 정윤교 / 디자인 : 임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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