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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박근혜의 추억

당 대표 박근혜에 대한 회고록

[취재파일] 박근혜의 추억
자신의 파면에 분노했던 지지자 3명이 시위 중에 소중한 목숨을 잃었습니다. 시위의 과격성을 떠나 어쨌든 사람이 죽었습니다. 애도부터 하는 게 맞습니다. 국가의 녹을 먹었던 지도자였다면 그게 정도입니다. 나를 아껴 하는 마음 이해한다, 하지만 이제 그만 멈춰 달라, 화합해야 할 시점이다, 이런 말 정도는 해야 했습니다. 심심한 위로는 없었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진실은 밝혀진다는 게 전부였습니다. 사람들은 박근혜의 공감의식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렇게 차가운 정치인을 왜 지도자로 뽑았을까 통탄했습니다. 누군가는 이 모습에서 3년 전 세월호 참사에 대처했던 박근혜의 모습을 소환했습니다.

2012년 12월. 대한민국은 박근혜에게 절반이 넘는 지지를 보냈습니다. 피의 대가로 어렵사리 민주주의를 얻어낸 대한민국입니다. 절차 정의에 따라 박근혜를 선택했던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단순히 박근혜에게 속았다고 말하는 건 우리의 주권 능력을 비하하는 것 같아 불편합니다. 뭔가 이유를 찾고 싶습니다. 박근혜를 지근거리에 지켜봤던 사람들, 하지만 지금은 마음속에서 박근혜를 지운 사람들의 회고록을 담았습니다.

● " 나는 박근혜를 진심으로 존경했었다"

2004년 3월.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옛 한나라당은 비상 상황이었습니다. 차떼기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 때문이었습니다. 4월 예정됐던 17대 총선은 사실상 패한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의 선택은 박근혜였습니다.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되며 구원투수로 나섰습니다.

"사실 우리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 게 사실이었어. 진보 진영에서 박근혜를 유신 공주, 여자 박정희의 부활이라는 공격이 마냥 편치는 않았으니까. 더군다나 당시로서는 박근혜는 재선 의원에 불과했어. 인기가 있던 만큼 영향력도 컸지만 풍비박산이 난 당을 제대로 끌고 갈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어." (당직자 A의 회고)

당은 젊은 당직자들을 모아 놓고 지지율을 끌어낼 대책을 요구했습니다. 젊은 세대의 민심 이반이 워낙 심하다보니 젊은 생각이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대책 가운데 나온 게 당 지도부가 3천 배 불공을 올리는 방안이었습니다. 이 제안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건 박근혜였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제 1보수 정당이야. 보수 정당 대표는 권위의 상징이었어. 당의 위기 때마다 지도부의 석고대죄 요구가 있었지만, 그걸 제대로 한 경우는 드물었어. ‘좋은 의견이다’ 이러고 끝나곤 했어. 그런데, 박근혜는 달랐어. 무조건 하겠다고 했어. 주변에서 무릎이 나갈 수 있다고 만류하는 데도 하겠다는 거야. 난 아직도 박근혜가 3천 배를 하겠다고 고집부리는 모습이 눈에 선해." (당직자 B의 회고)

주변의 만류로 3천 배는 108배로 바뀌긴 했지만, 당시 당직자들은 그 모습에 적지 않게 놀랐던 모양입니다.

"사실 지도부 전체적인 분위기는 난색이었어. 초반에는 좋은 아이디어라고 했지만, 막상 하려니까 부담스러운 거야. 당시 사무총장이었던 이상득은 ‘나는 기독교 신자라 불공을 드릴 수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으니까. 박근혜의 모습은 당시로서는 매우 신선했어. 나 역시 박근혜의 팬이 된 이유가 이런 모습들 때문이었어. 밖에서는 유신 공주다 뭐다 말이 많았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무척 달랐거든. 난 박근혜가 당을 살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어. 나는 진심으로 박근혜를 존경했고 그렇게 친박이 됐어. 지금 보면 웃음이 나오겠지만, 당시에는 친박이 된다는 건 당 개혁 노선에 합류한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당직자 B의 회고)

2014년 말부터 여당을 출입했습니다. 태양왕 박근혜의 위상을 지켜봤고, 또 그 몰락을 경험했습니다. 기자가 경험했던 박근혜는 어쩌면 정치에 닳고 닳았던 박근혜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 시작은 달랐을 수 있을 겁니다.

● "왜 통화를 그런 식으로 하죠? 당장 내리세요."

박근혜 정부의 소통 문제가 나올 때마다 거론된 게 안봉근, 이재만, 정호성 전 비서관을 뜻하는 ‘문고리 3인방’이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들의 힘이 막강했던 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3천 배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재만이 갑자기 당 지도부가 회의하는 데 찾아왔어. 3천 배 관련해서 꼬치꼬치 캐묻고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훈수를 두더라고. 사실 누구든 당 대표로 선출되면 기존 의원실 보좌진과, 당 공식 인사로 보좌역할을 맡게 된 당직자 사이에 긴장감이 발생하곤 해. 서로 의견이 부딪치기도 하고. 이재만도 처음에 잘 모르고 그랬던 거겠지. 그래서 우리 당직자 한 명이 ‘당의 의사 결정은 이렇게 보좌진이 찾아와서 결정되는 게 아니다, 여러 경로가 있으니 바로 지도부를 찾아오면 일이 꼬인다.’ 이렇게 설명을 해줬거든. 그러니까 바로 ‘알겠다, 내가 잘 몰랐다.’ 이렇게 말하고 돌아가더라고. 이미지가 나쁘지는 않았어. 바로 수긍했으니까." (당직자 C의 회고)

다른 당직자는 이런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박근혜 역시 3인방에게 꽤 엄격한 모습을 보였다는 겁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 박근혜가 3인방 중에 한 명이랑 같이 차를 타고 가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누군가한테 전화를 받으면서 툴툴 거렸나봐. 쌀쌀맞게. 박근혜가 그걸 듣더니 ‘당장 내리세요!’라고 말했다는 거야. ‘왜 그렇게 쌀쌀맞게 전화를 받는 거죠? 사람을 왜 그렇게 상대하는 건가요?’ 이렇게 말하면서. 당 대표였던 박근혜는 3인방에게도 이렇게 엄격한 모습을 보였었어." (당직자 D의 회고)

어쩌면 이번 탄핵 사태의 출발점은 문고리 3인방입니다. 국정은 3인방으로 모였고, 이들을 통해 지시를 기다리는 구조로 공적인 조직이 운영됐습니다. 이 비밀스런 소통 구조 사이를 파고들었던 건 최순실었습니다. 시작은 연설문이었습니다. 최순실이 대통령의 연설문에 손을 댔다는 게 이 사단의 시작이지만, 당 내부 인사들은 처음에는 이를 믿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었습니다.

"난 연설문 보도가 나왔을 때 믿지 못했어. 밖에서는 박근혜의 단어 사용이나 과도한 비문 때문에 풍자 대상이 되곤 했지만, 당 대표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거든. 장애인 관련 행사에 박근혜가 초대됐을 때 이야기야. 가서 연설을 할 일이 있었어. 당시 조인근 전 연설비서관이 초안을 썼는데, 이회창 때부터 연설문을 썼던 양반이라 글을 참 잘 썼거든. 그런데 문체가 다소 남성적이었는데, 박근혜는 그걸 지적하는 여성적 감수성이 있었어. 나도 놀랐었어. 가령, ‘신체적 장애는 문제가 아니다, 정신적 장애가 문제인 거다’ 이런 문장이 있었는데 박근혜가 보더니 ‘이렇게 하시면 안 되죠. 정신적 장애가 문제라니요?’라면서 고치라고 했거든. 나도 ‘아, 여성적인 언어가 이런 거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고." (당직자 E의 회고)

정치적 의사 결정을 할 때도 박근혜는 당 정무 라인의 의견을 대부분 수용했다고 했습니다.

"정치적 판단이 필요할 때 당에서 정무 보고서를 올려. 가령, 누가 행사에 초청했을 때 가는 게 맞는지, 설령 가더라도 말 한마디 하는 게 맞는지, 이런 세세한 것까지 정무적으로 판단해 보고를 해. 당직자들은 관련 상임위 간사, 관련 행사가 있는 지역구 의원까지 의견을 꼼꼼하게 수렴해서 보고서를 올려. 그리고 우리가 잠정 결론을 내리지. ‘가지 말고 서면으로 메시지만 보내시라.’ 이런 식으로. 그러면 박근혜는 동그라미, 세모, 엑스, 이렇게 3가지 표시를 하는 식이야. 동그라미는 정무 보고서의 결론을 따르겠다는 뜻이고, 세모는 다시 검토해보라, 엑스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의미야. 박근혜는 정무 보고서의 결론에 대부분 동그라미 표시를 했었어. 다른 비선 라인의 말을 듣고 정치적 결정을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당직자들의 결론을 존중해줬어. 그래서 문고리 3인방이나 정윤회, 최순실이 논란이 됐을 때 우리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던 거야." (당직자 F의 회고)

●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올림머리, 태반주사. 세월호 7시간의 행적을 상징하는 표현들입니다. 세월호 7시간의 행적은 아직 밝혀야 할 게 많지만, 이런 표현들은 외모 관리 때문에 300명에 가까운 사람을 희생시켰다는 불성실함으로 읽혔습니다. 여성 대통령은 이래서 안 된다는 식의 불편한 코드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논란의 이유가 됐습니다. 헌법재판소 역시 박근혜가 성실한 직책 수행 의무를 져버렸다는 보충 의견을 냈습니다. 한 당직자가 이런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당 대표 박근혜는 외모에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어. 해외 출장을 나갈 때도, 오히려 우리가 걱정 때문에 스타일리스트라도 대동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어. 나라를 대표하는 제 1야당 당수인데, 패션이니 뭐나 얼마나 기사가 많이 나와. 그럴 때도 박근혜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답했어. 우리는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어." (당직자 G의 회고)

최순실이 옷을 챙겨줬다는 뉴스에 누구보다 놀랐다고 했습니다. 처음 그 뉴스를 봤을 때, 오보였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당 대표 박근혜는 해외 나갈 때도 옷이나 머리 관리하는 사람 단 한 번도 데려나간 적이 없었어. 오히려 남자 대표들이 더 극성이었어. 예전에 한 당 대표는 머리숱이 없는 게 콤플렉스여서 헤어 디자이너를 데려가곤 했어. 아침마다 드라이시키고 표 안 나게 화장 받고 그랬거든. 박근혜는 혼자서 그걸 다 했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옷과 머리, 화장을 혼자서 하고 시간 맞춰서 나왔어. 그런데 최순실이 하나하나 다 챙겨줬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너무 이상했어. 도무지 그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거야." (당직자 G의 회고)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으로 자부했던 박근혜는 이제 부패와 무능의 상징으로 역사에 기록될 겁니다. 하지만, 친박계였던 한 의원은 이런 일화를 상기했습니다.

"내가 상을 당했을 때였어. 당시에 조화가 많이 왔는데, 유독 박근혜 조화가 오지 않은 거야. 명실상부 내가 측근인데 실망했지. 나와 박근혜의 관계가 어떤데 이럴 수 있느냐고 생각했어. 그래서 좀 화가 나서 의원실 통해서 좀 알아보라고 했어. 그런데 박근혜는 부친상이나 모친상 같은 직계에만 조화를 보낸다는 원칙이 있다는 거야. 자신과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그래서 보내지 않은 거라고 하더라고. 친박들은 대부분 박근혜의 이런 모습을 높게 평가했어. 그런데 어쩌다가 이지경이 됐는지." (옛 친박계 H의원의 회고)

● 권력이라는 괴물
파면 이후 삼성동 자택 앞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박근혜는 웃었습니다. 언론은 여러 심리학적 분석을 동원했습니다. ‘양친을 끔찍한 사고로 잃은 트라우마로 인한 공감능력 상실’,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이 만든 허구를 진실로 믿는 리플리 증후군’, ‘여러 개의 자아가 존재하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 ‘강한 자기애로 부풀려진 자존심을 유지하고자 하는 상황 인지’, ‘감정 표현에 서투른 포커페이스 인간형’까지.

앞서 박근혜를 마음속에서 지웠다는 이들은 그래도 그 때 그 시절 박근혜는 자신들이 믿고 따를 최소한의 가치가 있었다고 되뇌였습니다. 지금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말을 빌어 박근혜를 변호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의 회고록에서 한없는 이질감과 정치적 무상함까지 느낍니다. “당시로서 친박이 된다는 건 개혁 노선에 합류한다는 뜻이었다.”는 한 당직자의 말이 계속 아른거립니다. 지금은 보수 파멸의 상징이지만, 적어도 보수 진영 내에서는 박근혜가 개혁의 상징으로 통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박근혜는 대한민국 정치인으로 누릴 수 있던 최고의 영예에 올랐지만, 파면과 함께 자신의 18년 정치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당할 운명에 처했습니다. 다만, 박근혜의 본성이 이 사태의 원인이라는 심리학적 분석으로 결론짓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치부해버리면 우리의 사명은 탄핵과 파면으로 끝나버리는 까닭입니다. 대한민국이 파면했던 건 박근혜란 정치인 한 명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와 더불어 박근혜를 잉태했던 시대라고 믿습니다. 권력이라는 괴물 앞에 한 정치인의 영혼이 얼마나 훼손될 수 있는지, 그리고 이 때문에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왜곡되고 망가질 수 있는지, 대한민국은 처절히 열공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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