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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70년을 기다려온 한 마디 '어폴로지'

[취재파일] 70년을 기다려온 한 마디 '어폴로지'
국내 개봉한 영화 ‘어폴로지(The Apology)’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사전에서 ‘일본군 위안부(日本軍慰安婦)’를 찾으면 ‘일제에 강제 징용되어 일본군의 성욕 해결의 대상이 된 한국, 대만 및 일본 여성을 이르는 말’이란 뜻풀이까지 나와 있지만, 위안부(慰安婦)란 표현을 쓸 때마다 개인적으로는 불편함을 느낍니다.

아마도 ‘위안(慰安)’이란 단어가 갖고 있는 뜻 때문일 겁니다. 일본군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실제로 사용한 용어의 역사성 때문에 ‘위안부’란 표현을 쓴다지만, ‘위로하여 마음을 편하게 함 또는 그렇게 하여 주는 대상’이란 ‘위안’의 사전적 의미를 떠올리면, 그 악랄한 기만의 표현을 따라 쓰는 게 적잖이 불편한 것입니다.

동시에 일말의 의심도 생깁니다. 영어 표현상의 공식용어인 ‘일본군 성노예(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가 한국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면엔 성폭행 또는 성적 학대 피해에 대해 여전히 ‘수치스러운 일’ 혹은 ‘쉬쉬해야 할 일’이란 인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 말이죠. 이 글에서 ‘위안부’보다 ‘성노예’란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어폴로지’의 감독은 티파니 슝(Tiffany Hsiung), 중국계 캐나다인 여성입니다. 제작은 캐나다국립영화위원회가 맡았습니다. 개봉 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건 이 영화가 우리 역사의 가슴 아픈 한 부분인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서구의 시각에서 혹은 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서는 어떻게 바라보는지 확인하고 싶었고, 한국의 피해 할머니뿐 아니라 다른 아시아 국가 할머니들의 사연도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화에는 3명의 피해 할머니들이 중심인물로 등장합니다. 한국의 길원옥 할머니와 필리핀의 아델라 할머니, 그리고 중국의 차오 할머니입니다. 세 분은 각각 13살, 14살, 그리고 18살(혹은 19살)에 일본군에 납치돼 위안소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년 동안 성노예로 참혹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중국의 차오 할머니
당시의 기억에 대한 가장 충격적인 증언은 2년간 위안소에 붙잡혀 있으면서 자신이 낳은 아기를 직접 목 졸라 살해해야 했다는 차오 할머니의 고백이었습니다. “애를 둘 낳았어. 딸 하나 아들 하나. 낳자마자 목 졸라서 죽여야 했어. 위안소에서 생긴 아이니까 어쩌겠어. 아이가 죽었을 때는 말도 못하게 충격이었어. 일본군 놈 아이를 가진 거잖아. 애를 낳을 때 까딱하면 죽을 뻔했어. 상상이 돼? 겁에 질려서 벌판에서 낳았어. 위안소에 돌아와서도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지르곤 했어.”

차오 할머니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몸은 만신창이가 됐어. 더는 임신할 수 없었지.” 53살에 입양해 키운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조차 한 번도 자세히 해본 적 없다는 이야기를 할머니는 감독에게 덤덤하게 털어놓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눈물조차 말라버린 걸까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충격적이면서도 안타까웠습니다.
필리핀의 아델라 할머니
세 할머니 가운데 유일하게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 아델라 할머니는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자신의 삶이 ‘비밀’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필리핀군의 승리로 고향 집에 돌아온 14살 소녀 아델라에게 어머니는 끔찍했던 일을 둘만의 비밀로 하자고 당부합니다. 아버지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채 소녀는 그렇게 10대를 버텼고,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렸지만 남편에게도 아들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지 못했습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믿었지만, 사별한 지금 할머니에겐 떨쳐낼 수 없는 후회와 죄책감으로 남았습니다.

“위안부 피해자라는 것 자체가 치욕이야. 필리핀이나 이곳에선 일반적인 태도지, 밝힌다고 해서 뭐가 되겠어? 영웅대접? 매장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할머니를 겁탈하고 성노예로 삼은 것은 일본군이지만, 전쟁이 끝난 뒤 2차 피해를 가한 건 할머니의 나라 사람들입니다. 할머니의 나라는 아주 긴 시간 동안 가해자의 처벌과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 대신, 떠들어봤자 당신만 손해라며 사실상 피해자들에게 침묵을 강요해왔습니다. 중국도 한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국의 길원옥 할머니
피해국의 정부가 이처럼 수수방관하고 외면하는 사이 가해국의 정부에서는 괴물들을 키워내고 있었습니다. 그 끔찍한 결과는 길원옥 할머니에게 가해진 일본 극우세력들의 폭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 일본을 찾은 할머니에게 일본의 극우 시위대는 확성기를 들고 소리칩니다. 꺼져라, 한국의 매춘부들! 물러가라, 창녀들! 수치스러운 줄 알아라, 창피한 줄도 모르느냐, 거짓말로 구걸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화가 나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죄지은 사람이 되려 큰 소리를 치고 가해자가 피해자를 공공연하게 모욕하는 세상이라니, 잘못돼도 뭔가 크게 잘못됐습니다. 그들에게 ‘국가’란 무엇이길래 이토록 ‘인간’을 짓밟고 모욕하도록 만든단 말입니까? ‘역사’가 무엇이길래 ‘진실’과 ‘반성’의 기록이 아닌 ‘합리화’와 ‘가짜 자긍심’의 도구로 난도질 된단 말입니까?
수요집회
영화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티파니 슝 감독은 후에 인터뷰에서 이런 개인적 사연을 털어놨습니다. “나 역시 어렸을 적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내면의 상처를 비밀로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들을 만나면서 나 자신의 시련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고, 내가 그랬듯이 다른 모든 여성분들이 할머니들을 통해 용기를 얻게 되길 바랍니다.”

이토록 끔찍하고 명백한 반인륜 전쟁범죄의 피해자들이 왜 70년 넘도록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들을 수 없는 것인지, 일본의 그리고 우리 내부의 가해자들에게 묻고 싶어집니다. 당신들에게 ‘국가’는, ‘역사’는 무엇입니까? ‘국민’은 대체 무엇입니까? "이제 그만 하라."는 말은 가해자나 방관자가 피해자를 모욕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피해자가 속죄하는 가해자를 용서하기 위해 건네는 말이어야 합니다. 

* 사진: 영화 '어폴로지'/ 제공: 영화사 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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