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2017년 한국 여성 감독들의 이야기

지난주 개봉한 한국 영화 ‘해빙’과 이보다 한 주 앞서 개봉한 ‘싱글라이더’는 모두 한 인간의 심리를 파고드는 영화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해빙’은 의심과 공포의 감정에, ‘싱글라이더’는 슬픔과 후회의 감정에 각각 주목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요.

두 영화에는 여성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작품이라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감독은 여성 아니면 남성, 둘 중의 하나일 텐데 그게 무슨 공통점이냐고 꼬집을 수도 있을 겁니다. 일리 있는 지적입니다.

하지만 한국 상업영화 시장에서 여성 감독의 비중이 여전히 매우 낮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 두 편이 나란히 극장에 걸려있다는 점이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닙니다.

한국 영화 시장에서 여성 감독들의 설 자리는 왜 여전히 이토록 작은 걸까요? 지난해 ‘비밀은 없다’, ‘미씽: 사라진 여자’, ‘우리들’ 같은 영화의 등장으로 여성 감독들의 활약에 대한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2017년, ‘해빙’과 ‘싱글라이더’의 두 감독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싱글라이더
● ‘싱글라이더’의 이주영 감독, “결국 남자·여자의 이야기가 아닌 인간의 이야기”

‘싱글라이더’는 광고감독 출신인 이주영 감독의 데뷔작입니다. 첫 작품인데도, 이병헌 씨가 ‘인생의 시나리오’라고 극찬하며 주인공을 맡고 워너브러더스코리아가 배급사로 나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영화계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던 작품입니다.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잘 나가던 증권맨 재훈(이병헌)은 부실채권 사건으로 일순간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무작정 비행기 표를 끊어 찾아간 곳은 호주, 기러기 아빠인 그의 아내와 어린 아들이 유학가 지내고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아내의 달라진 모습에 쉽게 다가가지 못한 채 가족의 주변을 맴돌기만 하다, 결국은 슬프고 충격적인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겠다며 아등바등하다 어느 순간 “왜 이러고 살지?“ 스스로 되묻게 되는, 현대인의 슬픔과 공허함을 파고드는 작품입니다. 감독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사람들’의 자각과 성찰의 순간을 영화에 담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이주영 감독
이렇게 내밀한 감정을 담은 작품의 주인공으로 감독은 왜 ‘재훈’이란 인물을 선택했을까요? 여성의 감정이라면 시나리오를 쓰기가 좀 더 쉽지 않았을까요? 이주영 감독은 주인공의 성별은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여자의 감정이라고 해서 뭔가 더 특별하다고 생각 안 해요. 재훈의 이야기는 저를 투영한 부분도 사실은 되게 많았고요, 제 주변 사람들의 모습도 많이 담았어요. 여느 다른 감독들처럼 자기가 살면서 느꼈던 이야기들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거니까요.”

광고 회사를 다녔던 과거의 경험도 녹여냈습니다. “사회생활을 조금 하다가 영화를 찍게 됐는데 제가 사회생활을 하던 시스템도 역시 남자들 중심의 시스템이었고, 저도 사실 남성, 여성을 따로 생각하면서 일을 하지는 못했어요. 덕분에 자연스럽게 남자들이 가지는 정서에 저도 어쩌면 동의하거나 감정이입을 했었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이 이야기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인간의 이야기로 봐주시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한 개인의 특성을 성별의 차이로 설명하려는 건 자주 어리석은 시도가 됩니다. 범죄자가 아니어도 범죄물을 쓰고 과거에 산 적 없어도 역사물을 쓰는데, 여성이 남성의 이야기를 쓰고 남성이 여성의 이야기를 쓰는 게 뭐 대단한 어려움일까요? 작가적 상상력과 감수성,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말이죠. 적어도 시나리오의 단계에선 여성 감독에 대한 편견이 자리 잡을 공간은 많지 않아 보였습니다.
해빙
● ‘해빙’의 이수연 감독, “편견을 뛰어넘어 자본의 신뢰를 얻는 게 숙제”

‘해빙’은 한강의 얼음이 녹으면서 수면 아래 갇혀있던 시신이 떠오른 사건과 주인공의 무의식 아래 봉인돼 있던 비밀이 서서히 드러나는 구조를 중의적으로 표현한 제목입니다. ‘4인용 식탁’으로 잘 알려진 이수연 감독이 무려 14년 만에 내놓은 신작입니다.

영화는 내과의사 승훈(조진웅)이 수면 내시경 검사 도중 마취약에 취한 노인에게서 오싹한 말을 들으며 시작됩니다. “팔다리는 한남대교에, 몸통은 동호대교에, 머리는 아직 냉장고 안에...” 노인은 승훈이 세 들어 사는 집의 주인. 의심은 서서히 공포를 키워나갑니다.

일반적인 한국의 심리 스릴러는 범인을 추적해가는 추적극의 형태를 띠게 되는데, ‘해빙’은 범인 대신 한 남자의 무의식을 따라가는 형태라는 점에서 보통의 스릴러물과 차별성이 있다고 감독은 말합니다.

전작에 이어 이번에도 미스터리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선 미스터리라는 구조가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관객들의 몰입도가 좋고 감독으로서도 여러 가지 시청각적 실험을 할 수 있어 반복적으로 하게 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수연 감독
이수연 감독은 똑 부러지는 성격의 소유자처럼 보였습니다. 배우를 캐스팅할 때 ‘꼭 같이 해야 하는 사람’은 없어도 ‘절대 같이 하면 안 되는 사람’은 있다며, 그건 준비가 안 된 배우, 준비시켜도 안 되는 배우라고 꼬집었습니다. 감독으로서 배우의 연기력과 연기에 임하는 자세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준비가 된 배우들에겐 감독이 여성이라는 사실이 문제될 리 없습니다. “실제로 일해 보면 배우든 스태프든 영화 작업을 하시는 분들은 자격을 갖추고 있는 사람에게는 다 마음이 열려있어요. 본질적으로 능력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고 계신다는 거니까, 감사하게 생각하고 희망이 있다고 보는 거죠.”

그렇다면 도대체 감독이 되기를 꿈꾸는 여성들의 진입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은 무엇일까요?

이수연 감독은 ‘투자자들이 갖고 있는 편견’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결국 영화는 돈이거든요. 자본의 신뢰를 받는다는 건 여성 뿐 아니라 남성 감독 모두에게 어려울 텐 데, 결국 여성이 처한 어려움이라는 것은 고정관념의 벽이죠. 영화계에서 자본을 움직이시는 분들이 아직 여성 감독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계시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그게 넘어야 할 제 1의 벽인 것 같아요.”

그러면서 이 감독은 투자자들의 편견을 깨는 무기로 개인의 능력을 키우는 것과 함께 여성 감독들이 성공의 이력을 계속 쌓아나가는 것을 꼽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같은 시기 극장에서 맞붙은 두 여성 감독에게 사람들이 더욱 많은 관심을 갖는 배경에는 지난해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어낸 다른 여성 감독들의 이력도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긴 시간 힘든 길을 걸어왔지만 아직도 가야할 길이 많은 한국의 여성 감독들, 그들의 활약을 앞으로도 기대해봅니다. 단지 감독을 꿈꾸는 젊은 여성들의 꿈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뿐 아니라, 그것이 한국 영화의 다양성을 키우고 경쟁력을 높이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