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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독립운동엔 남녀가 없었다…드러나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행적

[라이프] 독립운동엔 남녀가 없었다…드러나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행적
오늘은 3.1절입니다.

순국선열에 대한 추모와 애도의 묵념을 하며 민족정신을 되새기는 날입니다.

그런데 독립운동가 하면 김구, 안창호, 윤봉길, 이봉창 선생 등 남성을 떠올리시는 분 많으실 텐데요. 여성은 유관순 여사가 먼저 떠오르고 영화 '암살'을 계기로, 여주인공이었던 '남자현 여사'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독립운동에는 남녀가 없었습니다. 단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죠.

올해 국가보훈처는 삼일절을 기념해 75명의 독립유공자를 포상합니다. 여기엔 중국 충칭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을 결성한 독립운동가 6인 등 여성 독립운동가도 포함됩니다.

오늘 SBS '라이프'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국을 위해 헌신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전해봅니다.

평안남도 대동에서 만세시위 이끈 양희언 선생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북쪽의 평안남도 대동의 사천장터까지 번졌습니다. 1919년 3월 4일 양희언 선생은 사천장터 방면으로 행진하며 약 3천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목이 터져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일본군은 시위대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지만 양희언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일본군의 무력탄압에 저항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검거됐다가 석방된 그날 밤, 양희언 선생은 다시 군중을 모아 만세운동을 계속했고 일본 순사들을 끝까지 쫓아가 처단했습니다.

그러다 또다시 체포된 양희언 선생은 결국 3·1 만세 운동 참가자로서는 이례적으로 가장 높은 징역 15년이라는 형량을 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조선총독부가 내린 죄명은 살인, 방화, 소요(騷擾; 지금의 시위), 보안법 위반이었습니다.

당시 나이 26세였습니다. 양희언 선생에 대한 판결문에서는 마지막까지 '만세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외친 결의가 느껴집니다. 양희언 선생에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됩니다.
 평안남도 대동에서 만세시위 이끈 양희언 선생
김구 선생을 보살핀 오건해 여사

오건해(1894~1955) 여사는 충북 청주 출신입니다. 오 여사는 임시정부 재무부차장 신건식(1889~1955) 선생의 부인이기도 합니다. 오건해 여사의 일가와 시댁일가까지 온 가족이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딸 신순호(1922~2009)도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법무부장이었고, 이후 백범 김구 선생과도 절친한 친구였던 남파 박찬익 선생과 사돈을 맺었습니다. 오 여사는 요리 솜씨도 좋아 독립운동가들의 뒷바라지를 도맡아 했다고 전해집니다.

또 1940년에 한국독립당 산하에 있던 한국혁명여성동맹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독립당 산하에 있는 단체로 출발한 한국혁명여성동맹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지원과 교육활동 등에 주력했습니다.

오 여사는 또 1945년 광복까지 김구 선생의 식사까지 챙기며 옆에서 보살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김구 선생을 보살핀 오건해 여사
결혼 첫날 밤 독립운동가 된 윤용자 여사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사진의 제일 윗줄에서 맨 왼쪽에 있는 사람이 윤용자 여사입니다.
결혼 첫날 밤 독립운동가 된 윤용자 여사
윤 여사는 독립운동가였던 지청천 장군의 부인입니다. "조국 독립하는데 남자 여자 가리겠느냐"라며 한국광복군에 입대한 '대한의 잔 다르크' 지복영 선생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지청천 장군과 윤용자 여사의 혼인 첫날밤의 일화가 있습니다. 당시 18세의 윤용자 여사는 지청천 장군과 합환주를 나눠마시고 한 방에 들었습니다.

떨리는 첫날 밤. 이 자리에서 윤 여사는 지청천 장군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결혼 첫날 밤 독립운동가 된 윤용자 여사
아무리 중매결혼이라지만 결혼 첫날 밤에 신부가 듣기엔 감당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윤용자 여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험난한 독립운동가의 부인이자 여성 독립운동가가 됩니다.

이후 1940년 중일 전쟁의 여파로 충칭으로 옮긴 임시정부를 따라 충칭으로 이동한 윤 여사는 그곳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와이까지 건너가 독립운동…황마리아 여사

7천km 떨어진 곳에서도 독립운동을 한 여성독립운동가가 있었습니다. 미국 하와이에서 조국을 잃은 슬픔을 나 몰라라 하지 않고, 재외 한인 여성의 단결을 이끈 '여성독립운동의 대모' 황마리아 여사입니다.

황마리아 여사는 1913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결성된 대한부인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부인구제회 조직을 주도했습니다.

그로부터 6년 뒤 1919년 3월 유관순 열사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칠 때 황마리아 여사는 '우리의 힘을 집중하자, 임시정부로!'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이후 1930년 하와이 한인협회 조직에 참여하여 조국독립운동을 후원하면서 1936년에는 김구 선생 앞으로 100달러의 군인양성자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와이까지 건너가 독립운동…황마리아 여사
황마리아 여사는 이번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됩니다. 이미 딸 강혜원, 아들 강영승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것을 보면 자식까지 독립운동가로 키워낸 여사의 '숭고한 정신'이 느껴집니다.

독립투쟁에 나선 어머니, 언니, 누나, 여동생

이처럼 독립투쟁에 나선 사람은 남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오건해 여사, 윤용자 여사처럼 뒷바라지한 아내가 있었고, 2만 리 떨어진 타국에서 독립을 외친 어머니가 있었고, 더러는 직접 항일투쟁 대열에 참가했던 양희언 선생 같은 누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이들의 이름을 모르거나 그 유족들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보훈처에 따르면 현재까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사람은 1949년 이후 총 1만 4천651명. 이 가운데 여성 독립운동가는 360명일 뿐입니다.
잊혀진 여성 독립운동가를 찾기 위한 작업이 계속돼야 하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잊혀진 여성 독립운동가를 찾기 위한 작업이 계속돼야 하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기획·구성: 김도균, 송희 / 디자인: 김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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