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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직도 톨레랑스가 가능한가?

위협받는 관용 정신,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칼럼] 아직도 톨레랑스가 가능한가?
요즘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극심한 갈등과 분열은 해방 직후를 상상하게 한다. 거리에서, 온라인에서 증오와 폭력의 언어가 넘실대고, 헌법재판소 심판정에서까지 섬뜩한 표현이 난무한다. 이 폭력적 언어들은 유순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생활인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서 혐오감과 함께 극단적 충돌에 대한 두려움을  퍼뜨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톨레랑스(Tolerance), 즉 나와 생각을 달리하는 타인을 받아들이고 존중하자는 관용의 정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공허해보이기까지 한다. 우리 사회는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를 앞두고 극단적인 대결의 장으로 점점 깊이 빠져들고 있다. 가뜩이나 미약하던 우리 사회의 톨레랑스가 위협받는 상황이다. 우리에게 아직도 톨레랑스가 가능한가?

● 톨레랑스에도 한계가 있다.

톨레랑스는 자유민주주의, 다원주의의 기본 원칙이지만 무제한적인 관용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톨레랑스에도 물론 한계가 있다. 관용의 한계, 즉 ‘불관용’의 영역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정할 것이냐는 질문을 처음부터 품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한 잘 알려진 답변은 “톨레랑스를 부정하는 세력마저 톨레랑스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견해를 존중하지만,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세력마저 포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회의 대결 양상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이런 한계에 대한 물음이 당장 현실화된다. 대통령 탄핵을 놓고 찬반이 격하게 대립하는 현 상황은 우리 사회의 톨레랑스를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다. 우리는 과연 저들마저 관용해야 하는가?

이때 ‘우리’가 누구이고 ‘저들’은 누구인지는 입장에 따라 다를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의 입장이 갈린다고 해서 요즘 몇몇 언론 보도처럼 양비론을 꺼내면 누구도 설득하지 못할 것 같다. 이 글에서는 민주주의와 톨레랑스의 관점에서 좀 더 기본적인 얘기를 하려고 한다.

● 톨레랑스는 자기와의 싸움

선거 여론조사의 신뢰성이 떨어지는 우리와 달리, 프랑스에서는 여론조사 결과가 실제 투표와 거의 일치한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은 자기의 정치성향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프랑스 사회에 단단히 자리 잡은 톨레랑스 문화 덕분이다.

톨레랑스는 인간 사회가 오랜 폭력과 전쟁의 역사를 반성하며 일구어낸 이성과 지혜의 열매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모든 갈등을 톨레랑스 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톨레랑스의 한계를 벗어난 영역에서는 힘의 논리가 작동된다. 법, 권력기구, 다수결 같은 제도화된 힘 외에도 극단적으로 가면 폭력, 전쟁 같은 원초적인 힘이 동원될 경우도 있다.

미국의 철학자 존 롤즈는 ‘정의론’에서 ‘불관용자에 대한 관용 거부의 시기와 목적’에 대해서 엄격하게 논했다. 그는 “사회의 성원들은, 평등한 자유 그 자체를 보존할 필요가 있는 특수한 경우에, 확신을 갖고서, 불관용자의 자유를 제한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톨레랑스는 이렇게 사회와 타인을 위한 규범이기도 하지만, 내 마음과 행복을 위한 지혜이기도 하다. 톨레랑스는 관용이라는 도덕적 의무를 넘어서는 ‘열린 마음’이다. 자기중심성을 벗어나서 나와 타인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열린 마음을 가질 때 최고조로 발현되는 마음가짐이다. 열린 마음은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평화와 행복을 가져온다.

그런 관점에서, 톨레랑스를 부정하는 세력과 힘으로 부딪히는 과정에서도 톨레랑스를 포기할 필요가 없으며 포기해서도 안 된다고 본다. 톨레랑스는 싸움에 이성적으로 임하게 할 것이며 목표로 향한 길을 잃지 않게 도와줄 것이다.

물론 톨레랑스는 쉽지 않다. 자기중심적이고, 나와 다른 것을 혐오하고, 약자를 지배하려는 게 사람 본성의 한 축이라면 ‘열린 마음’은 그런 나를 이겨내야만 가능한 것이다. 도달하기도, 유지하기도 어렵다.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이 쉬울 리 없다.

● 두려움과 증오로부터 '열린 마음'을 지킨다

특히 경계해야 할 감정은 두려움과 증오다. 폭력적인 언어에는 파국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 양보를 얻어내려는 치킨게임의 계략이 숨어있을 수 있다. 나에게 욕을 한다고 같이 화내고 증오해도 지는 거다. 그 순간 불관용이 전염되기 때문이다. 이해하고 포용하는 게 도저히 불가능하다면 무관심도 실용적 전략일 수 있다. 웃어넘김으로써 내 마음을 지키는 것이다.

내가 두려움과 증오를 넘어서서 ‘열린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톨레랑스를 부정하는 세력과의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관용과 톨레랑스는 대립하는 게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다. 불관용의 선을 넘어서면 단호하게 싸울 것이라는 결심은, 오히려 그 선 안에서는 내 마음을 더 관대하게 만든다. 관대한 사람이 화나면 더 무섭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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