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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손연재를 보내며…

[취재파일] 손연재를 보내며…
“저도 먹고 살기 힘들어요.”

2013년 6월 9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공항에서 싱긋 웃으며 말하던 그녀의 또렷한 음성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리듬체조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취재하러 갔던 방송기자 몇몇과 함께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눴던 짧은 대화 도중이었습니다.

아시아선수권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한 손연재 선수, 만 19살 그녀가 던진 그 한 마디에 다들 빵 터졌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취재하는 어려움을 토로하던 ‘나이 많은’ 기자 중 한 명이었던 저도 함께 웃었지만, 손연재 선수의 그 짧은 한 문장 속에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이 담겨있는지 이내 깨달았습니다.

제 여권에는 우즈베키스탄 말고도 2012년 런던올림픽 직전에 출장 갔던 벨라루스 비자도 붙어있습니다. 물론 두 곳 모두 리듬체조 취재 때문에 갔는데, 그 두 차례 출장 이후 손연재라는 선수에 대한 조금 다른 시선을 갖게 됐습니다. 두 나라 모두 흔히 말하는 동구권 국가로, 가본 이들은 알겠지만 세계 공용어인 줄 알았던 영어도 잘 통하지 않고 여러 환경이 우리와는 사뭇 다릅니다.

대체로 인터넷 환경이 열악하니 취재해 기사를 송고하거나 촬영한 영상을 보내는 것도 어렵습니다. 리듬체조 대회가 독일이나 포르투갈 같은 유럽 국가에서도 열리지만, 리듬체조가 인기 스포츠인 동구권 국가에서 훨씬 더 많은 대회가 치러집니다.

선수들은 이런 나라들을 끊임없이 오가며 훈련하고 대회를 치르며 실력을 겨룹니다. 우리나라 국가대표들 모두 각기 조금씩 다른 극한 상황에서 훈련하는데, 손연재 선수 역시 나름의 고충이 있었던 겁니다. 게다가 또래 친구들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을 하고 있으니, 먹고 살기 힘들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손연재의 그 말이 더 기억에 남은 이유는 또 있습니다. 손연재 선수는 기자들에게 곁을 잘 내주지 않는 선수였습니다. 인터뷰를 할 때면 예의를 갖춰 모두에게 똑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이 부분은 대부분 기자들에게는 아쉬움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런 성향은 매니지먼트사의 교육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본인의 입지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조심스레 추측합니다.
손연재
모스크바 전지훈련장 취재를 요청할 때마다, “세계 1, 2위가 함께 훈련하는데, 나를 취재하러 한국에서 취재진이 온다는 게 부담스럽다”고 답한 손연재의 말 속에 답이 있습니다. 요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올림픽 메달이 스포츠 스타의 가치를 판단하는 가장 큰 잣대인 우리 사회 분위기를 정확하게 알고 늘 스스로를 낮추고 조심했던 겁니다.

손연재 선수가 은퇴한다는 보도가 나온 뒤, 마치 등 떠밀려 은퇴하는 것처럼 묘사하는 기사가 나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연재 선수는 2014년 10월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딴 뒤 이미 은퇴를 고민한 바 있습니다. 리듬체조 선수로서 몸 상태가 가장 좋은 나이가 스무 살 무렵이라고 하니, 절정은 지났다는 판단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지난해 리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마문 선수가 1995년생으로 손연재보다 한 살 많고, 은메달을 딴 쿠드랍체바는 1997년생입니다. 리듬체조 선수의 수명이 짧다 보니, 연재 선수는 어느덧 모스크바 훈련장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축에 속하는 선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차지한 직후이니만큼, 정상에 섰을 때 은퇴하고자 하는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건 인지상정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도 손연재는 마음을 다잡고 리우 올림픽까지 갔습니다. 메달을 따지는 못했지만, ‘메달밭’에 해당하는 몇몇 인기종목에 치우쳤던 우리의 시야를 넓혀줬고, 우리의 마음을 잠시나마 하나로 뭉치게 해줬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국가대표로서의 역할을 잘 해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리듬체조 관계자들은 내년 유니버시아드와 아시안게임까지 뛰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지만, 연재 선수는 짧고 강렬했던 리듬체조 선수로서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인생 2막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늘품체조’ 시연회 때문에 은퇴하는 순간까지 의혹과 소문만 무성한 것은 안타깝습니다. 현역 선수, 특히 국가대표라는 자리는 박수 받고 빛나는 순간만큼, 견뎌내야 하는 버거운 순간이 많습니다. 이런저런 무거운 짐을 떨쳐내고, 대학생으로서의 삶, 20대 청년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길 바라며 따뜻한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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