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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정치꾼'에 밀렸다"는 세계 대통령

반기문 전 총장이 대선열차에서 내린 이유는?

[취재파일] "'정치꾼'에 밀렸다"는 세계 대통령
**2/1(수)
10:20 새누리당 인명진 위원장 예방 (새누리당 당사)
10:40 바른정당 정병국 대표 예방  (바른정당 당사)
15:00 정의당 심상정 대표 예방 (국회 정의당 대표실)

반기문 전 총장의 2월 1일 일정입니다. 예정대로 일정은 진행됐습니다. 오전부터 차례대로 당사를 방문했고, 지도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동할 때마다 늘 그랬듯 많은 취재진이 반 전 총장을 둘러쌌고, 질문과 답이 오갔습니다. 그렇게 하루 일정이 마무리되는 듯 했습니다. 오후 3시 즈음까지는.

3시가 조금 넘은 시간 국회가 술렁였습니다. 반기문 전 총장이 3시 30분 갑자기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한 겁니다. 참모들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내용을 모른다‘ 였습니다. 입당 발표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나돌았습니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기자회견이 시작됐습니다. 짧은 발표가 끝나고, 또다시 반 전 총장 주변으로 취재진이 엉켰습니다. 답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국 최초 유엔 사무총장의 대권 도전은 막을 내렸습니다.

SBS 취재팀은 1일 낮, 반기문 전 총장의 측근 인사와 점심을 함께 했습니다. 외교관 출신으로 캠프 내 핵심 역할을 했던 그는 반 전 총장의 향후 로드맵에 대한 구체적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캠프가 정비되면 많이 달라질 거라 했습니다. 그 역시 약 세 시간 뒤에 일어날 일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겁니다.

A4지에 적혀있던, 5분 남짓한 불출마 선언문 내용을 미리 알았던 사람은 반 전 총장 본인과 가족, 그리고 최측근 참모뿐 이었습니다. 옆에서 수행하던 보좌진도, 심지어 대변인도, 평소에 반 전 총장을 잘 안다던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그 내용을 알지 못했습니다. 취재진이 만난 실무진의 한결같은 반응은 발표 직전까지 ‘몰랐다’ 였습니다.

반 전 총장은 1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곰곰이 생각한 끝에 발표문 초안을 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측근인 김숙 전 대사를 불러서 가감할게 있으면 정리해달라고 부탁한 뒤 예정된 일정을 소화했다고 합니다. 직업 외교관 출신답게 예정된 일정은 소화하고 예의를 표 하는 게 마땅한 의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수정된 회견문을 받아보고 기자회견장으로 향했습니다. 캠프에 미리 알리지 않았던 건 내용을 알면 주변에서 뜯어 말릴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반 전 총장은 왜 20일 만에 정치권을 떠났을까. 그가 정치권을 향해 남긴 마지막 말을 보면 실마리가 조금 풀립니다.

“순수하고 소박한 뜻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너무 순수했던 거 같다. 정치인들은 단 한 사람도 마음을 비우고 솔직히 이야기 하는 사람이 없더라, 정치는 꾼에게 맡기라고도 하더라. 당신은 꾼이 아닌데 왜 왔느냐고 하더라. 정치는 정말 이런 건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 정치인들의 눈에서 사람을 미워하는 게 보이고 자꾸만 사람을 가르려고 하더라. 표를 얻으려면 나는 보수쪽이다고 확실하게 말하라는 요청을 너무나 많이 들었다. 보수의 소모품이 되라는 이야기다. 정치인이면 진영을 분명히 하라고 요구하더라. 보수만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대통령의 자격이 없다. 나는 보수지만 그런 이야기는 내 양심상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반 전 총장은 개헌을 고리로 한 새로운 연대를 주장했습니다. 이른바 빅텐트를 쳐서 분권형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했습니다. 권력을 나눠 협치를 하자는 제안입니다. 예를 들어 반기문 전 총장 자신은 전공인 외교 분야를 맡고, 경제나 다른 분야는 그 쪽 전문가에게 맡기겠단 겁니다. 이를 위해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2020년 대선. 총선 선거 시기를 맞추기 위해 3년 임기 단축도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텐트 아래 사람을 모으기 위해 여야 가리지 않고 두루 만났습니다.

그런데 반 전 총장을 만난 사람들의 반응은 반 전 총장이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달랐던 거 같습니다. 반 전 총장의 제안에 긍정적인 사람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반응도 많았습니다. 심지어, 만난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반 전 총장의 핵심 측근은 “총장님이 유력 정치인들을 만나 개헌 논의에 대한 진정성을 담아 한 시간씩 이야기했는데 그 자리에서는 알았다고 해 놓고 돌아서서 말을 바꾸는 부분을 보고 기성 정치권의 편협한 이기주의를 느꼈을 것” 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여의도에서 잔뼈가 굵은 ‘정치꾼들’ 앞에서 어쩌면 반 전 총장은 본인 표현대로 너무 순수하고 소박했는지 모릅니다. 자신은 정치교체에 대한 진정성을 담아 뜻을 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받아들이는 정치인들의 태도를 보면서 실망감과 배신감, 동시에 넘을 수 없는 어떤 높은 벽을 느꼈을 런지도 모릅니다.

아마 이런 배경으로 반 전 총장은 불출마 결심을 굳히고 수요일 아침 집을 나섰을 겁니다. 선언문을 가슴속에 품은 채 말입니다. 그런데 발표하는 과정을 보면 조금 긴박했단 느낌이 있습니다. 취재 결과 반 전 총장 측은 오후 두 시 반쯤 새누리당의 한 충청권 의원 쪽에 전화를 걸어 국회 정론관을 기자회견 장소로 잡아달라고 급히 요청합니다.

규정상 현역 의원만 정론관 이용 신청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자회견 한 시간 전에 부랴부랴 장소를 잡아야만 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거란 추측이 가능한 대목입니다, 그 해답은 오전 일정에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시계를 조금 돌려보겠습니다.

**1일 오전 10시 20분 새누리당 당사 방문

새누리당 인명진 비대위원장은 반기문 전 총장을 만난 자리에서 “나이가 들면 미끄러져서 낙상하면 아주 힘들어집니다. 특히 겨울 같은 때는 미끄러워서 여기저기 다니다보면 낙상하기 쉬워서 집에 가만히 있는 게 좋습니다. 저는 그래서 낙상주의로 최근 입장을 바꿨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앞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반 전 총장의 표정은 웃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속은 달랐을 겁니다. 농담처럼 던진 말이지만 농담처럼 들을 수 없었을 겁니다. 반 전 총장은 하루가 지난 뒤 기자들에게 “인명진 위원장이 수인사도 끝나기 전에 앉자마자 보수주의자, 진보주의자를 물어서 당황했다” 고 당시 속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새누리당에 이어 바른정당을 찾았지만 그곳에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 걸로 보입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입당해달라고 구애하던 바른정당의 태도가 며칠 사이 많이 달라진 걸 느꼈을 수 있습니다. 바른정당 당사에서 유리창 너머로 반 전 총장이 정병국 대표, 주호영 원내대표와 오랫동안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구체적 시한을 못 박고 입당 여부를 결정해 달라고 압박했단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렇게 오전에 보수 정당 2곳을 방문한 뒤 반 전 총장은 마포 사무실에서 점심을 시켜먹었습니다. 그리고 생각을 가다듬었을 겁니다. 믿었던 보수 진영의 차가운 반응이, 예상치 못했던 냉대가 어쩌면 불출마 선언 시기를 조금 더 앞당긴 건지도 모릅니다.

이 밖에 정체된 지지율, 불어나지 않는 세력, 자신을 따르겠다고 해놓고 탈당을 머뭇거리는 의원들, 또 본인 생각에 ‘근거 없는 악의적 공세’에 반 전 총장은 과감한 결단을 내렸을 겁니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가 반 전 총장을 20일 만에 대선 열차에서 내리게 만들었습니다.

충청지역 한 현역 의원은 “반 전 총장을 보니 정치는 순수한 사람들이 하는 종목은 아닌 것 같다” 고 말했습니다. 반 전 총장이 ‘정치교체’의 순수한 뜻을 펼치기엔 ‘정치꾼’의 벽은 그만큼 높았던 것 같습니다. 세계의 대통령이라는 유엔 사무총장 10년 경력으로도 대한민국 대통령에 도전하는 일은 쉽지 않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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