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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자비에 돌란의 '단지 세상의 끝'

가족, 나를 사랑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

곽상은 취재파일
영화는 어두운 비행기 안에서 시작합니다. 착잡한 표정의 한 남자. 뒷좌석 꼬마의 성가신 장난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의 내면 독백이 시작됩니다. “10년인가? 정확히 12년 됐군. 못 본 지 10여 년이나 됐지만 두려움을 삭이고 그들을 만나러 간다."

남자의 이름은 루이. 두려움을 삭이고 만나러 가는 ‘그들’은 가족입니다. 그는 자신이 병에 걸려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리러 가는 길입니다. 공항을 빠져 나와 택시를 타자 주인공의 눈에는 낡은 소도시의 풍경이 스쳐 지나가고, 같은 시각 집에서는 화려한 색감의 음식들이 테이블을 채워갑니다. 만나러 가는 이와 기다리는 이의 얼굴 표정을 보여주지 않고도 카메라는 그들의 불안과 설렘, 그 사이 팽팽한 긴장감까지 고스란히 담아냅니다.

이 때 귀청을 두드리며 나오는 노래의 제목은 ‘Home Is Where It Hurts’. 번역하면 ‘집은 아픈 곳이야’쯤이 될 거고, 여기서 ‘아픈 곳’은 ‘마음을 다치는 곳’으로 이해하면 될 겁니다. 영화는 시작 5분 만에 앞으로 전개될 극의 내용을 감각적인 영상과 강렬한 음악에 모두 담아냅니다.
곽상은 취재파일
전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I Killed My Mather, 2009년)’와 ‘마미(Mammy, 2014년)’를 통해 엄마와의 관계를 집요하게 파고 들었던 자비에 돌란(Xavier Dolan)은 이번 작품에서 그 애증의 관계를 가족 전체로 확장해 보여줍니다.

가족을 두고 파리로 떠난 오빠를 동경하면서도 원망하는 여동생, 결혼식에서조차 보지 못한 초면의 시동생을 어색해하는 형수, 아들을 사랑하지만 그만큼 서운함과 비참함을 느끼는 엄마, 그리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불만과 열등감을 표현하는 형까지, 모두 복잡하고 모순된 감정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휘청댑니다.

때문에 재회의 순간은 기묘하고 함께 하는 시간은 힘이 듭니다. 무슨 대단한 낙관적인 기대를 품고 가족을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 상처는 또다시 들쑤셔지고 주인공의 선택은 이번에도 ‘도망쳐 나오는 것’입니다. 감독은 인물 클로즈업의 집요한 반복과 꾹꾹 눌러 채운 대사, 노골적인 음악의 사용을 통해 주인공이 느끼는 질식감과 현기증을 관객에게 손상 없이 전달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런 예민함은 돌란에게 ‘천재 감독’이란 찬사를 안겨줬지만 동시에 ‘치기 어린 감독’, ‘나르시스트’라는 비난의 이유도 됐습니다. 영화를 두고 ‘자기복제’란 지적도 많지만, “나답지 않은 영화엔 관심 없다”는 돌란의 말은 이에 대한 해명이 될 겁니다. 이 작품이 지난해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자 평단은 혹평을 쏟아냈고, 논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관객 여러분은 어떻게 보실지 궁금하네요.
곽상은 취재파일
영화의 원작은 프랑스의 작가 겸 연출가 장 뤽 라갸르스(Jean-Luc Lagarce, 1957~1995)가 쓴 동명의 희곡입니다. 라갸르스는 1988년 처음 이 이야기를 썼지만, 이후 몇 차례 수정을 거쳐 1990년에야 ‘단지 세상의 끝’이란 제목을 붙였습니다. 동성애자였던 작가가 에이즈에 걸린 걸 알게 된 해에 내놓은 작품으로,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둔 루이의 모습에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 투영돼 있습니다.

1980년대 유럽에서 활동한 성적소수자인 예술가. 그가 사회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경험했을지 대충은 짐작이 갑니다. 그러나, 그처럼 시대와 큰 불화를 겪지 않은 누구라도 그가 가진 상처의 일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가족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사랑해주는 사람들’ 즉 ‘나를 사랑하면서도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화 속 노래는 “오 주여, 너무 힘이 듭니다. 내 고난은 신밖에 모르시니”라고 소리치지만, 어쩌면 그 고난은 신보다는 인간에게 더 익숙한 감정일지도 모릅니다. 가족으로 인해 상처받고 애증과 죄책감으로 힘겨워하는 건 당신만이 아닙니다. 영화는 그런 위로를 건네는 것 같습니다.  

(사진출처: '단지 세상의 끝'/제공: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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