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월드리포트] 남아공판 '최순실 게이트'

남아프리카공화국 수도 프리토리아 중심엔 교회광장이 있습니다. 서울 시청 앞 광장 같은 곳이죠. 지난 주말 이곳에 붉은 티셔츠를 입은 수천 명의 시민이 모였습니다. 열댓 명씩 모여서 아프리카 민족 음악을 함께 부르고 덩실덩실 어깨춤을 춥니다. 무슨 축제라고 열렸나 싶은데 실은 반정부 시위입니다.

이들은 저마다 ‘Zuma must go’ 라는 포스터를 들고 있습니다. ‘주마’는 남아공의 대통령 제이콥 주마를 말합니다. ‘GO’의 의미는 ‘가라’보다는 요즘 우리나라에서 많은 국민이 외치는 ‘떠나라. 물러나라’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외침이 큰 데 남아공도 우리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하야 요구의 이유도 우리와 비슷합니다. 다름 아닌 ‘비선 실세’입니다.
프리토리아 교회광장을 가득 채운 대통령 하야 요구 시위대
● ‘최순실 게이트’ 남아공 버전

남아공의 비선 실세 의혹은 그 대상이 ‘재벌’이라는 점에서 ‘민간인’이 ‘호가호위’한 우리와 비슷한 듯 조금 다릅니다. ‘정경 유착’인 거죠. 의혹의 발단은 남아공의 ‘국민권익보호위원회’가 3개월에 걸쳐 조사한 보고서에서 시작됩니다. ‘STATE OF CAPTURE’ (포로가 된 국가 : 어쩜 제목이 제 가슴에 절실히 와 닿는 지)란 355쪽 분량의 보고서에는 주마 대통령과 남아공의 인도계 재벌 ‘굽타’家가 결탁한 정황이 상세히 담겨있습니다. 굽타 일가는 1990년대 인도에서 남아공으로 이주해 제조와 미디어, 컴퓨터, 광산 등 다방면에서 문어발식 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굽타 일가는 요하네스버그의 자택에서 음케비스 조나스 재무부 차관을 접견합니다. 여기서 굽타는 조나스 차관에게 재무부 장관직을 제의합니다. 단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 돈 5백억 원을 주겠다는 겁니다. 그 대가로 그동안 굽타가의 사업을 일일이 간섭하고 훼방 놓던 국고 관련 정책 담당자들을 교체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조나스 차관이 거부하자 당장 5억 원을 집에 들고 갈 수 있게 현찰로 주겠다고 합니다. 단, 돈 가방을 들고 갈 수만 있다면…, 5백억 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굽타가 국책 사업에 얼마나 많은 이득을 거두고 있는지 잘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장관을 일개 개인이 멋대로 정할 정도로 유착관계가 심각했다는 증겁니다. 정경유착의 의혹은 이뿐이 아닙니다. 즈와네 남아공 광업장관이 굽타 일가가 소유한 광산업체가 광산을 매입하는 데 수월하도록 지원하고, 국영발전기업인 에스콤은 이 광산업체에 특혜 수주를 준 정황도 포착됐습니다.

굽타의 광산업체에는 주마 대통령의 아들이 공동 소유주로 올라 있습니다. 오죽하면 남아공에서는 주마와 굽타는 한 몸이라는 뜻으로 이 둘을 ‘줍타’라고 부를 정돕니다. 다만, 이 보고서에는 주마 대통령이 이런 부정부패에 직접 관여를 했느냐는 담고 있지 않습니다. ‘물음표’로 남겨뒀습니다.
'부패한 불사조'란 별명을 가진 제이콥 주마 남아공 대통령
● ‘민주투사’에서 ‘부패한 불사조’로

주마 대통령은 원래 민주투사였습니다. 1942년 줄루족의 본고장에서 출생한 주마는 경찰관이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백인 가정에서 하녀로 일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불우한 가정형편에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눈은 일찍 떴습니다. 17살이던 1959년에 흑백차별 투쟁조직인 아프리카 민족회의 ANC의 일원이 됩니다. 백인 정권을 상대로 민주화 투쟁을 벌이던 주마는 1963년 정부 전복 혐의로 체포돼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수감돼 있던 로벤섬 교도소에서 10년을 복역하기도 했습니다.

출소한 뒤에 남아공을 떠나 스와질란드, 모잠비크, 잠비아 등지를 전전하며 조직 구축과 정보활동을 이끌었습니다. 이후 1990년 ANC에 대한 규제가 풀리면서 귀국하면서 승승장구 정치인생을 달립니다.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주마는 권력의 최상부에 가까워질수록 민주투사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부패의 나락에 빠져듭니다. 2005년 주마는 무기거래와 관련한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에 기소되면서 부통령직에서 물러납니다. 여기에 성폭행 혐의까지 터집니다. 피해자로 지목된 여성이 에이즈 환자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에이즈를 막으려고 샤워를 했다” 라는 무지한 발언으로 한참 동안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민주투사에서 타락한 정치인이 된 주마
2007년 주마는 당시 대통령인 음베키를 제치고 집권당이 된 아프리카민족회의 총재로 선출되면서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합니다. 그리고 2009년 대선에 출마하는데 기묘하게 검찰은 때맞춰 주마의 뇌물수수에 대한 기소를 철회합니다. 우리나 남아공이나 검찰이 정치의 바람에 따라 춤추는 건 비슷한 듯합니다. 주마는 집권당의 후광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되지만 이제는 버릇처럼 된 부패 추문의 꼬리표는 잘라내지 못합니다.

대통령이 되자마자 ‘혼외자’를 가집니다. 그 대상이 친구의 딸이라는 게 더 충격적이었는데 주마는 자기 사생활일 뿐이라며 구렁이처럼 넘어갔습니다. 그러면서 2014년엔 재선에 성공합니다. 이후에도 부정의혹은 끊이질 않습니다.

그 해엔 사저를 보수하는데 나랏돈 170억 원을 쏟아 부었습니다. 보안 강화가 이유지만 농장처럼 넓은 사저엔 수영장과 원형경기장에 심지어 동물원 같은 가축우리까지 새로 생겨났습니다. 실업률이 25%에 달하는 경기 침체에 나랏돈을 물 쓰듯이 퍼다 쓴 대통령의 행태에 남아공 국민의 실망과 분노는 서서히 행동으로 표출됩니다.

지난 4월 남아공 의회엔 주마 대통령의 탄핵안이 표결에 부쳐졌습니다. 결국 사저 수리에서 국고를 마음껏 털어간 게 도마에 오른 겁니다. 거리에서 지금처럼 주마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탄핵안은 부결되고 주마는 살아남았습니다.

온갖 부정부패와 추문의 의혹이 끊이질 않는 주마지만 신기하게도 단 한 번도 재판에 선 적이 없습니다. 주마 뒤에는 남아공의 민주화를 이끌면서 지금의 흑백평등의 사회를 이룩한 ‘아프리카 민족회의’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패한 불사조’란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 “난 이미 10년이나 감옥에서 썩었다”

이번에도 주마는 “난 10년이나 감옥에 있었던 몸이다. 감옥에 가는 게 두렵지 않다”며 해볼 테면 해봐라는 식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이렇게 온갖 추문에도 질긴 정치 생명을 이어온 주마지만, 이번에 분위기가 좀 다릅니다. 무엇보다 주마의 든든한 배경이 돼준 단체와 인물들이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남아공의 민주화의 상징인 넬슨 만델라가 설립한 넬슨 만델라 재단은 “주마 대통령이 사익을 위해 남아공의 국가 제도인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는 비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인종차별과 흑백평등에 초첨을 맞춰온 넬슨 만델라 재단이 정치적 이슈에 직접 언급을 한 건 상당히 이례적입니다. 그 만큼 비난 여론이 커지고 있다는 반증이겠죠.

집권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에서조차 주마의 사퇴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만델라의 민주화투쟁 동지이자 아프리카민족회의의 대표적인 활동가인 카스라다는 “주마 당신이 옳은 일을 선택하리라 믿는 것은 지나친 기대인가?” 라고 물으며 “민중의 의지에 복종하고 사임할 것으로 호소한다”는 공개 편지를 주마에게 보냈습니다.

남아공 야당이 주도해 오는 10일 의회에선 주마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안이 다시 한 번 표결에 부쳐집니다. 이번엔 집권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 의원 중 일부도 불신임안 찬성에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남아공 환율표 / 남아공은 경기 침체로 달러당 랜드화 가치가 갈수록 폭락하고 있다

● 부패한 나라님, 텅 빈 나라곳간

대통령의 퇴진 요구는 단순히 부정부패 한 단면에서 비롯된 것 같지 않습니다. 대통령 본연의 책임인 나라 살림을 엉터리로 하고 있다는데 더 큰 불만이 있어 보입니다. 저는 한 나라의 경제 형편이 어느 상황인지를 단적으로 보기 위해 환율 변동을 자주 참고 합니다.

고정환율에선 절대 참고사항이 안 되고 변동환율에서도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순 없지만,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의 경우 이 환율 변동은 그 나라 경제의 흐름을 한 눈에 보게 해주기 때문이죠. 2009년 달러당 남아공 랜드화 가치가 1 : 7 정도였는데 올해는 1 : 16까지 치솟았습니다.

랜드화 가치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는 건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단적으로 국제사회가 남아공 경제를 못 믿고 있다는 반증이 됩니다. 그만큼 남아공 경제가 추락하고 있다는 뜻이죠. 실업률이 25% 달하는 경제 침체의 불만은 집권당에 대한 지지하락으로 이어집니다.

지난 8월 지방선거에서 아프리카 민족회의는 54%의 득표율로 제 1당의 위치를 유지합니다. “이번에도 승리”라고 외쳤지만 실상은 1994년 만델라가 정권을 획득한 이후 22년 만에 최악의 득표율이었습니다. 심지어 행정수도 프리토리아와 경제수도 요하네스버그에서 과반확보에 실패하는 ‘실질적인 참패’를 당했습니다. 그만큼 현 정권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커져가고 있다는 겁니다.

아프리카민족회의의 최고위원들이 주마에 대한 지지를 선언해주면서 현재로선 주마에 대한 불신임안도 부결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2019년에 임기가 끝나는 주마가 지금 당장 권좌에서 물러날 확률은 적어 보입니다.

하지만, 지방선거가, 동지의 비난이, 하야 시위가 말해주듯 넬슨 만델라의 그늘 아래 철옹성 같던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이미지는 갈수록 퇴색되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맑은 물일지라도 고이면 썩게 마련입니다. 아프리카 민족회의도 그 점을 알고 있겠죠. 국민, 특히 남아공 인구의 다수인 가난한 흑인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정권을 쥔 정당으로서 국민적 분노와 반감이 더 거칠게 일고 잦아들지 않는다면 결국 주마를 버리는 카드를 쓸지도 모릅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