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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통장을 허(許)하라"

대포통장 방지 vs 금융편리, 금융당국은 고민 중

[취재파일] "통장을 허(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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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대한뉴스. '생각하시는 바로 그 목소리'로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저축이야말로 물가를 안정시키고, 개인과 나라 살림을 살찌우는 길입니다"

1980년대까지 거슬러가지 않더라도 예전에는 누구나 통장을 만들기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학생들도 쉽게 통장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저축하는 법, 아껴쓰는 법을 배우게 한다며 오히려 통장발급을 적극 권장하기도 했습니다. 저축이 '자본 없는 나라'에 큰 보탬이 되기도 했고, 절약이 '자원 없는 나라'에 부를 쌓는 방법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특히 20~30대 학생이나 취업준비생들이 통장을 만들기가 힘듭니다. 아직 취직 못했는데, 자꾸 "월급명세표랑 재직증명서가 필요합니다"라는 말만 반복하는 곳도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통장만들기가 힘들어졌을까요?

● "통장 만들려면 고향 가세요"
입출금 통장을 만들기 위해 은행 서너 곳을 돌아다닌 대학생
한 20대 대학생이 시중은행에서 입출금 계좌를 만들려고 했더니 2가지를 물어봤습니다. 하나는 직장에 다니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디 사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직장에 다니면 재직 증명서를 내야하고, 이 근처에 살면 등본이나 초본을 떼어오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규제가 강화돼서 발급이 어렵습니다. 아직 취직을 못하셨으면 학교 근처에서 만드세요"라고 통장 개설을 거절했습니다.
통장 개설 시 재직 증명서 요구하는 은행
또 다른 은행을 가봤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거주하고 계신 곳 근처에 가서 개설하시는게 좋고요. 주민등록 (주소지) 있는 곳에 가시면 제일 좋지요" 이 학생이 "주민등록상 주소가 대전입니다"라고 했더니 "주소를 안 옮겨놓으셨구나"라고 답합니다. 이 학생은 통장을 만들기 위해 대전을 가야할까요? 역시 이 은행에서도 통장을 만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은행은 "일단 한도가 제한된 계좌를 만들어 놓고요, 휴대폰 요금 자동이체 같은 걸 석 달 정도 하시면 정상 계좌로 만들어 드릴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금융거래 내역 확인을 핑계로 일종의 '마케팅'을 하는 겁니다. 

● 금융당국, "대포통장의 절반이 20~30대 계좌"…통장개설 조건 강화

이렇게 통장 만들기가 힘들어진 것은 보이스피싱과 자금 세탁에 이용되는 대포통장을 막기 위해 금융당국이 통장 만드는 것을 어렵게 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직장없는 젊은이들이 너무 불편하지 않느냐"라는 말에 금융감독원 담당자들은 이런 반박을 내놓습니다.
금융당국의 입장
 "20~30대 계좌가 전체 대포통장의 절반(정확히 48.6%)을 차지합니다"
 "실제로 통장 발급을 어렵게 한 뒤에 대포통장이 확 줄었습니다"
 "외국도 모두 통장발급을 어렵게 하는 추세입니다"

또 다른 금감원 고위간부는 "젊은이들을 무조건 범죄자로 보는 것 아니냐"는 말에 "국정감사장에서도 한쪽은 대포통장을 막지 못한다고 뭐라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통장 만들기 불편하다고 대책을 내놓으라고 한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라며 되묻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금감원은 이 정책이 대포통장을 막는데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금감원이 근거로 내놓은 통계는 이렇습니다. 대포통장은 2014년 하반기 54,019개였는데, 2016년 상반기에는 21,680개로 줄었습니다. 물론 2만여개의 대포통장 적발 건수의 감소가 모두 통장발급을 어렵게 해서 줄어든 것은 아닐 겁니다. 그동안 단속도 열심히 했고, 대포통장 방지 홍보도 열심히 했기 때문일 겁니다. 여하튼 금융감독원은 "대포통장을 막기 위해서라도 통장개설을 예전처럼 돌려놓을 생각은 없다"는 큰 틀의 입장을 바꾸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 "발급 기준도 은행마다 달라"…'통장고시'에 '통장난민'까지

하지만 학생들은 "범죄자 취급하는 것 같다" "취직해야 발급해준다는 게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언짢은 기분보다 더 큰 불만은 은행마다 기준이 다르다는 겁니다. 취재 중에 만난 한 학생의 얘기를 전해드립니다.

과 학생회장을 맡고 있다는 한 학생은 '공금 통장'을 만들기 위해 은행을 찾았다가 황당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은행 직원이 공금 통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학생회장이라는 증명서를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아니면 통장을 만들어줄 수 없다고 했죠. 학생회장 증명서는 들어보지 못해 당황했죠" 그 학생은 없는 증명서를 만들수도 없어 결국 당선 공고와 신분증을 보여주고 은행 직원에게 부탁을 해 학과 통장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은행들이 얼마나 '문서'에 집착하느냐는 걸 보여주는 일화이면서 동시에 은행들의 개설 기준이 애매하다는 걸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합니다. 어떤 은행은 재직증명서 없으면 안해주고, 어떤 은행은 그나마 융통성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왜 제각각일까요?

'관치금융' 부담감 때문인지, 금융당국이 구체적으로 통장개설 기준을 지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금융거래 목적을 확인한 뒤에 통장 개설을 해줘라"고만 지시를 했습니다. 금융거래 목적을 확인하는 방법을 은행들이 제각각 자율적으로 정하다보니 일관성이 없어진 겁니다.

그러다보니 요구하는 서류도 다르고, 여기저기 다녀보면 되는 곳도 있고, 안되는 곳도 있는 겁니다. 통장을 만들기 위해서 은행 지점을 여기저기 전전한다고 해서 '통장 난민'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 때문입니다. 물론 발품 판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통장만들기가 고시 합격 만큼 어렵다고 해서 '통장고시'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해할 만합니다.
통장 고시, 통장 난민
이런 통장개설 문제점에 대해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은행들이 제각기 다른 엄격한 기준을 갖고 대응을 하다보니까 기준도 다르고 제각기 요구하는 서류도 다르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매우 혼란스러운 겁니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의 인터뷰
● 금융당국은 고민 중…"대포통장도 잡고, 금융거래도 편리하게" 

금융당국은 '한도계좌'를 대안으로 내놨습니다. ATM기로는 최대 하루 30만원 밖에 뽑지 못하고, 창구에서도 최대 100만원까지만 인출할 수 있어 '소액통장'이라고 불리는 계좌입니다. 하지만 정상계좌와 달리 제한이 있기 때문에 불편합니다. 원하는 만큼의 이체와 출금같은 정상적인 금융생활은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 통장을 소개하고 운영하는 방식도 제각각입니다. 이 계좌를 몇 달 쓰면 정상계좌로 바꿔주는 곳도 있지만, 이 통장을 몇 달, 몇 년 쓰든 원래 요구한 서류-재직증명서, 근로계약서-를 가져와야 한다는 은행도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 계좌에 휴대폰 자동이체 걸어놓으면 정상계좌로 바꿔준다고 마케팅을 하는 은행도 있었습니다.

또 은행들이 왜 과도한 몸사리기를 하는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알려진 것과 달리, 대포통장을 만들어준 창구 직원 개개인이 불이익을 받지는 않는다는 게 시중은행의 공식 입장입니다. 하지만 은행 계좌의 0.2%, 그러니까 1,000분의 2를 넘는 대포통장이 나왔을 때는 기관 경고를 받습니다. 다시 말해 금융당국으로부터 은행이 경고를 받는 겁니다. 어떤 은행원이 몸을 사리지 않겠습니까.
 
금융안전, 중요합니다. 아직도 보이스피싱은 계속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통장개설 조건 강화'는 보이스피싱을 막는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 결코 '전부'는 아닙니다.

마치 모든 젊은이들을 범죄자 취급하고 통장개설을 어렵게 하는 게, 대포통장과 보이스피싱을 막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방법인 것처럼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라며 막무가내로 큰소리치는 건 금융당국이 가져야할 올바른 자세는 아닐 겁니다. 

다행히 금융감독원은 "금융안전과 편리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쓰고 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바로 잡기 위해 은행들과 협의를 해보겠다"고 공식 인터뷰를 했습니다. 어떤 해법을 내놓을지 지켜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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