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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유독 승마에 신경 쓴 청와대의 자업자득

[취재파일] 유독 승마에 신경 쓴 청와대의 자업자득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가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있습니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는 연일 국정감사를 통해 문화체육관광부와 소관기관을 매섭게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설립과 기부금 모금 과정에서 현 정권이 특혜를 준 것 아니냐며 강도 높게 추궁한 것입니다.

야권과 일부 언론이 제기하고 있는 각종 의혹에 대해 청와대와 문체부는 ‘근거 없는 유언비어’라며 일축하고 있습니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과 관련된 비리가 실제로 있는지, 아니면 여당의 주장대로 대통령에 대한 음해에 불과한지에 대해서, 저는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청와대가 이런 의혹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을 자초하고 빌미를 제공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모든 것은 승마에서 비롯됐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 지 2개월이 된 지난 2013년 4월 경상북도 상주에서는 마사회컵 전국 승마대회가 열렸습니다. 여고부 마장마술 경기에서 A선수가 1위, 정윤회-최순실 부부의 딸인 정 모선수가 2위를 차지했습니다.

이 대회 이후 극히 이례적인 일이 연이어 벌어졌습니다. 당시 승마 심판진은 두 차례나 경찰서의 조사를 받았습니다. 안민석 더불어 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대회 바로 다음 달인 5월에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실에서 대한승마협회를 조사하라는 지시를 문화체육관광부에 내렸다고 합니다.  
승마
마장마술 경기는 피겨스케이팅처럼 일정하게 정해진 동작을 얼마나 정확하고 아름답게 하는가를 심판이 주관적으로 평가하는 경기입니다. 따라서 심판진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고의로 점수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 한 경찰이나 문체부 공무원이 조사한다고 해서 순위가 뒤바뀔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대한승마협회는 대한체육회 산하 50여 개 경기 단체 가운데 하나입니다. 국민적 영향력이나 한국스포츠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따지면 축구나 야구 등 인기종목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불가사의하게도 유독 승마에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이 대목과 관련해 대한체육회의 한 관계자는 SBS와의 전화 통화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승마대회에서 판정 문제가 생기거나 승마협회에 어떤 비리가 생기면 대한체육회 감사실에서 가장 먼저 실상을 조사하는 것이 당연한 절차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문체부 고위 간부들이 직접 나섰기 때문에 우리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다른 종목에서는, 마사회컵 전국승마대회보다 훨씬 큰 문제가 생겨도 청와대가 직접 문체부에 진상조사를 지시한 적은 거의 없다. 간혹 문체부가 대한체육회를 제쳐놓고 자체적으로 조사하는 일은 있어도 청와대가 문체부에 지시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더욱 불가사의한 일은 그 뒤에 터졌습니다. 진상 조사를 맡았던 노태강 문체부 체육국장과 진재수 체육정책과장이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나쁜 사람’으로 지목돼 한직으로 좌천됐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유진룡 당시 문체부 장관의 폭로에 의해 드러났습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스포츠 비리 척결에 소극적이어서 경질된 것”이라고 뒤늦게 해명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노태강 체육국장은 2013년 8월 26일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스포츠계의 비정상적인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 체육단체 운영 실태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에 착수하겠다. 협회의 사조직화 여부, 선수 선발과 직원 채용 과정에서 불공정성 여부, 심판 자질 향상과 공정한 심판 판정에 대한 장치 마련 여부 등에 감사의 초점을 맞추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노 국장은 또 “오는 28일 제2차관 주재로 '스포츠공정 태스크 포스팀'도 발족해 이번 감사를 통해 비리가 적발된 단체에 대해서는 고발 조치 등 민·형사 책임을 묻는 한편 체육단체의 공정성과 투명성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필요한 제도를 마련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로부터 3일 뒤인 8월 29일에 청와대 서미경 문화체육비서관이 자리에서 물러났고 다시 4일 뒤인 9월 2일에 노태강 국장과 진재수 과장은 갑자기 경질 통보를 받았습니다. 스포츠 비리 척결에 한창 앞장서고 있던 두 사람이 납득할 수 없는 인사 조치를 당한 것입니다. 이 런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스포츠 비리 척결에 소극적이어서 경질했다”는 청와대의 추후 해명은 설득력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대적인 감사에 착수하겠다고 선언한 지 7일 만에 어떻게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겠습니까?

이 사태 이후 대한체육회를 비롯한 국내 체육계에서는 “승마 선수인 정 모양이 최순실 씨의 딸이 아니었으면 과연 이런 일이 생겼겠는가? 만약 정 모양이 일반인의 딸이었다면 청와대가 나서서 문체부 고위 간부에 진상 조사를 요구했겠는가? 또 스포츠 비리 척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던 문체부 공무원 2명이 한직으로 좌천됐겠는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노태강-진재수 두 사람은 정윤회-최순실 부부와는 일면식도 없는 관계였습니다. 따라서 대한승마협회 조사와 관련해 사실을 왜곡해 청와대에 보고했을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제가 문체부와 대한체육회 관계자를 상대로 취재한 결과 두 사람은 승마 관련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최대한 객관적인 보고서를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했다고 합니다. 

청와대는 왜 유독 여고생 승마 선수의 문제와 관련해 문화체육관광부 고위 간부에게 이례적으로 진상 조사를 직접 지시했는지에 대해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어떠한 답변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또 노태강-진재수 두 사람을 전격 경질한 것에 대해서도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찌됐든 ‘승마 사건’이후 최순실 씨는 체육계는 물론 관계와 재계에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으로 인식됐습니다. 그 어떤 경력도 알려지지 않은 자연인인 그가 대한민국 권력 서열 1위라는 웃지 못 할 얘기까지 나돌았습니다. 현재 야권과 국내 일부 언론은 최순실 씨 본인과 그의 딸 정 모선수와 관련된 온갖 특혜와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하고 있습니다. 청와대가 이런 사태에 빌미를 제공한 것이 아닌지 뼈아프게 성찰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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