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당신 가족이 '감정노동자'라도 그렇게 '욕'하시겠습니까?

[취재파일] 당신 가족이 '감정노동자'라도 그렇게 '욕'하시겠습니까?
관련 뉴스
어머니는 제가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지금까지 한 대형마트 고객센터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환불이나 교환 업무는 물론, 고객 불만 사항을 접수해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업무도 고객센터의 몫입니다.

가끔 어머니가 굳은 표정으로 퇴근해 잠도 잘 이루지 못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부분은 고객 응대 과정에서 겪은 불편한 일들 때문입니다. 한번은 끙끙 앓기까지 하셔서 이유를 물었습니다.

한 30대 중반쯤 되는 여성이 영수증 없이 환불을 요구해 어렵다고 했더니 '마트에서 일하는 주제에 말하는 게 건방지다'고 욕설을 하며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

제가 직접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일인지까진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딸의 입장에선, 가슴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 "상대의 마음을 짓밟는 일…그것도 강력범죄죠"

보험사 전화 상담직원을 상대로 5년 간 150회 넘게 욕설과 폭언을 이어온 50대 남성 사건을 취재하면서 잠 못 이루시던 어머니가 떠올랐습니다. 얼굴을 마주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마트 고객센터 직원이나 보험사 전화상담원이나 '감정노동자'인 건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51살 박 모 씨는 지난 2011년부터 지난 8월까지 한 보험사 전화상담원 및 보상과 직원을 상대로 154회에 걸쳐 욕설과 폭언, 규정에도 없는 보상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보험비 지급이 늦어진다며 항의하고, 자신의 이름이나 사는 곳을 잘못 말했다고 욕설을 하고, 항의하느라 통화를 오래했으니 그에 대한 보상을 하라고 강요하는 등 박 씨의 '갑질'은 형태도 다양했습니다.

사건을 수사한 강명구 서울 남대문서 강력5팀장은 지난 6월 첩보를 입수해 이 보험사를 직접 찾아갔다고 합니다. 마침 보험사 측에서도 박 씨의 집요한 막말과 욕설로 직원들의 피해가 잇따르자 더이상 참을 수 없다며 법적 조치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강 팀장은 수사를 시작하기 전 "업무방해 범죄를 강력팀에서 수사를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수사를 시작한 배경에는 다른 회사의 콜센터 상담둰으로 일하는 가족이 있었고, 일부 고객들의 폭언과 욕설이 어떻게 상담원의 마음을 짓밟는지를 봐온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강 팀장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상대에게 함부로 말을 하고 욕설을 하는 건 상대의 마음을 죽이고 짓밟는 일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을 짓밟는 것도 (비록 적용 혐의는 업무방해지만) 강력범죄라고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박 씨는 경찰 조사에서 "모든 게 내 잘못이다"라고 진술했다고 합니다. 부당한 일인줄 알면서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더 황당한 건, 박 씨가 특정 제과점의 기프티콘만 보상으로 요구했는데, 그 이유가 자신의 부인이 그 제과점을 좋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가족을 아낄 줄은 알면서 누군가의 가족일 상담원들의 마음에는 큰 상처를 낸 겁니다.

● 신고 주저하는 기업들…"친절교육 만큼 직원 인권 보호도 중요"

지난 27일 8시 뉴스를 통해 이 사건이 보도된 후 많은 분들이 '보험사는 5년 간 방치한 것인가'라고 문의를 주셨습니다. 일부 시청자께서는 '방치한 보험사도 처벌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이 부분은 기사에서 충분히 설명이 되지 못해 생긴 오해가 일부 있어 설명드립니다.

박 씨에게 폭언 피해를 당한 상담원은 13명인데 모두 같은 곳에서 일하는 분들은 아니었습니다. 보험사 소속인 것은 맞지만 서울, 대전, 대구, 광주, 전주지부 등 전국에 흩어져 있었던 겁니다. 게다가 피해 기간이 5년이 넘다 보니 한 사람에 의해 여러명의 상담원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기까지가 오래 걸렸다고 합니다. 

경찰은 해당 보험사에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고객 갑질 범죄에 대한 첩보가 왕왕 접수되지만 기업에서 신고나 수사협조를 꺼려 무산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강 팀장은 "다른 경찰서에서도 비슷한 사건을 수사 중인 것으로 아는데, 해당 회사가 협조를 꺼려서 상담원들이 신고를 못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 경우에 비하면 이 보험사는 녹취파일 등 관련 자료를 적극적으로 협조해줬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아쉬운 점은 있습니다. 보험사를 포함한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한 현행 감정노동자보호법에는 직원이 이런 피해를 당했을 경우 해당 고객에서 분리시키고, 상담 치료 등을 지원할 것을 권고하고 있지만 그런 조치는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고객이 부당한 요구를 하거나 폭언을 해도 되도록이면 직원에게 참으라고 요구하는 편입니다. 직원을 참게 하기는 쉽지만, 고객을 설득하거나 싸워 이기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성종 감정노동자전국네트워크 정책실장은 SBS와 인터뷰에서 "현행 형법으로도 이런 고객 갑질은 처벌할 수 있다. 금융기관의 경우는 감정노동자보호법도 실행되고 있다. 문제는 기업의 의지다. 기업이 적극적으로 사법조치를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정훈 서울노동권익센터 연구위원은 "기업이 친절교육은 시키지만 정작 직원들이 이런 피해를 입을 경우에 대한 조치나 대응 교육에는 소홀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물론 기업의 서비스나 제품에 대한 합리적인 문제제기는 고객의 권리입니다. 하지만 그 문제제기가 상대의 마음과 인격까지 짓밟아도 된다는 규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진부하지만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내 가족이라고 생각해보면', 답은 정해져있습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