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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정치인과 단식

정치인의 단식 원조는 단연 YS, DJ 입니다. 1983년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YS는 정치활동 규제에 걸린 ‘야인’이었습니다. DJ는 미국으로 망명간 상황. 국내에 있던 YS는 가택연금으로 집밖으로 한발 짝도 못나갔습니다. 83년 5월 장남 김현철의 결혼식 날짜가 결정됩니다. 전두환 정권은 딱 하루 결혼식 참석을 위한 YS 외출을 허가합니다.
김영삼, 단식 투쟁(1983)
YS 특유의 정치적 승부수가 나옵니다. “딱 하루 외출? 내 아들 결혼식에 안가고 말끼다. 내가 오늘 나갔다 오면 전두환이는 내가 가택연금 아니라고 선전할거 아닌가? 정치활동 재개 허용까지 내 목숨 걸끼다”

그렇게 시작한 단식은 23일 이어졌습니다. 몸무게가 14킬로그램 이상 빠지면서 YS는 혼절했고 전두환 정권은 YS를 서울대병원에 강제입원시킵니다. YS가 끝내 단식을 중단하지 않자 병실 문 밖에서 불고기와 전을 구우며 냄새를 들여보내는 수단을 쓸 정도로 정권 차원에서 YS 단식은 매우 곤란한 사안이었습니다.

위중한 상황이었지만 당시 신문에는 YS 단식 보도가 단 한줄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철저한 언론통제 때문이었죠. 기사 행간에 ‘재야인사 문제’ ‘정치권 현안’이라는 표현이 간혹 나왔는데, 국민들은 이 ‘문제와 현안’이 ‘YS단식이구나’하고 알아서 해석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단식 23일만에 전두환은 결국 YS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YS 가택연금 해제 정치인 활동 규제 해제. ‘단식 끝에 YS가 이대로 죽으면 영웅이 된다’ 정치적 계산 하에 나온 조치였습니다. 결국 YS의 단식은 87년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 운동의 토대가 됐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YS 단식투쟁은 87년 5월 이기택 민주당 총재 단식으로 이어집니다. 전두환이 4·13 호헌 조치로 군사정부 유지를 시도하자 이기택 총재는 호헌 철회를 요구하며 15일 동안 곡기를 끊었습니다. 노태우 후보의 6,29 선언, 즉 직선제 수용을 이끌어낸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김대중 단식 투쟁(1990)
DJ는 1990년 평민당 총재 시절 13일 단식 기록을 세웠습니다. 87년 직선제 선거에서 야권 단일화 실패로 정권교체를 못하고 다시 야당으로 전락한 상황. 노태우 정권은 여소야대 구도를 돌파하기 위해 내각제 개헌을 추진했습니다. DJ는 이대로 가면 정권교체가 영구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목숨을 건 정치적 담판을 시도합니다. “내각제 반대와 지방자치제 도입이 관철될 때까지 단식한다” DJ의 초강수에 노태우 정권은 결국 내각제를 포기하고 자방자치 도입을 약속합니다. 현재 지방자치제의 초석이 마련되는 순간입니다.
안양교도소로 이동 중인 전두환(1995)
정치인 단식의 아이러니는 5년 뒤인 1995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옥중단식으로 재현됩니다. 집권 에 성공한 YS는 5공청산을 시도하고 전두환을 구속합니다.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전두환은 정치탄압으로 규정하고 단식을 시작합니다. 20일을 넘기며 상태가 악화되자 전두환은 경찰병원으로 이송됩니다. 수액 주사를 거부하며 버티다 결국 혼절, 27일만에 단식을 포기합니다.

기절했다 깨어난 전두환은 팔에 꽃힌 수액 주사를 보며 “31일 채울라 했는데, 결국 주사 꽃았나?”하며 탄식했다고 합니다. YS의 단식으로 정치적 압박을 받았던 전두환이 YS를 상대로 옥중 단식투쟁을 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1997년 DJ 집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진 후 노무현 정권까지 만 10년. 정치인의 단식은 각종 정치적 요구의 단골메뉴가 됐습니다.

야당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는 2003년 노무현 정권 측근비리 특검 도입을 요구하며 10일 동안 단식합니다. 최 대표를 문안 온 YS는 “나도 단식 해봐서 아는데, 굶으면 죽느데이!”라는 어록을 남겼습니다. 그 뒤 최병렬 대표가 허연 국물을 마시는 장면이 목격되면서 곰국을 마신다는 논란이 벌어졌는데, 쌀뜬물로 밝혀지는 해프닝까지 벌어졌습니다. 최병렬은 국회에서 특검법 통과라는 성과를 내고 단식을 중단했습니다.

2007년 열린우리당 소속 천정배 의원은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와 함께 한미FTA 비준에 반대하며 단식했습니다. 천 의원은 25일, 문 대표는 26일 단식. YS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같은 해 민주노동당 현애자 의원은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며 27일 단식해 정치인 공식 단식으로선 기록 보유자가 됐습니다.
한미 FTA 반대를 주장하며 단식농성 벌인 천정배 (2007)
이후 이명박 정권 시절 단식은 서청원 친박연대 대표의 옥중단식이 있었습니다. 공천비리로 돈을 받았다는 기소 내용에 항의하며 20일 넘게 옥중단식을 벌였는데, 서청원의 단식을 기억하는 국민은 별로 없는 듯 합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선 재작년 문재인 정청래 의원이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였는데, 당시 ‘유민아빠’ 김영오씨의 40일 단식에 눌려 크게 각인되진 않았습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한 문재인 (2014)
지난 십여 년 동안 국회에선 수많은 단식투쟁이 이뤄졌는데, 빼트릴 수 없는 단골 의원이 있습니다. 횟수를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잦은 단식농성을 벌였는데, 국회 내 별명은 ‘카스테라 단식 의원’이었습니다. 중간중간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화장실 갈 때마다 카스테라를 먹고 나온다는 의심 때문이었습니다. 진위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정세균 의장 사퇴 요구하며 이정현 단식 (2016)
이밖에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정치인 단식이 있었습니다. 하나 하나 해당 정치인들에겐 ‘목숨을 건’ 단식투쟁입니다. 딱 한가지 없던 기록이 생겼는데, 바로 집권여당 대표의 단식입니다. 이정현 대표은 “정세균 국회의장이 사퇴하던가 이정현이 굶어 죽든가 끝장을 낼겁니다”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정 의장은 사퇴할 의사가 전혀 없다 하니, 단식을 중단할 명분도 현재로선 보이진 않습니다.
 
미디어법 처리를 반대해 단식농성한 정세균 (2009)
마지막으로 단식 기록을 보유한 정치인이 한 명이 빠졌네요. 바로 정세균 국회의장입니다. 2001년 DJ 정부 시절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이 거대야당 한나라당에 의해 가결처리됐을 때, 2009년 역시 한나라당이 미디어법을 강행처리했을 때. 정세균 의원은 단식을 통해 항의의사를 표시했습니다. 정확히 며칠이나 단식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어째든 현재 단식중인 이정현 대표보다 단식 경험에 관한 한 정세균 의장이 ‘선배’인 셈입니다.

정치인과 단식의 역사를 정리하다 보니, 정치인 단식의 명분과 요구사항에도 큰 변화가 느껴집니다. YS DJ는 민주화라는 큰 그림을 그리는 수단으로 단식이라는 최후 수단을 선택했습니다. 최근 벌어지는 단식은 어떤 정치적 의미로 기록되고 평가될지 자못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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