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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4천6백만 권 팔린 '수학의 정석'…50년 장수의 비결은?

[취재파일] 4천6백만 권 팔린 '수학의 정석'…50년 장수의 비결은?
● 수학의 정석 초판본

수학의 정석을 지은 홍성대 선생은 연세에 비해 건강해 보였다. 저음이지만 카랑카랑한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고 우리나라 수학교육의 문제점을 이야기할 때는 비장함마저 엿보였다. 80년대에 대학입시를 치른 기자도 예외없는 수학의 정석 애독자였다.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기초 풀이과정을 익히면 다소 난이도가 있는 연습문제를 풀며 시험에 대비했다. 다른 참고서보다 가로, 세로가 작은 사이즈에 두툼한 수학의 정석은 몇 권을 층층이 책상 위에 쌓으면 훌륭한 베개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입시 수학에서 만큼은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던 정석의 저자를 만난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었다.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지만 기자도 홍성대 선생의 제자라고 봐도 무방할테니까. 
● 1963년 홍성대 선생이 엎드려서 책 집필하는 모습

'수학의 정석'의 탄생은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울대 수학과에 재학 중이던 홍성대 선생은 빠듯한 가정형편에 등록금과 하숙비를 대기에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중고생들을 상대로 과외교사를 했고 학원강의에 설 자리가 있으면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과정에 홍씨는 수학 교재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고 했다. 수학의 원리를 제대로 설명하는 참고서가 없다는 게 못내 아쉬웠다.

직접 책을 쓰기로 결심한 홍 선생은 광화문 일대 서점을 샅샅이 뒤졌다. 일본과 미국, 유럽 수학 교과서의 문제를 수집하고 때때로 떠오른 자신의 아이디어를 메모해 두었다가 새로운 문제를 만드는데 활용했다. 홍 선생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야말로 책을 집필하는데 '몰두'했던 시기라고 말한다.

문제 하나를 완성하고 잘 시간이 되었거니 시계를 보면 새벽 서너시가 훌쩍 넘어 있을 정도로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흐른 뒤 수학의 정석이 탄생했다. 당시 돈으로 한 권에 350원짜리 새 수학 참고서는 나오자마자 공전의 히트를 친다. 7판까지 찍어내며 첫 해에 3만 5천부가 팔려나갔다.

이후에도 승승장구 수학의 정석은 독보적인 수학 참고서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50년 간 4600만 부가 판매되었고, 혹자가 계산해보니 책을 차곡차곡 쌓으면 에베레스트산 높이의 156배가 된다고 한다. 국내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 수학의 정석, 장수의 비결은 뭘까?
지금 보아도 수학의 정석은 요즘 시험문제풀이 형식과는 조금 다른 책이다. 5지 선다를 기본으로 하는 수능시험에서 수학문제의 풀이과정이나 사고의 논리성은 평가 대상이 아니다. 오로지 정답만을 찍어내면 그것으로 족하다.

홍성대 선생은 그런 점을 매우 아쉬워했다. 그래서 정석에 담긴 문제의 유형을 조금 바꾸더라도 논리적 사고를 키우겠다는 궁극적인 목표, 쉽고 재미있게 수학에 다가가도록 한다는 원칙과 철학은 포기하지 않았다. 홍 선생은 대학별 고사가 폐지되면서 수학의 경우 문제풀이 과정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수학교육을 망치고 왜곡시킨다고 역설한다.

수학이라는 것은 결과물인 답보다는 답을 이끌어내기까지의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입시제도 변화 과정 속에서도 시험만 대비하는 쪽으로 책을 개정하지 않고 원리와 원칙을 지키는데 신경을 많이 썼다고 했다.

올해 우리 나이로 여든인 홍성대 선생은 최근 새로운 집필진을 구성하기 전까지 본인이 직접 개정판 집필 과정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 목 디스크에 걸려서 9시간 넘는 대수술을 받기도 했고 그 과정에 잠시 호흡이 멈추는 위기상황을 맞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홍성대 선생은 많은 사람들이 아는대로 학습서 재벌이 되었다. 수학의 정석으로 쌓은 부는 그가 하고 싶어 했던 교육사업에 투여했다. 전주의 명문 상산고등학교를 설립해 후학을 양성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산간, 도서 벽지의 학생들을 위한 자선사업도 시작했다고 한다.

그 역시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배우고자 하는 욕망을 채우기 힘들었던 과거를 생각하며 전교생이 50명 전후인 오지의 학교들을 찾아다니며 선행을 베풀고 있다. 벌써 8곳을 돌며 어린 학생들에게 용기를 주는 강연을 펼치고 직접 서명한 수학의 정석을 나눠주고 있다.

그에게 수학의 정석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떄 서슴없이 '고학(苦學)의 산물'이라고 대답했다. 홍성대 선생은 고학을 창조의 에너지로 승화시켰다. 그렇게 탄생한 수학의 정석은 고집스럽게 원칙과 정도를 지킴으로써 꽃을 피우고 있다.

출판계 이야기를 들어보니 뉴미디어 바람과 함께 인터넷 강의가 학습서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고 한다. 이른바 인강 수강을 위한 보조 교재 정도만 팔리고 전통의 참고서들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고 한다. 다른 책보다는 덜 하지만 수학의 정석도 몇년 사이 판매량이 조금 줄어들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손자와 손녀 3세대가 풀고 익혔던 국민 참고서 수학의 정석이 위기를 극복하고 100년 뒤에도 살아 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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