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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다이나믹 코리아! 불과 9일 만에 '개편 없다'→'전면 개편'

전기료 누진제 국민소통에 실패…혜택 주고도 불만은 여전

[취재파일] 다이나믹 코리아! 불과 9일 만에 '개편 없다'→'전면 개편'
올 여름 유례없는 이상폭염으로 가정용 전기요금 누진제 논란이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평소 별 관심 없었던 사람들도 이제 누진구간이 6단계로 나뉘고 최저와 최고 등급 차이가 12배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른 차이를 보인다는 걸 알 정도로 국민들은 큰 관심을 보였고, 개편에 대한 요구도 거셌습니다.

도저히 에어컨 없인 살 수 없는 나날이 계속되자 이렇게 에어컨을 가동하다간 전기요금 폭탄을 맞을 것 같다는 우려들이 나왔고, 그 우려는 왜 가정용 전기요금만 누진구간이 가파르게 설계됐느냐는 형평성 논란으로 확산됐습니다.

전기요금 누진제는 1973년 석유파동을 계기로 에너지 다소비층에 대한 소비절약 유도와 저소득층 보호를 위해 시행됐습니다. 시작할 때부터 '가정용'에만 적용됐습니다. 지금 형태의 6단계 누진제는 2007년 이후 10년 가까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10년 동안 전기사용량이나 가구별 사용행태가 많이 달라졌는데, 누진 구간에 전혀 변화가 없었다는 점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 가전제품들이 사치품에서 필수품으로 바뀐 지 오래이고, 에어컨 주택보급률이 80% 를 넘었는데 '전기를 소비하는 것 = 잘못하는 일'이라는 기반에서 설계된 누진제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과거엔 아무래도 저소득층일수록 집도 작고, 가전제품도 별로 없고, 자연히 전기소비량도 적었지만 지금은 주거형태 자체가 너무나 다양해졌습니다. 1인 가구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에 누진제는 자칫 어느 정도 소득이 있는, 각종 가전제품을 잘 구비하고 불편 없이 쓰는 고소득 1인가구에게 가장 많은 혜택이 돌아갈 가능성도 다분합니다.

이런 요인으로 인해 여러 사람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키웠고, 직접 주머니 사정과 연계되는 문제이다 보니 가뜩이나 경기도 좋지 않고 폭염이 이어지는 요즘, 전기요금 누진제가 국민들의 감정을 제대로 상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안일하게 생각했습니다. 처음엔 말복이 지나면 어느 정도 더위가 누그러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작년엔 일찌감치 실시했던 '문 열고 에어컨 켜고 영업하는 업장에 대한 단속'도 올해는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지난해만큼 전력 예비율 상태도 나쁘지 않았고, 더위가 좀 물러가면 곧 누진제 논란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것으로 예상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런데 올해 정말 길게 더웠습니다. 요금 폭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누진제의 불합리성에 관련한 언론 보도들이 이어지자 결국 지난 9일 문을 열고 영업하는 업소를 적발해 과태료를 부과하겠다는 대책을 내놨습니다.

그때만 해도 정부의 입장은 '누진세는 건드릴 수 없다' 였습니다. "요금 폭탄이 생긴다는 말은 과장됐다", "합리적으로 스탠드형 에어컨을 하루 4시간 사용하면 월 요금이 10만원을 넘지 않는다", "스탠드형 에어컨을 하루 12시간씩 틀면서 전기요금을 싸게 낼 방법은 없다. 에어컨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택용은 여전히 원가 이하로 공급 중이다.”, “누진세를 조정하면 부자감세 우려가 있다.”, “전력위기가 현존하고 있는데 누진제를 완화할 테니 전기를 많이 쓰라는 구조로 갈 수는 없다." 정부는 누진세를 개편하기 어렵다며 갖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여론은 심상치 않게 흘러갔습니다. 합리적으로 하루 4시간 에어컨을 가동하면 요금폭탄은 없다는 정부의 발표는 오히려 국민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습니다. 불난데 부채질한 격이라고 할까요. '정부 청사에 한번 하루 4시간씩만 틀어봐라.', '에어컨 오래 켜는 사람은 비합리적인 사람이라는 거냐.'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수습은커녕 여론이 오히려 더 악화되자 청와대는 뒤늦게 '누진제 완화 검토'를 지시했고, 민심에 민감한 정치권까지 가세해 일단 7~9월 누진제를 한시적으로 완화해 요금을 깎아주는 방안을 내놨습니다. 그리고 누진제 TF를 구성해 개편을 논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18일 처음 열린 TF 회의.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누진제는 물론 누진제 집행 과정에서의 문제점, 더 나아가 교육용·산업용 등 용도별 요금체계의 적정성, 형평성에 이르기까지 전기요금체계 전반에 대해 근본적인 개편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문제가 제기된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뿐만 아니라 전체 요금 체계 자체를 완전히 수술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자, 이것이 불과 9일 만에 벌어진 일입니다. '개편 불가' 에서 '전면 개편'으로 누진제의 운명은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전개됐습니다. 주형환 장관은 "당·정 TF를 통해 소비자, 전문가 등 각계 각층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고 국민의 눈높이에서 시대변화에 맞지 않거나 불합리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살피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는데, 왜 그 눈높이를 좀 더 일찍 맞추지 못했는지 아쉬울 따름입니다.
 
국민들은 정부의 입장이 오락가락했다는 점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쉽게 뒤집을 정책이면 왜 진작 하지 않았느냐며 불신이 커졌고, 자연히 7~9월 한시적 경감책은 '이거 깎아주면 고마워할 줄 아느냐'는 불만으로 돌아왔습니다.

누진제에 대한 민심이 어떤지 먼저 읽고 한시적 완화책을 선제적으로 내놨다면 사태가 이렇게 진행되진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그 결과 그 동안 꿈쩍도 않던 누진제 개편 단초를 마련하게 됐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 정부 정책에 대한 국민과의 소통이란 측면에선 낙제점이었습니다.
 
정부의 고민도 이해 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누진제 단계를 축소하고 단계별 누진율 완화하는 쪽으로 여러 경우를 시뮬레이션 해본 결과 중산층 이하 계층 부담이 공통적으로 늘어나게 되는데 그 경우 조세저항은 어떻게 할지. 산업용에 누진제를 작용할 경우 기업의 원가 경쟁력 문제를 들고 나올 재계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등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정부는 그런 고민에 대한 진솔한 설명보다 70년대처럼 절약을 촉구하는 계몽적인 방법을 되풀이했습니다. 사실 '아끼는 게 무조건 미덕'이라는데 요즘 소비자들은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낭비는 지양해야 하겠지만 쓸 일이 있으면 쓴다는 소비자들에게 폭염을 버티고 에어컨을 가급적 조금만 켜라는 것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습니다. 정부가 기업이라고 본다면 마케팅 활동의 기본인 소비자 성향 파악에 실패했습니다.  
 
논란이 커지면 반드시 진짜 의도는 뭘까 의심하는 말들이 더 나오게 마련입니다. 정부는 억울하다는 입장이지만, 정부가 누진제 개편을 미루는 이유에 한전의 수익이 커지기를 바라는 속내가 있다는 말들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한전의 주주구성은 기획재정부 18.2%, 산업은행 33%, 국민연금 6.8%, 외국인 33%입니다. 저유가로 생산단가가 낮아지면서 한전은 지난해 수익이 늘어 약 2조원을 배당했는데, 정부와 산업은행이 1조원을 가져갔습니다. 세수를 늘리려는 정부, 조선업 부실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산업은행에는 올해 들어올 한전의 배당금이 정말 요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정부가 누진제 개편을 꺼린다는 지적도 이어졌습니다.
 
과거에 한전이 적자인 경우도 많았고, 지금도 누적적자는 상당하다는 측면에서 정부가 이런 시나리오로 일부러 음모를 꾸몄다고는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소통 실패가 여러 혼선을 키운 책임에선 자유롭기 어렵습니다.

누진제 전기요금 체제 변경은 법 개정 사안이 아닙니다. 한전이 관련된 약관을 고치고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가 승인하면 될 일입니다. 예산 등 민감한 이슈처럼 국회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해 국회가 발목을 잡을 여지가 적다는 말입니다.

물론 과거에도 누진제 개편 움직임이 있었고 야당의 반대로 논의 단계에서 난관에 부딪힌 일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부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골치 아픈 누진제 개편에 소극적이었다는 건 부인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누진제 개편’이 박근혜 정부의 '공약'에도 포함돼있던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청와대가 국민 여론이 비등하기 시작한 초기에 관련 부처를 불러모아 논의하기 보다 논란이 커지자 추후 질책하듯이 추가 대책을 요구하는 것도 그다지 자연스러운 광경은 아닙니다.
 
언론들은 정부가 세종시로 내려가면서 민간과의 스킨십이 부족해 민심을 읽는데 예전보다 감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내놓습니다. 물리적인 거리감이 국민의 고통과 요구에 대한 공감능력을 떨어뜨리는데 일조했을 수도 있어 보입니다. 안타까운건 사실이지만 이미 세종청사로 옮겨간 정부부처를 다시 원위치시킬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제 그 거리감만을 탓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좁힐수 있는 대책을 고민해야 합니다. ‘메르스 사태’와 ‘미세먼지 저감대책’ 등에서도 그런 문제점이 공통적으로 지적됐지만 별로 변한 것이 없습니다.

국민이 있기에 공조직이 존재합니다.  공무원이 영어로 ‘PUBLIC SERVANT(公僕)’인 것도 같은 이유이겠지요.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 하기 보다 ‘왜 지금 이렇게 국민들이 이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걸까?’ 민심을 제대로 읽고 선제적으로 대책을 내놓는 정부를 국민들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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