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 담당 기자로서 당시 제 관심은 ‘치매환자 가족의 경제적·정신적 고통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나눠 질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빠르게 진행되는 고령화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치매환자에 대한 치료가 효과적으로 이뤄지고 보호자가 건강한 돌봄을 할 수 있도록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는 건 중요하고도 시급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제 인식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습니다.
극장의 불이 켜지면 무대 위엔 중년의 딸과 노년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딸은 답답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추궁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딸의 말이 맞다면, 아버지는 다른 사람의 돌봄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그런 현실을 전혀 받아들이려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버지의 말이 맞다면, 아버지는 혼자 잘 살 수 있는데도 딸은 쓸데없이 걱정이 많습니다. 아버지는 화가 납니다.
이 연극은 우리가 흔히 보아온 것처럼 관찰자의 시점에서 치매환자와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지 않습니다. 경계성 치매환자의 시점에서, 치매환자의 내적 경험을 그려내 보여주고자 합니다. 극에서 같은 대사와 상황이 몇 번이나 변주되고 무대의 소품이 조금씩 이동하고 사라지는 건, 주인공이 겪는 혼란과 공포를 설명하는 동시에 그의 시간과 공간이 뒤죽박죽 뒤엉켜있음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이런 한계는 환자의 가족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절망감을 주고, 그 주변인들에겐 원망과 혐오의 감정을 낳기도 합니다. 극 중 딸의 남편 혹은 딸의 남편이라고 주장하는 남성은 아버지를 향해 반복적으로 그리고 위협적으로 묻습니다. 얼마나 더 오랫동안 주위 사람들을 괴롭힐 작정이냐고.
시간도 공간도 뒤죽박죽 되어버린 세계, 기억과 착각이 그리고 현실과 악몽이 그 어떤 실마리도 제시되지 않은 채 뒤엉켜있는 세계에 아버지 앙드레는 홀로 서 있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언제나 당연한 것이었던 자신의 자유의지와 존엄성을 새삼스레 지켜내기 위해 또 무너져가는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 그의 운명입니다.
관찰자가 아닌 당사자의 일로 체험하게 함으로써, ‘아버지’는 관객이 지닌 인식의 틀을 확장시킵니다. 막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치매에 걸린다는 것에 대해 말이죠. 눈물샘을 자극하고 연민을 불러일으키지 않아도 충분합니다. 아니, 그래서 더 좋습니다.
“그런 느낌이… 나의 모든 나뭇잎들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한 잎 한 잎. 가지들도! 그리고 바람… 더 이상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독백을 마친 뒤 입을 벌린 채 의자에 기대 잠드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봅니다.
물론 모두가 치매에 걸리는 건 아니겠죠. 그럼에도 분명한 건, 육체적 혹은 정신적인 이유로 다른 사람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노년이 오면 우리는 언제나 당연한 것이었던 우리의 자유의지와 존엄성을 새삼스레 지켜내기 위해 또 무너져가는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고독한 투쟁을 시작해야 할 거라는 점입니다. 그것이 고령화 시대, 우리가 처한 운명입니다.
(사진=연극 '아버지', 제공=국립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