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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어느 날 300만 원 짜리 과태료 통지서가 날아왔다

갑자기 날아든 정체불명의 편지. 떨리는 마음으로 열어봤더니, 법을 어겼으니 300만 원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최근 지방자치단체에서 “LPG 차량 소유·사용 관련 규정을 어겼으니 과태료를 물라”는 ‘편지’를 받아보신 분들, 적지 않으실 겁니다. 행정자치부가 일제단속을 통해 과태료 부과 대상으로 각 지자체에 통보한 이들만 전국에 3만 9천여 명에 이르니까요.

● 어느 날 과태료 통지서가 내게로 왔다

경기도에 사는 79살 장 할아버지에게도 어느 날 갑자기 시청에서 “3백만 원”을 내라는 과태료 통지서가 날아들었습니다. 장애인과 국가유공자들에게 특별히 소유·사용이 허락된 LPG 가스 사용 승용차 관련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장 할아버지는 임대주택에서 뇌성마비 1급, 시각장애 1급인 동생을 어머니와 함께 돌보고 있었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동생을 데리고 바람도 쏘일 겸 큰 맘 먹고 공동명의로 산 차가 말썽이었습니다.
과태료 부과 통지를 받은 장모 씨
10여 년 전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뒤엔 동생을 돌보는 건 오롯이 혼자 몫이었습니다. 노환이 겹쳐 도저히 혼자 동생을 돌볼 여력이 없게 되자 장 할아버지는 재작년 동생을 근처 요양원으로 입소시켰습니다. 문제없이 동생의 주소지를 옮겼는데, 거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차량 공동명의자인 장애인 동생과 주소지가 달라졌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액화석유가스의 안전관리 및 사업법> 제 28조 시행규칙에 따르면, “장애인이나 국가 유공자 또는 장애인 등과 주민등록표 등본 상 세대를 같이하는 보호자는 액화석유가스를 연료로 하는 자동차를 소유하거나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습니다.

쉽게 말해, 장애인 가족과 함께 살아야 장애인 명의(또는 공동명의)의 LPG 승용차를 타거나 소유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차를 산 지 5년이 되지 않았는데 장애인과 주소가 달라지면 과태료를 물게 돼 있습니다.

국가에선 휘발유 차량보다 50% 가까이 싼 연료 가격 때문에(2015년 대한LPG협회 자료에 따르면 LPG 가격은 리터당 804원,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1552원입니다.) 장애인이나 국가유공자에게 일종의 혜택을 주는 셈입니다. ‘장애인 등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규정의 취지 역시 혜택의 폭을 장애인 등을 부양하거나 보호하는 가족들에게도 넓혀, 실질적으로 사회적 약자에게 편의를 제공하겠단 겁니다.

● 16년 만의 일제조사…4만 명 가까이 무더기 적발

과태료 부과에 시동을 건 건 행정자치부입니다. 행자부는 지난해 정부합동감사에서 LPG 승용차 불법 사용자를 무더기로 적발했다며 시도 합동으로 전국 특별점검에 나선다고 밝혔습니다. 해당 법령이 만들어진 지 16년 만입니다. 그러면서 “휘발유 대비 유지비용이 저렴한 LPG승용차 사용이 증가하고 있으나 사용자의 법규 준수는 낮을 수 있다는 부분에 착안해 집중 점검한다.”고 공표했습니다.
지자체에 내려온 과태료 부과 공문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게 돌아가야 할 정당한 혜택을 남용하고 있는 ‘얌체족’들을 응징한다는 취지인데, 문제는 이번 부과 대상자 중엔 ‘얌체족’만 있는 게 아니란 겁니다.

앞서 언급한 장 할아버지는 차량 구입 뒤 세대 합가 시한으로 규정된 5년을 몇 달 남겨둔 상황에서 장애인 동생과 떨어져 지내게 됐습니다. 피치 못한 사정으로 동생을 요양소에 입소시키는 바람에 주소 이전을 하게 된 장 할아버지는 과태료 규정을 사전에 알았다면 굳이 위반할 유인이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충남 보령에서 자폐 장애를 가진 딸과 함께 살던 40대 A씨 역시 갑작스런 딸의 가출 때문에 과태료 300만 원을 물게 생겼습니다. LPG 연료를 사용하는 트럭으로 생계를 꾸리던 A씨는 딸이 가출한 뒤 주소를 옮기는 바람에 ‘세대 합가’ 규정을 어겨 고스란히 과태료를 떠안았습니다.

● 지자체 공무원들마저 갸우뚱…“나도 어떻게 할지 고민이에요.”

사정이 이렇다보니 과태료 부과 주체인 각 지자체 담당 공무원들도 고민이 큽니다. 각 지자체에는 과태료 민원이 빗발쳤습니다. 왜 갑자기 큰 과태료가 부과된 된 것이냐는 질문에서부터 도저히 낼 형편이 아니니 선처를 바란다는 읍소까지 갖가지 탄원이 잔뜩 쌓였습니다. LPG 차량을 사게 된 경위와 주소를 이전하게 된 사연까지 하나씩 들여다보면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과태료 법령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겁니다.

과태료를 경감할 수 있는 근거 법령이 없는 건 아닙니다. <질서위반행위규제법> 제8조에는 “자신의 행위가 위법하지 않은 것으로 오인하고 행한 질서위반행위는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에 한해 과태료를 부과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때 ‘오인 사유’에 대한 정당성을 판단하는 책임은 일선 공무원들에게 있습니다.

결국 담당 공무원들의 선의에 따라 비슷한 사안에 대해 과태료가 고무줄처럼 적용될 수 있는 겁니다. 실제로도 비슷한 시기, 비슷한 시한을 남겨두고 세대 전출한 이들에 대해 지자체마다 과태료가 들쭉날쭉하게 부과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말단 행정 처리 업무에 통일성을 강요하는 것은 자칫 기계적인 행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피치 못한 이들’입니다. 이들에 대한 구제 여부가 오롯이 공무원의 선의에 달린 것은 애초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령의 취지를 퇴색하게 하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300만 원은 중산층 직장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돈이기 때문입니다.

경기도 시흥시 경제정책과 김주배 팀장은 “LPG 승용차 이용자들이 우범자가 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지자체에서도 각 기관마다 과태료 부과 절차에 대한 내용이 공유가 되지 않고, 주소를 이전할 때 과태료 위반 가능성에 대해 고지하는 절차가 전무하다는 겁니다.

일례로 <자동차관리법> 제9조에는 분명히 “<액화석유가스의 안전관리 및 사업법>에 따라 액화석유가스의 연료사용 제한 규정을 위반하여 등록하려는 경우 신규등록을 거부해야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주소 이전 등을 위해 자동차등록사업소를 찾은 시민은 ‘과태료 부과’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듣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법령이 생긴지 16년 만에 일제단속이 실시되다 보니 지자체 각 부서 공무원들조차 해당 법령을 잘 알지 못하기도 합니다.

답답한 사연들이 늘어나자 전국 지자체 해당 부서 공무원들이 여러 차례 자발적으로 모여 회의도 했습니다. 이들의 요구는 하납니다. “구제 절차와 유예 기간, 구제 매뉴얼을 달라”는 겁니다. “징수율 높은 과태료의 경우 부과 대상자에 대한 2차적 검증 없이 일단 중앙에서 내려온 대로 부과를 하는 게 일선 공무원들의 관성일 수밖에 없다.”고 김 팀장은 덧붙였습니다.


● ‘얌체족’ 잡는 건 좋지만…장애인 부양가족은 한숨

이에 대해 행정자치부는 <액화석유가스의 안전관리 및 사업법> 법령의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가 보완해야 할 일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법에 있는 대로 감사를 벌여 적발 건수를 내놓은 것일 뿐이기 때문에 적발 이후의 사정은 각 지자체나 산업부가 주관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다만 굳이 16년 만에 해당 법령을 찾아 처음으로 ‘일제단속’을 벌여 천여 억 원의 세수를 마련하게 된 행자부 역시 충분히 개선안을 고안하고 권고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특히나 관행적으로 ‘섬세하지 않을 개연성이 큰’ 행정 때문에 어려움에 처할 사람들이 있다면, 더 정교한 시스템으로 갈음할 수 있는 것도 ‘행정 부처’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씁쓸함도 남습니다.

다시, 과태료 감경 근거인 <질서위반행위규제법>으로 돌아와 봅니다. “자신의 행위가 위법하지 않은 것으로 오인하고 행한 질서위반행위는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에 한해 과태료를 부과하지 않는다.”라고 돼 있습니다.

사회적 배려 대상자들에게 조금 더 혜택을 주자는 법률의 취지를 기만하고 실제로 특혜 대상자가 아닌데도 얌체같이 특혜를 누리는 이들에 대한 과태료는 물론 합당합니다. 그러나 위 법령이 암시하듯 ‘과태료’라는 제도는 함정을 파놓고 사냥감을 유인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매복’ 장치가 아니라, 사회의 공동 목적을 잘 이루기 위한 교화, 교육적 장치로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법 위반’을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이지, ‘법 위반’한 사람들을 최대한 잡아내기 위한 색출 도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3만 9천184명. 이번 일제단속으로 적발된 이들입니다. 행정자치부, 산업통상자원부를 비롯해 머리를 맞댈 수 있는 유관 부처들이 최소한 ‘행정의 사각지대’에서 어려움을 겪는 시민이 없도록 현명한 대안을 모색해주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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