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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뱀파이어,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깨우다…매튜 본의 댄스 뮤지컬

차이콥스키의 그 유명한 음악에 맞춰 백조의 군무가 펼쳐집니다. 무용수들의 짧게 깎은 머리는 새의 동그란 두상을 닮았고, 웃통을 벗어 적나라하게 드러낸 근육은 자연스레 힘찬 날갯짓을 떠올리게 합니다. 깃털처럼 나풀거리는 바지를 입고 맨발로 춤을 추는 남성 무용수들에게선 우아함 대신 위압적일 정도의 강렬함이 느껴집니다. 10여 년 전 처음 본 매튜 본(Matthew Bourne)의 ‘백조의 호수’는 그런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매튜 본의 작품엔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에 익숙한 관객들의 허를 찌르는 그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한 편의 동화 같았던 원작의 배경은 현대 영국 왕실로 옮겨오면서 풍자의 대상이 됐고, 완전한 사랑의 성취를 보여주는 듯한 원작 속 결말은 한 인간의 복잡한 욕망과 좌절을 담아내는 것으로 변모하면서 예상치 못한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백조의 사랑을 갈구하는 왕자의 모습은 동성애 논란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수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 작품은 이후 20년간 여러 국가에서 공연을 이어가며, 세계에서 가장 롱런한 무용 공연이라는 기록을 얻게 됐다고 합니다.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안무가’란 별명을 얻게 된 남자, 매튜 본의 새로운 작품 2012년 작 '잠자는 숲속의 미녀(Sleeping Beauty)'가 국내에 상륙했습니다.
원작은 오래된 동화를 바탕으로 한 줄거리에 차이콥스키가 음악을 입혀 무대에 올린 고전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입니다.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 인형‘을 이미 만들었던 매튜 본으로서는 이 작품을 통해 차이콥스키의 발레 3부작을 완성한 셈입니다.

많은 이들이 예상하듯이, 이 작품 또한 매튜 본의 손을 거치며 원작과는 많이 다른, 새로운 작품이 되었습니다. 무기력하고 수동적이던 동화 속 공주는 쾌활한 말괄량이로 등장하고, 대담하게도 이웃나라 왕자가 아닌 궁전의 정원사 청년과 사랑을 합니다. 사악한 요정 카라보스의 저주로 긴 잠에 빠진다는 설정만 그대로 가져왔을 뿐, 마법을 푸는 이 역시 왕자는 아닙니다.

잠에서 깨어난 시점을 현대로 설정한 까닭에 문신과 셀카가 유행하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등장하고, 여기에 사람의 피를 빨아먹으며 영생을 누린다는 뱀파이어 이야기까지 어우러지면서 원작은 재해석의 정도를 넘어 재창조의 수준으로 변형이 됐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그 뻔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매튜 본이 이렇게 원작을 비틀고 뒤바꿔 놓는 이유는 뭘까요? 그는 서면 인터뷰에서 “첫눈에 반한 사랑을 믿는 게 아니라면 원작 속 왕자를 향한 오로라의 사랑은 납득하기 어렵다”며, 잠들어있던 100년의 시간을 기다려준 옛 연인과 공주가 다시 사랑하는 내용으로 원작을 바꾼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오늘날의 관객들에게도 매력적일 수 있도록 작품의 스토리텔링을 강화하고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데 주력합니다.

그는 또 작품을 만들 때 고전발레나 현대무용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형화된 동작이나 추상적인 동작을 쓰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고 합니다.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동작이나 표현법은, 뮤지컬이든 탭댄스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참고해 적극 활용한다고 합니다. 매튜 본은 그렇게 만든 자신의 작품을 ‘댄스 뮤지컬(Dance Musical)'이라 부릅니다.

덕분에 그의 작품은 이전에 무용 공연을 본적 없는, 무용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극장으로 불러 모을 수 있었습니다. 비인기 장르로 불리는 무용 공연이지만, 그의 작품은 ‘매튜 본’이란 브랜드와 함께 인기 공연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습니다.
10여년 만에 매튜 본의 작품을 무대에서 다시 접하며, 그가 여전히 대중을 즐겁게 하는 감각과 아이디어로 무장한 창작자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대는 화려하고 극의 전개는 기발합니다. 전통적인 발레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관객도 사로잡을 만합니다. 

매튜 본에게서 그 이상을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겁니다. 아쉽게도 저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보여주는 화려함과 유쾌함 속에서 과거 ‘백조의 호수’를 보며 느꼈던 것과 같은 시각적 강렬함과 감동은 찾지 못했습니다.

내용상의 반전이나 비틀기라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매튜 본으로부터는 그 이상을, ‘시각적 충격’을 기대했던 관객의 입장에선 그래서 아쉬움도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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