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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애매한 구속 기준…檢 "어쩌란 말이냐"

[취재파일] 애매한 구속 기준…檢 "어쩌란 말이냐"
최근 검사들이 '멘붕'에 빠진 일이 있었습니다.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법원이 기각한 일 때문입니다. 구속영장을 둘러싼 법원과 검찰의 갈등은 해묵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또 갑자기 왜 영장 얘기냐고요?

구속영장 발부를 놓고 법원과 검찰이 첨예하게 갈등을 빚는 현실적인 쟁점은 범죄사실에 대한 판단이었습니다. 검찰은 피의자의 범죄사실이 소명된다고 주장하지만 법원은 사실관계를 둘러싼 다툼이 있다고 볼 때, 따라서 피의자의 방어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판단할 때 영장을 기각합니다.

검찰은 수사 현장을 모르는 법원이 서류와 피의자의 진술만으로 기계적인 결정을 내린다고 때로 비판합니다만, 형사사건에서 피의자가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는 판사입니다. 인신이 구속되느냐를 놓고 피의자나 재판부나 얼마나 고민이 많겠습니까? (물론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전 대표처럼 최유정 변호사 같은 전관 변호사에 기대는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그런데 이번 사안은 좀 특별합니다. 법원의 영장기각 사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서울남부지법 영장전담판사는 "현재까지 수집된 증거자료에 의하면 범죄사실에 대한 소명은 충분하다고 보인다"며, "다만 피의자의 신분과 가족관계, 경력에 비춰보면 도주 우려가 없어 보이고 범죄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는 충분히 확보되어 있다고 보여 증거 인멸 우려가 없다고 보인다"고 밝혔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범죄 혐의는 있어보인다. 하지만 도주우려나 증거인멸 우려가 없어서 기각한다는 것입니다.

영장 기각 사유를 받아 본 검사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언제는 범죄사실이 소명이 안 된다고 기각을 하더니 이번에는 범죄사실이 소명됐다고 기각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수사를 못해서 기각한다는 건 납득할 수 있지만 수사를 너무 잘해서 영장을 기각한다는 법원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얘깁니다.

구속에 대한 검찰과 법원의 인식의 격차가 사실은 구속 영장을 둘러싼 갈등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검찰은 피의자를 구속하면 자백받기가 쉽다고 생각합니다. 구속이 되면 수사의 7부 능선을 넘는거죠. 특수사건 같은 경우에는 피의자에 대한 범죄 수사는 1단계에 불과합니다. 구속하고 난 뒤 피의자가 누구에게 돈을 건넸는지 진술을 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2단계 정관계 로비 수사의 포문을 열 수가 있다고 검찰은 믿습니다. 구속 수사는 검찰에겐 게이트 수사로 가는 교두보인셈이죠.

언론의 평가도 극과 극으로 나뉩니다. 법원이 영장을 발부하면 검찰 수사가 잘됐구나, 법원이 인정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반대로 법원이 기각하면 검찰이 무리한 수사를 했구나 생각하고 문제가 있다는  비판 기사가 출몰하기 시작합니다. 

구속영장 발부는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피의자를 압박할 수 있는 대단히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검찰은 믿고 있습니다. 수사는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죠? 영장 발부와 기각은 수사초기 생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잣대인 셈입니다. 그래서 검사들은 핵심 피의자를 구속시키기 위해 총력을 다합니다.

총력을 다해서 범죄혐의를 입증했는데 법원이 범죄혐의가 입증됐다며 영장을 기각한다는 건 검사 입장에서 볼땐 역대급 허무개그입니다. 힘빠지는 일이죠. 이런 취지라면 범죄소명이 어느 정도는 가능하되 완벽하게 소명되지 않는 애매한 선에서 수사를 하라는 얘깁니다. 

범죄 소명의 기준이 법원의 양형기준처럼 매뉴얼화돼 있지도 않습니다. 사안이 다르고 쟁점이 다르기 때문에 오랜 경력을 갖고 있는 법원 판사들의 재량에 따라 판단할 수 밖에 없죠. 판사들이 생각하는 범죄 소명의 기준도 다를테고요. 검사들도 답답할 노릇입니다.

법원의 생각은 좀 다릅니다. 앞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인신을 구속한다는 게 중차대한 일입니다. 하루아침에 자유가 박탈되고 수의를 입고 냉난방이 안되는 퀴퀴한 구치소에서 얼마 동안이 될지 모르는 막연한 수감생활을 하라면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겠죠. 한 명의 인생을 그렇게 구제할수도 속박할수도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게 판사입니다. 
법원은 검사들이 영장 기각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마치 구속하면 유죄, 불구속하면 무죄라는 흑백논리로 법원에 항의를 하는 검사들의 태도가 불편합니다. 유무죄는 재판에서 가리는 건데 구속하든 불구속하든 기소해서 재판에서 유무죄를 다투면 될 일이지 피의자가 무슨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구속영장을 청구하느냐는 것입니다.

구속영장 발부를 따지는 법원의 3대 기준은 주거부정, 증거인멸, 도주우려입니다. 여기에 좀 더 참고할 사유로 덧붙이자면 중대한 범죄인가와 재범 가능성이 있는지 여부도 감안합니다. 법원은 범죄가 소명이 됐다고 해서 반드시 영장을 발부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피의자의 구속 여부는 중차대한 일이기 때문에 구속 여부를 따질때에는 다양하게 종합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죠. 범죄가 소명이 돼도 증거인멸 우려나 도주 우려가 있는지도 명백하게 따져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은영 전 회장의 경우는 범죄 사실이 충분히 소명됐기 때문에 향후 재판에 들어가도 유무죄를 다툴 사안이 아닌 형량을 다툴 사안이다. 따라서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아도 유죄 입증이 충분하다는 게 법원의 결론이죠.  

검찰의 '현실론'과 법원의 '원칙론'이 충돌한 게 최은영 전 회장의 영장 기각 사건의 본질입니다. 법조계 통념상 영장발부 기준으로 보자면 법원의 '기각'은 황당무계한 일이고, 형사소송법상 영장발부 기준으로 보자면 납득할만한 '기각' 사유이기도 한 셈입니다.  

그래서 검찰은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 결정을 납득 못하겠다며 다시 최은영 전 회장의 영장을 재청구하겠다고 합니다. 공은 다시 법원으로 넘어갈 것 같습니다. 이제부턴 소신과 담력의 싸움입니다. 법원과 검찰의 최은영 구속영장 2라운드의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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