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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아우라' 사라진 와인… '1병 4,900원'은 많을수록 좋다

[취재파일] '아우라' 사라진 와인… '1병 4,900원'은 많을수록 좋다
칠레나 EU 같은 와인 생산 국가들과 FTA가 발효된 뒤로, 와인에 붙는 관세가 사라졌는데도, 값이 기대만큼 떨어지진 않았습니다. 현지 판매상이나 국내 수입상이 그만큼 값을 올려 왔기 때문인데, 최근엔 국내 유통업체가 직접 나서서 이런 거품을 뺀 와인이 인기입니다.

올해 들어 5월까지 한 대형마트에서 가장 많이 팔린 수입 와인은 칠레산 카베르네쇼비뇽 품종 레드와인입니다. 750밀리리터 1병 값이 6,900원에 불과합니다. 이 마트에선 판매 순위 5위까지가 모두 1만 원이 안 되는 제품입니다.
언뜻 FTA 덕분인가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미국과 칠레, EU에 호주까지 와인 생산 국가들과 잇단 FTA 체결로 병당 15%씩 붙던 관세가 사라진 게 사실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렇게 값이 내리기까진 수많은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싸게 팔고 싶어도, 유통구조에서 ‘힘’있는 쪽에서 값을 올려 왔기 때문입니다.

와인 원가는 가장 먼저 와인농장에서 정합니다. 올릴 수도 있고, 내릴 수도 있습니다. 한국 정부가 FTA 발효에 따라, 관세를 내렸다고 하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비싸게 먹던 걸 싸게 먹게 되겠네.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만든 와인인데. 그럴 순 없지.” 그리고 값을 관세만큼 올려버리면 그만입니다. 1만 원에 보내던 와인에 관세만큼 1,500원을 더 붙여도 막을 순 없는 겁니다.

현재 국내법상 와인은 주류수입업자만 수입을 할 수 있게 돼 있습니다. 와인을 일단 들여오는 순간 수입상만 다시 값을 정할 수 있는 겁니다. 여기서 수입상은 폭리를 취해 온 게 사실입니다. 결국, 아무리 관세가 내려도, 현지 와인 판매상이 수출가를 올리거나 국내 수입상이 마진을 더 붙이면 값이 내리기는커녕 오히려 비싸지는 게, 현재 와인 가격 결정 구조인 겁니다.
  그럼 지금처럼 거품 빠진 와인은 어떻게 나왔을까요. 시작은 소비자가 와인에서 매력을 전처럼 느끼지 못한 때부터일 겁니다. 와인의 특별함이 사실은 별것 아니란 걸 알게 된 이후부터입니다. 요즘 와인 좀 마신다는 소비자들이 늘 들여다보는 사이트가 있습니다. 와인 이름만 입력하면, 전 세계 소매가를 한 눈에 정리해 주는 와인서처(www.wine-searcher.com)입니다. 이 사이트가 내건 구호는 Know more. Spend less. 전 세계 와인 소매가를 더 알아보고, 돈은 적게 쓰자는 거죠.

  이런 사이트 덕분에 우리는 와인의 '민낯'을 좀 더 알게 됩니다. 사실, 지금도 한국 사람에게 와인은 특별한 날 마시는 술입니다. 근대화 과정 동안 우리는 한시도 서구사회를 동경하지 않은 적이 없죠. 서구의 음식 문화 속엔 와인이 늘 함께합니다. 동경하는 대륙에서 온 고가의 술. 일종의 역사지리적 ‘아우라’ 덕분에, 와인은 비싼 값을 내고 먹어도 좋을, 특별한 술로 남아 있는 거죠. 하지만, 이 ‘아우라’가 깨진다면 어떨까요. 비싸고 귀한 줄 알았던 와인 한 병이, 외국에선 그저 마트 식전주 코너에서 싼값에 팔리고 있단 걸 알게 되면, 상황은 많이 달라질 겁니다.
 2010년대가 되면서 유통업체는 이런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챘습니다. 소비자들이 소매점 직원들부터 붙잡고 따지고 나섰기 때문이죠. 그러자 대형마트를 중심으로 특수한 와인 가격 결정 구조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유통망의 우위를 바탕으로, 수입상들에게 가격을 내리라고 압박한 겁니다. 와인이 비싸서 잘 팔리면 마진을 더 붙일 수 있으니까 이럴 필요가 없었겠지만, 점차 안 팔리게 되니까 팔을 걷어붙인 거죠.
 
 그런데 이런 압박이 통하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대형마트의 와인 구매 담당자는 값싼 현지 와인을 직접 찾아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싼 와인을 함께 들여놓을 수입상 한 곳을 우선, 선정합니다. 그리고 수입상과 함께 와인농장을 찾아갑니다. 그 뒤 대량 주문으로 매출을 보장해 주겠다고 설득합니다. 수입상 역시 이 과정에 매출을 보장받는 셈이죠. 1만 원 대 미만의 베스트셀러 와인은 이런 '기획 유통' 덕분에 나올 수 있는 겁니다.
 수입상이 정한 가격에 마진만 붙여 유통하던 도매상들도, 같은 방식으로 가격을 낮춘 곳이 등장했습니다. 지난 4월 경기도 의왕에 창고형 매장을 개장한 한 도매업체는 각 대륙 와인 26개를 대량으로 직접 구매했습니다. 값은 4,900원 동일가. 도심 외곽에 창고형 매장을 지어, 임대료와 인건비를 줄인 전략이 있었기에 가능한 가격이기도 합니다. 이곳 대표는 ‘아우라’에 짓눌린 한국의 와인 문화를 바꿀 때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와인을 소주나 막걸리처럼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술로 만들겠다는 거죠. 그만큼 싼 와인이 많아야 가능한 일일 겁니다.

 값싸게 ‘기획 유통’되는 와인이 늘수록, 와인 애호가도 문외한도 부담 없이 와인을 즐길 날은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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